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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직전 사직, 화 피했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42] '정의의 여신'이 광풍에서 그를 보호해 준 셈이랄까.?

등록|2023.04.01 18:19 수정|2023.04.01 18:19

▲ 민족일보 창간호 ⓒ 민족일보


민족일보사는 쑥대밭이 되었다.

조용수 사장을 비롯하여 주요 간부들이 끌려갔다. 김자동은 광풍의 낙뢰를 피할 수 있었다. 마산의거 1주년 행사와 대구·경북지역 취재를 마치고 3일 만에 귀사하니 편집국장이 바뀌는 등 인사이동이 있었다.

우선 양수정이라는 사람이 3월 18일자로 발령을 받아 신임 편집국장으로 와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진보진영 인사는 아니었다. 그가 근무하던 <자유신문>은 당시 어용지로 통했다. 나는 속으로 '뭐 저런 사람을 데려왔나' 싶었다. 한동안 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가 민족일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 여럿이서 등산을 하면서 어울리게 됐다. 그런데 막상 얘기를 나눠 보니까 상당히 정의감도 있고 사람도 좋아 보였다. 신문사에 있을 때 편견을 가지고 대했던 것 같았다.

양수정 국장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면이나 조직 내부에 대해 나는 큰 실망을 느꼈다. 결국 나는 5월 초순경 <민족일보>에 사표를 냈다. 내 나름의 꿈과 기대를 갖고 들어간 <민족일보>였지만 두 달여 만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 화를 면했다. (주석 3)

김자동 기자에게 조금만 정의감이 덜했더라면 쿠데타 세력의 <민족일보>에 대한 대대적인 광풍에 휩쓸렸을 것이다. 어용지 출신의 편집국장과 타협하지 않고 정들고 아끼던 신문사를 홀연히 떠난 것이다. '정의의 여신'이 광풍에서 그를 보호해 준 셈이랄까.

그는 신문사를 떠났지만 조용수 사장과 <민족일보>에는 남다른 애착과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뒷날 〈조용수 사장 명예회복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직접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여, 조용수 사장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백범 김구를 이승만 측근들이 암살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홀대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뒷날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조직한 것이나, 국방에 전념해야 할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진보언론인과 언론사를 말살하는 역사의 반동에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김자동은 뒷날 <민족주의자 조용수 사장>을 썼다. 글의 중후반부이다.

조용수가 혁신계와 손잡고 <민주신문>을 창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대략 두 가지 정도를 꼽는다. 하나는 유태하 추방운동 건이다. 당시 이승만의 심복 가운데 유태하라는 주일대표부 공사가 있었는데 지저분하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는 공사 시절 재일동포를 상대로 비자 장사 등 비리를 저지르다 재일교포들의 추방 대상이 됐다. 유태하는 4.19혁명 직후 직위해제됐으나 본국의 소환에 불응하다가 5.16 후에 소환돼 구속됐다.

당시 유태하 추방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신민부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청뢰 이강훈(건국훈장 독립장·광복회장 역임) 선생이었다.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청뢰는 백정기(白貞基) 의사와 함께 체포돼 일본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해방 후 출옥한 청뢰는 일본에서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냈다. 당시 민단 차장으로 활동하던 조용수는 청뢰를 도와 유태하 추방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또 하나는 죽산 조봉암 구명운동 건이다.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며, 조봉암을 처형한 것은 법을 빙자한 '사법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내 좌파 진영은 물론이요, 민단 내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죽산 구명운동이 일어났는데 조용수가 그 주동역할을 하였다.

이 일로 조용수는 민단 총본부에서 도치키현 부단장으로 좌천되었다. 죽산 구명운동 과정에서 조용수는 진보 성향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4.19혁명이 일어나자 '이젠 조국에 들어가서 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귀국하였다.

기본적으로 조용수 사장은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일보> 창간호 때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광야의 소리'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창간호에서는 함석헌 선생을 다루었는데 이후로도 진보진영 인사는 물론 신숙(申肅), 김학규(金學奎), 최근우, 김창숙, 장건상 등 항일투쟁가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모르긴 해도 이 코너는 조 사장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조 사장은 혼자 어렵게 사는 원로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갈 때는 항상 정종 댓병에 쌀 한 가마니를 갖고 가서 인사를 드렸다고 들었다. 아마 이강훈 선생 밑에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에도 눈을 뜨고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게 된 것 같다. 진보적인 사상은 둘째치고라도 민족의식이 뚜렷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주석 4)


주석
3> <회고록>, 377쪽.
4> <회고록>, 378~37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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