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싱글맘'의 일상... 시간을 초월한 문학의 힘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
"아이를 업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닌 딸이 무거워 힘에 부쳤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겨우 펴고 일어서니 순간 눈앞이 핑 돌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빠가 해줘야 할 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빠 되기 연습이라는 다짐과 함께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주의하며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딸은 다시 꾸벅꾸벅 잠이 든 건지, 내 등이 뜨듯했다.
무겁고 예쁜 혹이었다." (57쪽, 쓰시마 유코 지음, 서지은 번역 <빛의 영역>(마르코폴로)
어쩌면 대부분의 엄마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아주 어릴 적의 아기는 예쁘지만 커갈수록 무거워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무려 40년도 전에 싱글맘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공시적인 곳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작품과도 같다.
▲ <빛의 영역> 도서표지 ⓒ 마르코폴로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이 겉면을 장식한 책을 처음 본 순간 이보다 더한 표지디자인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반가웠다. 실제 싱글맘이었던 쓰시마 유코가 자신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쓴 작품을 한국의 싱글맘인 서지은 작가가 번역한 일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한국에는 늦게 당도했지만 시간을 초월한 문학의 힘은 이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빛이 드는 집
어린 딸을 낳았지만 이혼을 결심한 후 새로운 집을 물색하던 중 사방에 빛이 들어오는 창이 달린 집을 얻은 것은 싱글맘에게 분명 행운이었을 것이다. 남향으로만 창이 있어도 고마울 대부분의 서민들 신세를 생각하면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은 계단이 가파른데다 무려 4층에 위치해 있어서 그 집을 들락날락하기위해서는 많은 수고로움을 필요로 한다. 이 수고로움을 넘기고 나면 아침의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지는 노을의 시간과 한밤중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까지 많은 전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빛의 영역은 어둠의 또다른 표현이다. 서지은 번역가가 다른 글에서 인용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일부로 존재한다'. 사방으로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라고 해서 24시간 빛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어둠이 지속되고 때로는 천둥이 치고 때로는 소음이 뒤덮을 것이다.
그렇기에 쓰시마 유코가 시선을 보내는 빛은 어둠과 함께 하고 고요함은 소음과 함께 한다. 이런 특성은 4층의 집에서 내려와 세상에 발을 딛었을 때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뼈아프게 다가온다. 일본과 한국의 가족문화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40년 전의 편부모 가족이 보내야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유코 본인이 1살 때 이미 내연녀와 삶을 스스로 끝내버린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로부터는 혜택보다는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그늘의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쓰시마 유코가 지극히 자전적인 작품을 남겼음에도 자신을 하소연하거나 변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인식하기도 전에 떠나버린 과거를 원망하지도 않고 이혼을 결심했지만 남편을 나쁜 놈으로만 묘사하지도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일본 특유의 사소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일기장에 머물지 않고 문학으로 넘어가는 지위를 획득한다.
기어코 빛의 영역으로 넘어간 작가
1장인 빛의 영역에서 12장인 빛의 입자까지 유코 작가는 외견상 이혼 과정을 담담히 서술하는 형태를 띠지만 세부적인 구성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존으로 상상 혹은 환상이 들어오고 여기에 꿈까지 들어온다. 삶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는가 혹은 환상을 지니는가 그리고 그런 현실과 상상은 잠이 들어서는 현재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채로 꿈에서 욕망과 공포와 바람으로 짬뽕이 되어 그려진다.
쓰시마 유코의 시선이 주목하는 방식과 더불어 빛과 어둠, 침묵과 소음은 이 꿈에 합세하여 싱글맘을 괴롭히기도 하고 들뜨게도 한다. 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수려하고 자연스럽게 무리스럽지 않게 풀어간다. 몇몇 부분에서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감동과 환희의 장면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이야 편부모 가족, 다문화 가족 더 나아가 동성 가족까지, 이제는 모범적인 가족의 형태가 어떤 것이라는 답안조차 없겠지만 여전히 현실적으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가족들에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렇기에 40년 전의 한 싱글맘이 자신에게 결여된(?) 혹은 결여되었다고 사회적으로 평판 내릴만한 것에 개의치 않고 일기체를 넘어 문학으로 승화한 것은 큰 울림을 준다.
이 점은 지금의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것이다. 과거에도 저렇게 살아온 작가가 있었는데, 라는 안도감을 넘어 지금에도 여전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시선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또한 국가와 조직은 시대에 따라 좌와 우, 온당함과 부당함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곤 하지만 휴머니티의 연대라는 점에서 문학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개인적인 삶이 결핍이 있다고 느끼던지 사회적으로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끼던지 개인은 고단함과 괴로움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 결핍의 자리에서 문학가와 예술가는 삶의 본질 혹은 일면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예술적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영역은 어둠을 소재로 하더라도 괴로운 경험을 이야기로 풀더라도 이 모든 것이 삶과 영혼의 진화를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인식할 수 있다면 전체적인 시선과 서사를 잃지 않을 것이다. 기어코 빛의 영역으로 나아갈 것이다.
빈곤한 시대의 시인은 풍족한 시대의 시인보다는 행복하다. 육신은 고단하나 영혼은 진화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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