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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육식도 못 고친 빈혈... 비건 되니 문제?

등록|2023.04.03 14:12 수정|2023.05.18 15:13
비건으로서 선택권을 넓히고자 런던을 거쳐 베를린에 이사 와 살고 있습니다. 10년간 채식을 하며 일상에서 겪는 고충들과 동시에 더욱 풍부해진 비거니즘 문화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해외 거주 2년차에 접어들며 어떤 계기로 아주 오랜만에 피검사를 받게 됐다. 진료 일주일 후 병원에서는 검사 결과가 '비정상'이니 빠르게 내원하라는 연락을 해왔다.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적혀진 그래프들을 보니 기분상 뭔가 더 심각하게 보였는데 번역기를 돌려보니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게 나온 것이었다. 월경을 하는 여성이라면 대부분이 갖고 있는 빈혈이었다.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요가를 할 때조차도 몸이 저리곤 하는 저혈압까지 안고 있으니 뱀파이어가 꼬집기라도 하는 날엔 바로 사망이었다.

유년기 때부터 코피를 자주 흘리고 몸이 허약했기에 빈혈은 떨어질 날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축농증 수술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철분제를 처방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건 정작 내가 2011년부터 채식을 시작하면서였다.

빈혈이 채식 때문은 아닌데 
 

▲ 독일 산부인과에서도 흔히 처방되는 철분제 ⓒ 최미연


양육자들은 "몸도 약한데 곰국이라도 먹으면 안 되겠냐"라며 내게 타협할 지점들을 제안해왔다. 그러나 식성이라면 어디 빠지지 않는 애가 20년 가량 육식을 해왔음에도 빈혈이 고쳐지지 않은 것이라면 원인은 먹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해외에 나오기 전만 해도 운동과 균형 있는 식사 그리고 월경 중단을 위해 시술한 '임플라논' 덕분에 모처럼 혈압 수치 정상화에 도달한 때가 있었다. 어느새부턴가 몸에 골고루 붙은 잔근육들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어필하며 '채식만 해도 괜찮지?'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빈혈의 원인이 육식의 부재가 아님을 증명해보이고 싶은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균형 있는 삶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월경 출혈양이 적지 않아 임플라논을 이식했지만 재작년 코로나에 걸린 이후 몸의 호르몬 균형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많은 여성들처럼 백신 1, 2차 때마다 열흘 넘게 하혈을 했고 전염병에 걸린 이후로는 유방의 크기가 절반으로 줄기까지 했다. 1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월경이 다시 시작되었고 어떤 때는 2주 간격으로 한 달에 2번이나 출혈이 계속되었다.

지난 가을, 독일에서 산부인과를 처음 찾은 이후에야 계속되는 하혈과 온갖 월경증후군(복부팽만, 감정기복, 소화 장애 등)이 임플라논의 부작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2년간 팔에 심었던 호르몬제를 빼낼 수 밖에 없었고 이후 또 다른 부작용 기간을 거쳐 현재는 월경을 다시 한다.

빈혈이란 검사 결과지를 받아들었을 때 지난 몇 년간 노력해온 수많은 '증명'의 순간들이 좌절되는 거 같았다. 근 몇 달간 독일의 잿빛 겨울을 우울함으로 보내면서 그리고 재정이 넉넉치 않으면서 더 골고루 균형 있는 식사들을 스스로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해외 자취 생활의 지혜도 쌓인다 

30년 가까이를 양육자와 살았기에 해외에 나온 2년차에야 누구보다는 늦게 혹은 이르게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편의점 세대인 나는 이미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간편식에 익숙해져 있는데다 피자, 떡볶이, 햄버거 등 따로 조리가 필요치 않은 음식들을 손쉽게 주문하고 구매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외식보다 집에서 조리할 때 더 가성비 높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독일에서의 삶이 여전히 낯설다. 아직 출퇴근하는 직장이 없기에 매일의 끼니를 대부분 집에서 해결하다보니 어찌도 밥 먹일 시간은 이리 빨리 돌아오는지 성인 여성 1명을 양육하기가 이렇게 보통 일이 아님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의사는 철분제를 처방해주며 내게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 이미 많이 먹고 있는데 더 많이 먹어도 좋다는 '허용'을 받은 것이다.

룸메이트와 살고 있지만 함께 사용하는 냉장고의 크기가 작다 보니 보관을 오래 할 수 있는, 저렴한 감자, 양파 같은 채소들을 위주로 구매하게 된다. 이제 날이 따뜻해짐에 따라 계절 온도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다른 식단들과 생체 리듬이 필요할 것이다. 돈이 모이게 되면 이번에는 임플라논 대신 자궁 내에 삽입하는 미레나를 시술 받아보고자 한다.

봄의 시작과 함께 이 해외 자취 생활의 지혜도 심신의 균형도 새어나가지 않고 잘 누적되고 발효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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