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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만큼 대장장이 귀하게 다룬 작가가 있을까

[정진오의 대장간 이야기6] 문학 작품에 나타난 '대장장이'

등록|2023.03.23 04:56 수정|2023.03.23 04:56

▲ 김훈 작가 (자료사진) ⓒ 공동취재사진


우리 문학사에서 김훈만큼 대장장이를 귀하게 다룬 작가가 또 있을까. <현의 노래>는 '대장장이 소설'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대장장이가 자주 등장하고 무게감 있게 그려진다. <남한산성>에서는 만들지 못하는 게 없는 재주꾼 대장장이가 나온다. 그 대장장이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사직(社稷)의 존망을 두 어깨에 짊어진 밀사의 역할까지 떠맡는다.

작품 출간 연도로는 『현의 노래』가 앞서겠지만, 청나라의 침략과 남한산성에서의 농성, 그리고 임금 인조의 삼전도 항복을 다룬 『남한산성』 속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 작가는 마흔 개의 제목 중에 '대장장이' 편을 따로 뽑았다.

대장장이는 거기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산성 안 마을의 대장장이는 서날쇠(徐生金). 이름부터가 영락없는 대장장이다. 딱 맞추어 이름을 짓느라 작가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이 간다. 서날쇠는 눈썰미가 여간 매서운 게 아니다. 농기구며 병기며 목수들의 연장이며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

서날쇠는 임금이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앉자 식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임금이 왔으니 청군이 성을 포위할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풀무꾼이며, 숯장이 등 성을 나가려는 일꾼들도 붙잡지 않았다. 서날쇠는 그렇게 성안에 혼자서 남았다. 대장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서날쇠는 자신이 만든 연장에 '생(生)' 자를 새겼다. 사람들은 그 연장을 만든 이의 이름을 따서 생쇠라 불렀다. 이름을 새긴다는 건 그 물건에 생산자의 품질보증수표를 붙인 거나 마찬가지이다. 물건에 생산자의 이름을 새겨 넣는 걸 옛사람들은 관지(款識)를 갖춘다고 했다.

작가 김훈이 서날쇠의 관지 갖춤을 작품 속에서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에 얼마나 많은 장인이 서날쇠처럼 자신의 이름을 물건에 새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서날쇠 같은 장인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면
 

▲ 김훈 작가의 소설 <현의 노래>와 <남한산성>. ⓒ 자료사진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서유구(1764~1845)는 중국이나 일본의 장인들은 모두가 오래 전부터 크고 작은 기물에 관지를 갖추었는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러한 표지나 기록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좋은 물건과 나쁜 물건을 분간할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서유구는 그러면서 장인들을 관장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이러한 병폐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박규수(1807~1877)도 서유구의 입장과 같았다.

작품에서처럼 서날쇠 같은 장인이 나라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면 병자호란 당시 우리가 그렇게 무참하게 패하지도 않았을 테고, 서유구의 한탄이 제대로 먹히기만 했더라도 조선말 우리는 그처럼 힘없이 외세에 농락당하지 않았을 게 자명하다.

서날쇠는 좋은 나무를 때야 쇠를 잘 구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양평에까지 가서 참나무를 실어 와서 화로의 땔나무로 쓰거나 그걸로 숯을 냈다. 서날쇠는 화약도 만들 줄 알았는데 대장간의 착화제로 쓰기도 하고, 관아에 납품하기도 했다. 작가는 서날쇠를 그야말로 만능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달군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때릴 때, 신출내기 숯장이나 풀무꾼이 불똥을 뒤집어쓰고 화상을 입기가 십상이라면서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쓰던 화상 치료 민간요법도 그린다. 쥐 기름으로 화상을 치료한다는 거다.

쥐 기름이 화상 치료에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 아직 명확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동물 기름과 특정 질환과의 약효 연관성을 요새 한방(韓方)에서도 말하고 있기는 하다. 조선시대 임금들의 피부질환과 치료법을 연구해 책으로 펴낸 방성혜 한의사의 『용포 속의 비밀, 미치도록 가렵도다』를 보면, 1659년 임금 현종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심한 염증이 생겼는데 돼지기름 연고로 낫게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 책에서는 다른 동물 기름의 효능도 밝히고 있다. 수탉의 기름은 청력 저하를 막는 데 효과가 있고, 거위 기름은 손발이 튼 데, 오리 기름은 부종에, 곰의 기름은 기미와 두부 백선에, 고라니 기름은 종기에, 오소리 기름은 화상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한의사는 오소리 기름을 얘기했고, 작가 김훈은 쥐 기름을 말했다. 아무래도 의사 쪽에 귀가 쏠리기는 한다.

요즘 대장장이들한테 물어보면 대장간에서 화상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불똥을 뒤집어쓸 일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고 한다. 취재하면서 만난 대장장이 중에는 화상보다는 망치질 과정에서 쇳조각이 튀면서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크게 다친 경우가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안에는 분명 대장간이...
 

▲ 서문은 남한산성의 동서남북 4개의 문 가운데 가장 작다.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갈 때 이용한 문이다. 정조 3년(1779)에 개축하면서 우익문(右翼門 )이라 칭했다. 송파나루 쪽과 가장 가깝다. 2023년 3월 7일. ⓒ 정진오


서날쇠는 수어청의 야장(冶匠)이 되었다. 그의 대장간은 망가진 병장기를 고치고 새로 만드는 병기창(兵器廠)이 되었다. 서날쇠의 대장간은 청군의 공성전을 막아내며 50일 가까이 버티게 한 핵심 군수기지였다. 꼼짝없이 성안에 갇힌 신세이면서도 밤낮으로 말싸움을 그치지 않는 중신들보다 서날쇠의 대장간이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 대장간은 입으로만 떠드는 그들처럼 공허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삶의 공간이었다.

서날쇠는 남한산성을 둘러싼 청군의 포위를 풀기 위해 임금의 문서를 지니고 산성을 빠져나가 경기도, 충청도 등지의 군영에 전달하는 밀사 역할도 맡았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대신 중에서는 쇠를 두들기는 한낱 천골에게 높디높고 지엄한 임금의 문서를 맡길 수가 있느냐는 반론이 일기도 했다. 쓸데없이 싸움질만 하는 정치권과 삶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도 철저하게 무시당한 대장장이의 비교,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고 있는 작가의 눈이 빛나는 대목이다.

서날쇠는 목숨을 걸고 경기도와 충청 일대의 군영을 돌며 임금의 밀지를 전했다. 포위된 남한산성을 구원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각 군영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더디기만 했다. 그 사이 임금은 송파나루와 가까운 남한산성의 서문(우익문)을 통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항복의 길로 나섰다.

소설에서처럼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안에는 분명 대장간이 있었을 게다. 어디쯤이었을까. 그 위치를 가늠이라도 해보려 지난 3월 7일 오후 남한산성을 찾았다. 평일이었음에도 성안은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 옛날 대장간의 위치를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행궁에서 멀리 떨어진, 논밭이 있던 그 언저리의 어디쯤이지 않을까 생각만 했다.

김훈의 소설에서 그려진 것처럼 우리의 불쌍한 병사들이 1월의 엄동설한에 손발이 얼어서 문드러지는 고통을 겪으며 지켜낸 그 성축에도 올랐다. 청군의 말발굽 먼지에 뒤덮였던 서울 하늘이, 400년 뒤인 2023년 지금 중국발 미세먼지의 습격을 받아 온통 뿌옇게 보였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송파나루 그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롯데월드타워의 높다란 모습도 그저 흐릿하게 멀리 있을 뿐이었다.

<현의 노래>에 등장하는 대장장이는 '야로(冶爐)'
 

▲ 남한산성 서문의 홍예문. 남한산성 유적 중 대장장이의 손길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대문이다. 외적의 화공(火攻)을 막아내기 위해 나무문의 겉면에 수많은 철판을 잇대어 철갑문을 만들었다. 철엽(鐵葉)과 이를 고정하기 위한 못을 대장장이들이 제작했다. 붉은색 철판 위로 줄을 지어 돋아난 둥근 부분이 못 머리이다. 2023년 3월 7일. ⓒ 정진오


<현의 노래>는 우륵과 가야금, 가야와 신라의 전쟁을 주요 모티프로 한다. 왕의 죽음과 장례, 나라 간 전쟁이 긴박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 속에서도 대장장이의 솜씨가 빛난다. 대장장이가 꽤 높은 반열에 서고, 심지어 왕과도 독대한다. <현의 노래>에는 작가 김훈의 대장장이를 향한 깊은 철학적 통찰이 제대로 스며들어 있다.

<현의 노래>에 등장하는 대장장이는 '야로(冶爐)'다. 야로 역시 서날쇠처럼 이름에서부터 대장장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야로는 가야 임금의 장례 때 쓸 엄청난 양의 쇠를 만든다. 신라와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다양한 병장기도 특별히 고안해 제작한다. 가야의 저물어가는 운명을 짐작했는지 이중간첩 노릇을 하던 그는 신라에 귀부한다. 그로 인해 백제나 가야와의 결정적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대장간의 원시적 모습을 구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작가는 아마도 가야나 신라의 무덤에서 발굴된 철기들을 유심히 살폈던 듯하다. 소설 속에서처럼 창, 칼, 도끼, 갈고리, 철퇴, 화극, 화살촉, 방패, 갑옷, 철모, 말안장, 등자, 재갈 같은 것들이 당시 대장간에서 만들던 병장기일 테다.

야로는 특정 지역의 군권까지 거머쥔 실력자였다. 왕이 인정하니 대궐 중신들도 어쩌지를 못했다. 소설은 대장장이 직업을 죽은 왕이 묻힐 때 따라 죽어야 하는 순장 조에 포함했다. 죽어서도 뭔가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야 하는 운명이란 얘기일 터.

'쇠붙이는 싸움터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쇠붙이의 세상을 만들어갈 뿐'이라거나 '나도 태평성대에 연장이나 만들다 가고 싶소'라는 대장장이 야로의 생각은 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와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흡사 작가 김훈의 생각이기도 할 게다.

대장간 입체감 넘치게 그려낸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 벽초 홍명희 선생. ⓒ 자료사진

 

▲ 벽초 홍명희의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 개정판 ⓒ 사계절출판사


옛날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을 입체감 넘치게 그려 낸 작품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임꺽정 패 이춘동이는 대장간을 하고 있다. 벽초의 손에서 빚어지는 그 대장간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게딱지 같은 대장간 속에 맨 뒤에는 일꾼 하나가 풀무 위에 올라서서 풀무질을 하고 모루 뒤에는 춘동이가 왼손에 집게 들고 바른손에 마치 들고 불 속을 들여다보고 앉았고 춘동이 앞에는 일꾼들이 메들을 거꾸로 세우고 쇠 위에 팔들을 걸치고 섰고 대장간 앞에는 동네 사람 서넛이 쪼그리고들 앉았는데, 둘은 고누를 두고 하나는 옆에서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에 춘동이가 불 속에서 발갛게 단 쇠를 집게로 집어내서 모루 위에 놓고 마치질을 하는데 마치질 한 번에 메질 한 번씩 쌍메가 번갈아 들었다. 마치질 소리와 메질 소리가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서로 맞았다.'


대장은 왼손에는 집게, 오른손엔 작은 망치(마치)를 쥐고, 메질꾼 2명이 앞에 섰다. 대장이 망치를 두드리는 모습은 김홍도나 김득신 등 18세기 화가들의 대장간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던 장면이다.

이들의 그림 속 대장은 망치를 들지 않고, 집게만 쥐고 있다. 그래서 대장을 집게잡이라고도 한다. 임꺽정은 이 두 명의 화가들보다도 더 오래전 인물이다. 대장이 집게와 망치를 같이 든 모습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준근의 풍속화에서나 보인다.

작가 홍명희는 왜 이춘동에게 집게와 망치를 동시에 쥐게 하고 망치질을 시켰을까. 이는 홍명희가 대장간 모습을 구경하던 시절과 김홍도 등이 살던 시대와의 차이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홍명희는 분명 이춘동의 대장간 모습을 그리기 위해 집필 당시 자신이 살던 주변의 대장간을 자주 찾을 테다.

이때는 1937년 12월 이후 1940년 10월 이전이다. 그 시절 홍명희는 서울 사대문 안을 벗어나 마포 강변의 대흥동에 살았다. 아마도 당시 마포지역의 대장간 모습이 소설 속 이춘동의 대장간 장면으로 그려진 게 아닐까 싶다. 김준근이 그림을 그리던 시대와도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다.

이처럼 대장간 작업 장면을 그린 소설과 그림을 비교하자니 대장간에서 일하는 모습의 역사적 변천 과정도 구체적으로 살필 수가 있다. (※ 이 부분은 다음에 게재할 '그림으로 보는 대장간'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대장장이는 우리의 소설뿐 아니라 뛰어난 시인들에 의해서도 간혹 나타나고는 했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 꼬부랑 호미가 되어 /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고 노래한 김광규 시인의 <대장간의 유혹>은 대표적이다.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 한꺼번에 싸게 사서 / 마구 쓰다가 /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던 1941년생 시인의 마음은 요새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설까.

박경리의 <토지>에도 등장하는 대장장이
 

▲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통영의 <박경리기념관>. ⓒ 이한기

  

▲ 신경림 시인이 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광복 70주년, 한국 현대시 100년 날개를 날다'를 주제로 열린 현대시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해 축시를 읽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5월 11일까지 우리 현대시 대표 시인들의 희귀 시집 11점과 시인이 직접 지은 육필 시, 액자·족자, 시와 그림, 비무장지대 소재 시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2015.5.1 ⓒ 연합뉴스


신경림 시인의 <파주의 대장장이를 만나고 오며> 역시 대장장이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파주의 대장장이를 만나고 오며>는 식칼이나 낫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평범한 대장장이에게도 자신의 손으로 병장기를 녹여내 평화의 레일을 깔고, 남북을 왕래하는 기차를 만들고픈 가슴 부푼 꿈이 있음을 그렸다.

시인 신경림은 또 서사시 <남한강>에서는 쇠무지벌이니 다인철소니 하여 신라,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대장간 마을의 내력을 읊기도 했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한 더 많은 작품 속에도 대장장이는 등장한다. 문학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진대 우리 삶과 밀접했던 대장간이 소설 속에서 빠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우리 문학에서는 대장간이 끼어들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대장간은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필수 공간이 아닌 낯선 이방인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이야기가 우리 문학에만 있을쏜가. 어느 나라에서건 그 나라의 문학 속에는 대장장이가 녹아들게 마련이다. 대장간은 인류 공통의 문명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 소설 중 콜슨 화이트헤트(Colson Whitehead)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예로 들어보자. 한 노예 소녀의 탈출기를 그린 이 소설은 2016년 전미도서상과 201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작이다.

작품 속에서, 노예 사냥꾼 청년의 아버지가 대장장이였다. 그 대장장이도 앞에서 얘기한 우리의 서날쇠나 야로처럼 못 만드는 게 없었다. 못, 말발굽, 쟁기, 칼, 총, 쇠사슬 등이 그 대장장이의 일거리였다. 작가는 그의 대장간을 '세상의 원시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지칭했다. 그 대장장이는 자신이 불리는 벌건 쇳덩이를 신처럼 절대적으로 여겼다.

그 대장장이가 만드는 물건들은 편리함을 주기도 했지만 노예를 옥죄는 도구로도 쓰였다. 노예를 붙잡는 도구를 만들 것인가, 모두를 위한 연장을 만들 것이냐의 철학적 물음은 '자유'와 '평등' 못지않게 이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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