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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가득했던 백마 카페촌, 왜 지켜내지 못했을까

더 이상 옛 추억과 낭만을 회상할 수 없는 백마역과 풍동 애니골

등록|2023.04.02 12:31 수정|2023.04.02 12:31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정발산 아래, 경의선이 아담한 기차역 하나를 떨궈 놓았다. 덜컹거리는 교외선 타고 신촌에서 한 시간 남짓, 논과 밭뿐인 벌판을 달리면 나타나는 역이었다. 백석과 마두에서 한 글자씩 따온 백마역. 낮고 길쭉한 역사(驛舍)를 갖고 있던 이 역에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천공원백마 카페촌의 한 부분을 이루던 옛 냉천마을이 흔적으로 남은 냉천공원과 마을 회관. ⓒ 이영천


역에서 나와 반 시간 남짓이면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앉은 마을이 나타났다. 정발산에 기댄 냉천마을과 설촌마을, 그 너머 언덕엔 밤가시마을이 자리했다. 청량리에서 한강 따라 대성리와 춘천으로 향했다면, 신촌에선 경의선 타고 백마역으로 향했다.

시작은 작은 우연이었다. '화사랑'이라는 술집도 카페도 아닌 곳이었다. 화사랑이 입소문 타고 알려지자, 비슷비슷한 술집과 카페들이 마을 빈 곳을 채워가며 카페촌이 만들어졌다.

사방 드넓은 논밭 가운데 덩그마니 놓인 백마 카페촌은 언제건 청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구 같은 이곳에선, 나날이 축제와 논쟁이 벌어졌다. 시와 문학으로 침을 튀겼고, 사회과학 세미나가 불꽃을 피웠다. 시화전이며 공연과 그림 전시가 무시로 열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목청껏 군부독재 타도를 외칠 수도, 흥건히 적신 막걸리로 질풍노도의 열기를 삭이기도 했다.
 

옛 백마역백마 카페촌의 추억이 물씬 풍기는 옛 백마역의 아련한 모습. ⓒ 고양시 네이버블로그(letsgoyang)


사랑과 낭만을 찾아 설렘으로 모여드는 청춘도 부지기수였다. 연인끼리, 혹은 삼삼오오 찾아드는 젊은이로 불야성을 이뤘다. 다니는 열차도 뜸해 철길 따라 걷는 데이트가 최고의 낭만이었다. 연인끼리 속삭이는 밀어에, 석양보다 더 붉은 사랑에 젖어 들었다.

내밀한 풍경도 있었다. 이른 저녁 열차가 끊어진다는 걸 이용하려는 음흉한 늑대들 공작에, 철길 따라 40분 남짓이면 버스 터미널이 있다는 걸 아는 여우들이 배시시 웃음 짓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요즘 홍대에 버금가는 핫플이었다.

백마 카페촌

가수 김광석이 한때 활동했던 '동물원'이 1993년 5-1집 음반에 '백마에서'라는 노래를 싣는다. 소박하면서도 감수성 풍부한 그들 음악처럼, 노래는 애잔하게 지나간 사랑을 추억한다.

무대는 백마역 인근, 인적 드문 어느 주점이다. 첫눈 내리는 겨울, 흔들거리는 교외선 타고 백마 작은 마을에 닿는 것으로 노래는 시작한다. 눈 덮인 논길을 걷고,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사랑을 추억한다. 그렇다. 카페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젠 머릿결에 첫눈처럼 하얀빛이 드리운 중년이 되어 옛사랑을 추억할 뿐이다.
 

백마역2006년 옛 자리에서 옮겨와 새로 지은 경의중앙선 백마역. ⓒ 이영천


홍대 인근에서 화실을 꾸리고 있던 서양화가가 있었다. 그가 경의선 타고 지나다 내린 곳이 백마역이다. 알 수 없는 뭔가에 이끌려 맹숭맹숭한 벌판만 보이는 곳으로, 1976년 자신의 화실을 옮겨온다. 화사랑 탄생 배경이다.

화사랑 주인장 김원갑씨를 중심으로 홍대와 중앙대 미대 출신들이 먼저 판을 펼친다. 이후 그의 화실에선 미술 세미나가 무시로 열리고 음악회와 전시회 장소로 변모해 간다.

1979년 '그림이 있는 사랑채'라는 화사랑으로 간판을 내걸어 카페로 변신한다. 객이 많아지자 주인장 누이가 같이 화사랑을 운영한다. 카페촌은 이처럼 우연의 연속으로 탄생하였다. 신촌에 김현식이 있었다면, 강산에와 김C 등 무명의 실력파들이 한 시절을 화사랑에서 보내기도 했다.

화사랑이 작은 성공(?)을 거둬 입소문이 날수록 공간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썩은 사과'나 '고장 난 시계' 같은 독특한 간판을 내건 카페와 수십 개 주점이 자리다툼 한다.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기 전까지 신촌역을 떠나온 경의선은 수많은 젊은이를 백마역에 흩뿌려 놓았다. 당시 젊은이에게 카페촌은 낭만과 사랑, 열정을 내뿜고 변혁을 꿈꾸는 플랫폼 같은 곳이었다.
 

변모하는 애니골백마 카페촌 시즌2를 상기시키는 벽화와, 맞은 편 짓고 있는 빌라가 대조를 이룬다. ⓒ 이영천


카페촌이 사라진 건 일순간이다. 1980년대 말 불어닥친 주택난으로 맹숭맹숭하던 벌판에 일순 신도시가 들어서면서다. 개발 등살에 떠밀려 백마 카페촌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린다. 많은 주점과 카페가 홍대 부근으로 옮겨가고, 부득이 카페 몇이 둥지를 옮겨간 곳이 풍동 '애니골'이다.

풍동 애니골

냉천과 설촌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신도시 경계를 벗어난 풍동 옛 이름이 '애현'이다. 이를 애현골이라 부르다 '애니골'이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애니골 입구풍동 애니골 입구에 선 조형물. ⓒ 이영천


신도시 개발을 피해 옮겨온 화사랑 등 카페 몇과 유명 DJ이던 이종환의 '쉘부르' 등이 자리하면서 백마 카페촌 2막이 애니골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선 1970~1980년대와는 다른 카페문화가 펼쳐진다. 젊은이 위주의 치열하고 열띤 토론이나 전시회 등은 사라지고, 감성 충만한 낭만과 서정이 공간을 채워간다. 은은한 불빛에 통기타 소리가 한껏 완숙한 낭만을 가져다주었다.

작은 개울에 지형 따라 난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는 나뭇가지처럼 작은 골목을 뻗치고 있었다. 곳곳에 맞춤한 숲이 있었고, 한가운데 자리 잡은 YMCA를 중심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은 골목 구석구석에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와 특색있는 음식점이 숨어 있었다. 이들로 인해 공간은 격을 한껏 높이고 있었다.
 

새로 난 도로애니골을 반으로 가르며 새로 난 도로. 잘린 YMCA가 좌측에 보인다. ⓒ 이영천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정착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1999년 애니골 동쪽 풍동에 대규모 택지개발(풍동지구)이 예고되어, 2천년대 초반 개발이 시작된다. 하늘마을(일산2지구)도 애니골을 사이에 두고 풍동지구와 경쟁적으로 개발이 이뤄진다. YMCA를 가르며 도로가 개설되고 2009년 경의선에 '풍산역'이 문을 연다.

주변에 들어선 아파트 숲에 애니골은 섬처럼 갇히고 만다. 새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 땅값은, 애니골을 감성 충만한 공간으로 남겨둘 이유가 별로 없었다. 곳곳에 대형 음식점이 자리한다. 개울 건너편은 빌라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변화하는 지대(地代)는 애니골이 갖고 있던 문화를 지워내기에 차고도 넘쳤다. 은은한 통기타 소리 울려 퍼지던 카페는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각종 음식점과 그저 그런 상업시설이 줄지어 밀려든다.
 

화사랑2020년 고양시가 인수해 리모델링한 모습. 옛 추억과 낭만을 되살리려는 취지이나 힘에 부치는 것도 현실임. ⓒ 이영천


화사랑 초대 주인장과 아들, 누이와 동생까지 나서 애니골과 화사랑을 지켜내려 무진 애를 쓴다. 하지만 백마 카페촌의 상징으로 남고자 했던 열망마저, 악령처럼 덮쳐오는 경영난을 피할 순 없었다.

문 닫은 화사랑을 2020년 고양시가 인수해 복원한다. 도시 재생사업의 하나로, 이를 통해 1980~1990년대 감성 그득한 경의선의 추억과 낭만을 되살리려는 의도였다. 다행이랄까. 이런 노력으로 그나마 화사랑이 애니골을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낯선 공간

옛 백마 카페촌에서 시와 사랑, 문학과 예술을 다투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 중추다. 아니 조금 지나면 은퇴할 나이다. 하지만 당시 젊은이였던 그들은, 동물원 노래처럼 다시 이곳을 찾아 찬란했던 젊음을 추억하지 않는다. 사랑과 낭만, 문학과 예술을 공간이 더는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애니골그나마 옛 정취를 갖고 있는 애니골 입구. 화사랑과 쉘브르 간판이 보임. ⓒ 이영천


옛사랑과 낭만을 추억할 어느 무엇도 없는 곳에, 기억을 더듬어 맛집을 찾는 7080이 거리를 채울 뿐이다. 맛있는 음식이 혀를 잘 다스려 주는진 모르겠으되, 가슴 시린 낭만과 멋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더불어 신세대 발길도 뜸하다. MZ세대가 추구하는 이상과 갈증을 풀어 내줄 그 무엇도 공간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의선 백마역은 출퇴근 인파로 북적인다. 철길 따라 난 길은 산책길로 변하였다. 나무숲으로 변한 보행로는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 논길은 사라지고 낭만을 찾아 이곳 백마역에 내리는 사람도 없다.
 

경의선 길옛 논길이었을 곳이 철길과 도로 사이 산책로로 바뀌었다. ⓒ 이영천


애니골을 낭만 가득한 카페촌으로 인지하는 사람도 이젠 드물다. 이름난 맛집 몇이 자리한, 그저 그런 공간으로 알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곳곳을 상업화한 대형 음식점과 빌라들이 지금도 채워가고 있다. 개발이 가져온 부(負)의 외부효과다.

공간도 철저히 수요와 공급에 따른다. 따라서 공간을 갈라친 도로를 통해 그저 그런 상업시설 침투는 계속될 것이다. 자본주의 원리가 매개하는 바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어딘지 모를 허전함마저 지워낼 수 없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한 공간을 매력 넘치는 곳으로 지키고 가꿔가는 건 이처럼 지난(至難)한 일이다. 공간이 창출해내는 수요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요를 매개하는 요소는 그게 추억과 낭만일 수도, 문화와 예술일 수도, 혹은 사랑과 열정일 수도 있다.

백마 카페촌에 쌓였던 사랑과 낭만이, 풍동 애니골에선 작은 흔적만 남기고 왜 지워져 버렸을까. 당시의 젊은이들이 열정으로 만들어낸 공간을 우린 왜 지켜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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