판문점 출입 두각 나타내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26] 김자동의 판문점 취재 시절의 애환
▲ 1952. 4. 널문리. 초가집에서 바라본 판문점 정전회담장(왼쪽 흰색이 공산 측 막사, 오른쪽 검은 색이 유엔군 측 막사). ⓒ NARA
정치부에 소속하면서 판문점을 출입하였다. 당시 판문점은 굵직한 뉴스거리가 많았다.
△ 김자동 : 인제 정치부 일을 좀 겸해 좀 했고, 그 다음에는 판문점 취재를 대개 국방부 기자들이 했는데, 조선일보에서 국방부 출입하는 기자가 영어를 잘 못하고, 내가 보기에 처음에 정치부 경험하기 전에 어디 가서 출입처를 하나 갖고 싶어하니까, 나더러 대신 따라가 달라고 말이야. 국방부 출입은 사회부고 판문점도 따라서 사회부에서 취급하는 건데, 내가 나가면서 그 일은 정치부 소관으로 넘겨 가지고 판문점 출입을 내가 했어요.
△ 한찬욱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 김자동 : 회의장이 천막이었거든, 천막인데 창문을 열어놓고 회의해요 보통. 특히 더울 적에는 밖에서 다 들을 수 있지. 다 듣는데 세 번 서서 베끼는 거니까 세 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내용을 다 파악을 제대로 하고.
△ 한찬욱 : 주로 어떤 내용들입니까?
△ 김자동 : 주로 서로 위반했다는 거, 정전협정 위반했다는 거에 대한 비난이면, 또 상대방은 으레 부인하고 그거야 거의 늘 그거지. 기삿거리가 되고 전화로 연락하면 '판문점 특파원발'이라고 해서 신문 내고. 어떤 때 와보면 내가 그런 얘기 안 했는데 신문에 난 적도 있고 말이야. 내가 한 이야기도 빼먹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 거기 출입을 하고 출입하는 동안에 국방부 출입기자가 대부분인데 영어를 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기자인데도 벙어리 노릇하고, 무슨 일 있어도 내가 나서서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선 다른 덴 기자단이 있고 간사란 게 있었는데 출입기자. 거긴 그런 게 없었거든. 농담으로 날 간사라고 부르고 그랬어. 한 2~3년인가 출입하고 했어요. 별 재미도 없고, 기자생활 한 몇 해 해 보니까. 에이 이까짓껏.
더군다나(수석) 경무대하고 외무부 출입했는데, 외신이야 번역만 하는 거고 번역은 더 늦을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다른 데는 그래도 정부 비난하는 기사도 나오고 하는데 외무부는 없거든. 외무부 내가 출입처에서도 농담으로 외무부 출입하는 애가 다 여당 기자지 야당 기자가 있나 이런 얘기도 했지만, 뭐 외교정책에 대해선 비판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무조건 친미반공은 아주 그야말로 국시지. (주석 16)
▲ 1953. 4. 11. 판문점 정전회담 연락장교회의에서 부상병 포로 교환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하고 있다.1953. 4. 11. 판문점 정전회담 연락장교회의에서 부상병 포로 교환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하고 있다. ⓒ NARA
김자동의 판문점 취재 시절의 애환은 이어진다.
판문점 취재기사는 현지에서 전화로 불렀다. 이튿날이면 <조선일보> 지면에 '판문점 김자동 특파원'이라고 제법 큼직하게 실리곤 했다. 그때만 해도 기자 이름을 다 쓰지 않고 H기자 등으로 영문 이니셜을 썼는데 당시 말단기자인 내 이름이 신문에 많이 실렸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 기사에 불만이 많았다. 어떤 때는 내가 전혀 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실리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내가 자세히 전한 이야기를 전부 다 빼먹기도 했다.
판문점에 출입할 때 발굴기사를 하나 쓴 적이 있다. 비무장지대 내에 민간인 마을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단독으로 보도했다. 영어실력 덕분에 판문점 취재는 즐거웠고 또 보람도 있었다. 두 해 가량 판문점 출입을 했다. (주석 17)
주석
16> <면담집>, 97~98쪽.
17> <회고록>, 28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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