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비혼인데 '자식 마음'이란 게 생겼다
그저 혼자 사는 게 좋았던 시절은 가고 늙어가는 부모님 걱정은 늘어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이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불혹을 훌쩍 넘긴 40대의 딸이지만 엄마는 아직도 내가 배곯는 아이처럼 보이는지 틈만 나면 반찬을 보내주시겠다고 성화다. 엄마의 걱정과 달리 매끼 꼬박꼬박 잘 챙겨먹고 있건만, 엄마는 딸내미 혼자 굶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노심초사다.
부모님은 마흔이 넘어서도 1인 가구의 삶을 살고 있는 막내딸, 나에게 유독 마음을 쓰신다. 명절에 모였다가 본인들의 가족들과 함께 왁자지껄 본가를 떠나는 언니나 오빠와 달리, 혼자 털레털레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꽤나 짠하시다고 한다. 이런 게 부모 마음이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자식 마음이라는 게 생겼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는 늙은 부모님의 모습이 참 안쓰럽다.
40대에 생긴 '자식 마음'
▲ 명절 뿐만 아니라, 대보름 등 무슨 날 후면 도착하는 반찬들. 저 정도면 정말 잔치해도 되겠다. 사진은 지인 찬스. ⓒ 최은경
20대에 독립을 시작할 때는 마냥 좋았다. '부모님 품 속' 굴레를 벗어던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독립생활은 비록 조촐했지만, 자유롭고 즐거웠다. 부모님의 안부 전화는 잠깐의 생사 확인 후 후다닥 끊기 일쑤였고, 본가에 가는 일은 연례행사였다.
어김없이 거하게 보내준 반찬을 더 이상 들어갈 곳 없는 냉장고에 테트리스 조각 끼워 맞추듯 쑤셔 넣으며 '뭘 이리 많이 보냈냐'며 짜증을 내는 일은 다반사였다. 독립은 했어도 언제나 마음 한켠은 부모님께 걸쳐 있었지만, 공사가 다망했던 청춘의 삶은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을 온전히 소화하기엔 너무나도 바빴다.
부모님에 대한 극적인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불혹을 넘기며 시작된 것 같다. 두 손을 잡고 병원을 모셔가던 날, 이제는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임을 실감하던 날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대고 있던 부모님을 이제는 내가 받쳐 줘야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비상시에만 가동하던 나의 걱정 레이더가 연중무휴 가동을 시작했다. 짐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보다 수레에 넣어 끌고 다니는 게 수월한 부모님은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 카트를 자주 이용하시는데, 언제부터인가 카트를 끌고 다니는 보도블록이 내 눈엔 자갈밭처럼 보인다.
재활용품 수거장은 왜 하필 지하에 있는 건지, 빙 둘러 걸어 내려가야 하는 비탈길이 낭떠러지처럼 느껴지고, 이미 욕실화는 미끄럼방지용으로 교체했건만 욕실 바닥이 마치 빙판길처럼 보인다.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 하나. '내가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었나? 웬 걱정이 이리 많아졌지?'
"장바구니 카트 밀 때 바닥 조심하고, 재활용품은 내가 가서 버릴 테니 모아두고, 욕실에서 조심해서 걸어 다니고... 어쩌고저쩌고... 알았지?"
조심해야 할 100여 가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다 또 다시 의문에 빠진다. '내가 잔소리가 심한 타입이었나? 뭔 말이 이렇게 많아졌지?' 딸이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잔소리 폭격을 멈췄다.
고작 저녁 9시에 밤이 너무 늦었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남기던 아빠의 전화에 코웃음을 치던 내가 떠오른다. '아빠 나 마흔 넘었어, 걱정 마.' 아빠와 엄마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딸아 우리 아직 70대다, 그 정도는 안다.'
40대의 딸과 70대의 부모님이 서로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한다. 부모님은 '혼자' 사는 딸이 걱정이고, 나는 '늙은' 부모님이 걱정이다. 다른 점이라면 부모님의 걱정은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된 반면, 나의 걱정은 부모님이 찐할아버지, 찐할머니 대열에 오르면서부터 모터를 달고 질주 중이라는 거다. 이미 충분히 조심하고,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걱정은 차고 넘쳤다.
서로에게 '더하기'가 되어주는 지금
▲ 아직 본가에 돌려보내지 못한 반찬통들. ⓒ 변은섭
나의 걱정이 많아지면서 달라지는 것들은 꽤나 많아졌다. 가끔 생사만 확인하던 전화는 매일 저녁 하루의 일과를 미주알 고주알 나누는 것으로 바뀌었고, 연중 손에 꼽히던 본가 방문은 한 달에 한 번꼴이 되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반찬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성가신 것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고마운 것으로 바뀌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집밥이 절실하게 그리운 날이 생기기 시작했고, 엥겔지수를 획기적으로 떨어뜨려 불가능에 가깝던 저지출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 같은 엄마의 반찬을 나는 독립생활의 일등공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의 반찬은 천 번의 손품과 만 보의 발품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수차례의 장보기를 시작으로 반찬통이 빽빽이 들어찬 택배상자를 택배기사에게 인계하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반찬 프로젝트는 70세를 훌쩍 넘긴 노인 두 분이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반찬을 보낸다고 괜히 수선을 떨다 엄마와 아빠가 병이라도 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3~4주에 한 번은 보낼 심산인 엄마를 뜯어말려야 한다. 이제는 내 허기짐을 채우는 기쁨보다 아빠와 엄마의 수고로움이 더 마음에 쓰이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배불리 딸 먹일 생각에 즐거우실 부모님의 낙을 몽땅 빼앗을 수만도 없다. 부모님의 즐거움과 고생스러움 사이의 적정선을 잘 찾아내는 것도 내 몫이다.
반찬을 보내겠다며 또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계신 엄마를 뒤로 하고, 요새 밥맛이 없어서인지 밥을 잘 못 드신다는 아빠를 위해 난 배달앱을 뒤지고 있다. '짜장면 좋아하시는데 중국집에 시켜볼까?' 요리 비책을 가진 중국집을 찾아내 아빠의 입맛을 되찾아 줄 생각이다.
난 1인 가구이지만 완전한 1인 가구는 아니다. 서로를 걱정하며, 서로의 끼니를 챙겨주는 나와 부모님은 1+2인 가구쯤 되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챙겨드려야 할 일이 많아졌지만,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여전히 서로에게 '더하기'가 되어주는 지금이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
"김치 남은 거 다 먹으면 그때 반찬 보내줘. 엄마 반찬이 제일 맛있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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