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자생적으로 뭉친 시민의 힘, 인천 배다리에서 본 것

새살 돋듯 변화하고 있는 곳... 오랜 저항의 결과라니

등록|2023.03.19 19:08 수정|2023.03.19 19:08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마을이 정겹다. 낮은 집이며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연출하는 분위기가 아늑하다. 배다리란 이름은 더 그렇다. 주교(舟橋)라거나 선교(船橋)라는 일제가 강요한 지명으로 창씨개명(?)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배다리배다리 헌책방 거리 중심을 이루는 삼거리. ⓒ 이영천


잘 지켜낸 이름에 모든 게 담겨있다. 곧고 질긴 생명력을 발산하는 공간 정체성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나라와 땅은 물론 모든 걸 앗기어도 혼과 얼만은 내어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정신과 신념이 엿보인다.

제물포에서 쫓겨난 조선인이 주안 갯골 남쪽에 정착했다. 지금의 화수, 송현, 송림동이다. 금곡, 창영동의 배다리도 그중 하나다.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바다 건너 인천으로 몰려온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제가 만들어낸 유랑민이다. 인구가 늘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옥이 산꼭대기까지 점령해 나간다. 수도국산을 빙 둘러싸고 생겨난 달동네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엇보다 반가운 건, 공간이 새살 돋듯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헌책방을 중심으로 술 빚던 양조장에서 문화가 주조되고 있으며, 오랜 여관 골목이 마을 카페와 정원 등 문화공간이 되었다. 예술가들이 찾아들어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다.
 

배다리 문화양조장창영학교 방향으로 나가는 길. 옛 양조장에서 이젠 문화가 주조되고 있다. ⓒ 이영천


이 모든 게 15년 고된 싸움이 바탕이었다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변화하는 공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염려스러우나, 비교적 동질성을 잘 지켜내고 있어 다행이다.

학교와 철도

교육과 의료를 앞세운 개신교 진입 루트가 인천이었다. 미국 감리회 소속 아펜젤러가 1885년 동인천에 내리교회를 설립한다. 이 교회 소속 존스 목사가 1892년 세운 자립예배당이 영화학당이다. 한국 최초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교' 탄생 배경이다. 1910년 배다리로 이전하면서 지은 문화재인 교사(校舍)는 2023년 현재 수리 중이다.
 

영화학당미 감리회 존스(한국명 조원시) 목사가 세운 영화학교. 태극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제국 시기 사진으로 추정. ⓒ 인천시청


배다리는 조선인이 자립 교육에 가장 먼저 눈뜬 곳이기도 하다. 1904년 객주이자 선박회사를 운영하던 정재홍이, 쇠뿔고개에 조선 아동만을 위한 교육기관 천기의숙을 설립한다. 1907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연 '창영학교' 전신이다. 인천 3.1운동이 창영학교 학생 주도로 이뤄진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얼과 정신을 지켜내려 싸운 배다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교사도 1922년 조선인 모금으로 지어졌다.
 

창영학교배다리 조선인의 모금으로 지은 교사. 인천 3.1운동의 근거지가 된데는 이유가 있다. ⓒ 이영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알렌이 갑신정변 후 제중원을 설립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90년 미국 관리가 되어 다시 조선에 온 알렌은 눈부신(?) 활약을 한다. 미국인 모스가 1895년 운산광산 채굴권과 이듬해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차지하는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후 미국공사관으로 수많은 조선 이권에 개입한다.

도원역 북측 산꼭대기 전망 좋은 곳에 알렌 별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재개발로 헐려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도원역 남동쪽 큰길가에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석이 있으나 정확히 이곳이 아니다. 1897년 기공식은 숭의동 동인천교회 삼거리 알렌 별장 인근에서 이뤄졌다.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도원역 인근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석.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숭의동 삼거리 알렌 별장 부근이다. 재개발로 철거가 이뤄진 사진 후면, 알렌 별장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이영천


초기 경인선은 지형 따라 구불구불했고, 알렌 별장 쪽으로 휘어진 쇠뿔고개엔 우각역이 있었다. 이 역은 1906년 일제에 의해 경인선이 직선화하면서 사라진다. 모스가 알렌을 어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성냥공장

도깨비불이었다. 머리에 붙은 작고 붉은 인(燐)을 상자 갑에 그으면 불이 일었다. 얼마나 신기했을까. 배다리에 성냥공장이 있었다. 일본인이 1917년 10월 '배다리 성냥 마을 박물관' 자리를 포함한 2천여 평에 세운 조선인촌(주)다. 공장에서 일한 450명 노동자 중 350명이 여성이었다.
 

배다리 성냥마을 박물관배다리에 있었던 2천여 평 넓이 조선인촌(주) 자리에 들어선 성냥박물관. 인천 노동운과 항일운동의 씨앗이 이곳에서 심어진다. ⓒ 이영천


당시 성냥 재료는 독극물 일종인 황린으로 발화점이 낮아 불이 잘 일지 않았다. 손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중독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1921년에서야 법으로 금지되어, 인화점이 높은 적린으로 바뀌게 된다.

노동 집약 산업인 성냥공장 노동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적린 1만 개를 붙여야 60전을 받았다. 하루 14시간 노동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여기에 일본인 관리자의 멸시와 차별도 심했다.

1932년 메이데이에 성냥공장에 격문이 나붙는다. 다음날 360여 명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일제는 회사를 폐쇄하고 3명을 잡아간다.
 

배다리 시장해방과 한국전쟁 후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든 때로 추정. 멀리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점령하고 있다. ⓒ 이영천_거리전시물촬영


그러나 9일 임금인상 50%와 일본인 감독 배척을 요구하며 다시 파업에 나선다. 일제는 인근 공업지대로 파업이 확산할까 두려워 강경 진압에 나선다. 배후 조종 명분으로 10여 명이 극심한 고초를 겪고 파업은 동력을 잃고 만다. 이 파업은 이후 인천 지역 노동운동과 항일운동 씨앗이 된다.

헌책방 거리

배다리에 헌책방이 생긴 건 해방 이후다. 자긍심과 얼을 바탕으로 형성된 교육기반이 헌책방 탄생 배경이다. 전쟁을 치르고 물자가 귀해지면서 헌책 수요가 급증한다. 집에 있던 헌책이 쏟아져 나온다. 폐허가 된 거리에 모여든 손수레와 노점상에서 이를 팔기 시작한다. 1950년대를 지나며 헌책방이 호황을 구가한다. 한때 40곳이 넘는 헌책방이 성황을 이뤘다.
 

배다리 헌책방 풍경한국전쟁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배다리 헌책방 거리 모습. 소녀들 모습이 해맑다. ⓒ 이영천_거리전시물촬영


배다리 헌책방 거리는 인천을 대표하는 배움터였다.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헌책방 거리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앞날을 가늠하는 지표였다. 학생들 덕분에 공간이 활기를 띠었고, 헌책방으로 인해 배다리가 달라졌다. 놀이터이자 만남의 장소였음은 물론 문화공간으로 인천 지식인의 산실이었다.

1970년대 이후 헌책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 빛바랜 책보다 잉크 냄새 물씬 풍기는 새 책을 선호하는 경향성이 강해진다. 시류에 밀려 하나둘 헌책방이 모습을 감춘다. 공간도 사라지는 헌책방과 함께 활기를 잃어갔다. 겨우 몇 곳만 남아 화려하던 옛 명성을 추억할 뿐이었다.
 

배다리 초입배다리 사거리에서 경인선 동측 배다리로 들어서는 초입.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헌책방 몇이 자리한다. ⓒ 이영천


헌책방 거리가 세간의 관심을 끈 건 아이러니하게 인기 드라마에 등장하면서부터다. 매체 영향으로 주말이면 젊은이가 몰려들기 시작한다. 공간에 활기가 돌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염려한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이곳을 먹잇감 삼지 않은 건 다행이다. 이들의 공격에 공간이 버텨낼 힘이 관건으로 보인다. 그러함에도 배다리는 이미 다른 싸움으로 든든하고 충분한 자생력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다.

저항과 자생적 재생

배다리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남다른 곳이다.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 살면서 두텁게 쌓아온 삶의 두께 때문이다. 어느 날 평온하던 마을에 풍파가 일어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을은 더 강한 결속력으로 뭉쳤고, 배다리에 더 강한 자긍심과 애착을 갖게 된다. 이렇듯 변화한 의식이 공간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산업도로 부지사진 한가운데 남북으로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공간이 산업도로 부지. 현재 2026년 준공 예정으로 지하차도 공사 중. 오른쪽이 창영학교와 영화학교. ⓒ 인천광역시_지도포털


2006년 인천시가 청라와 송도를 연결하는 산업도로를 개설하려 토지 보상에 착수한다. 도로는 평화롭던 마을을 둘로 갈라쳤다. 산업시설을 잇는 도로에 대형트럭은 물론 24시간 차량이 빈번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여기에 고속화도로였기에 소음과 먼지 등 배다리는 그야말로 처참히 짓뭉개질 위기였다.

시민들이 일어선다.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뜻있는 시민이 모여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을 결성한다. 시민은 물론 각계각층 인사와 지식인, 예술가들이 조직적인 저항에 나선다. 관청에 수동적이던 배다리 주민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삶의 터전이자 애환이 서린 곳을 지키려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저항 과정에서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진다. 공간도 순기능을 발휘한다. 공간을 지켜내려는 지루한 싸움에 시민은 단련되어간다. 문화와 역사, 자긍심과 얼이 서린 곳을 지키고 보호하며 어찌 가꿔나가야 하는지를 몸으로 체득한다. 드라마로 배다리가 알려지기 전부터, 이런 힘으로 공간은 차분히 변화하는 중이었다.
 

옛 여관골목배다리 문화공간 공간으로 탈바꿈한 옛 여관골목. ⓒ 이영천


15년 동안 이어진 싸움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다. 전면 무효화가 아닌 지하화로 합의된다. 과정에서 겪었을 우여곡절은 불문가지다. 도로용지로 마을 일부가 사라졌으나, 지하도로가 예정대로 2026년 완공된다면 제법 드넓은 빈 땅이 생겨났다. 배다리가 다시 태어날 자양분인 셈이다. 이 땅은 배다리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근 창영초등학교 이전 문제로 다시 한번 갈등이 일었으나, 이를 유보하면서 봉합되는 양상이다. 역시 이전에 반대하는 시민모임 힘이 컸다. 늘 그렇듯 자생적으로 뭉친 시민의 힘은 세고 위대하다. 그 힘으로 공간의 지속성은 더욱 강한 추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공간이 가진 역사와 문화, 정신과 삶의 터전으로서 가치가 활짝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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