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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유배지 지리산 새우섬, 지도에 없는 이유

[지리산둘레길 4코스]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에서 휴천면 동강마을까지

등록|2023.04.08 11:43 수정|2023.04.08 11:43
4월 초순 따뜻한 바람결이 지리산둘레길 4코스의 줄기인 엄천강을 따라 흐른다.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에서 휴천면 동강마을까지 12.8km(11km)의 둘레길 구간 4시간 걷기 여정은 숲속의 향기와 강물의 시원한 에너지가 봄날의 설레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인다.
 

▲ 칠선계곡 입구의 의중마을에서 조망한 지리산 천왕봉 ⓒ 이완우


엄천강을 따라가는 조화로운 절경의 둘레길

금계마을에서 의중마을까지는 0.7km 거리이다.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가 있는 금계마을에서 임천의 의탄교를 건너면 지리산 천왕봉으로 칠선계곡이 열려 있다. 둘레길을 출발하는 칠선계곡 들머리에는 고려시대부터 의탄소가 있어서 숯을 구워서 공납했다.

둘레길이 산길로 올라서면 곧 의중마을에 닿는다. 의중마을은 옻나무에서 옻(칠漆)을 많이 생산했었다. '칠흑같이 검다'는 관용어의 옻칠을 생각하며 마을 당산에서 둘레길 4구간의 인증 스탬프를 찍는다. 칠선계곡의 열린 공간으로 지리산 천왕봉과 제석봉이 잘 보인다.
 

▲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인 벽송사 ⓒ 이완우


의중마을에서 모전마을(용유담)까지는 의중마을 당산의 갈림길에서 모전마을(용유담)로 바로 가는 길(3.1km)과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거쳐 가는 길(4.9km)을 선택한다.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암자이다. 천연의 암석들 사이에 규모 큰 암자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때 벽송 지엄 선사가 창건했다. 서산대사가 이 사찰의 제3대 조사이며 사명대사가 수도한 곳으로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고 한다. 한국전쟁 시기에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이 이 벽송사를 야전병원으로 이용하였다. 전쟁 중에 이 사찰이 소실되었고 이후에 재건되었다.

의중마을에서 모전마을(용유담)로 바로 가는 산길은 임천을 왼쪽으로 두고 산기슭의 숲길을 걷는다. 멀리 삼봉산 방향으로 오도재가 보인다. 의중마을과 용유담 사이의 산길은 이끼 낀 바위가 미끄러운 곳이 많다. 모전마을에 이르는 숲과 계곡의 내리막길은 험한 편이다.
 

▲ 지리산의 절경 엄천강 용유담 ⓒ 이완우


모전마을에 이르면 용유담과 용유교의 절경을 보며 힘든 산길의 수고로움을 잊는다. 엄천강 용유담의 비현실적인 자연 절경에 감탄한다. 모전마을에서 세동(송전)마을 방향으로 강을 따라 용유담의 전설과 함께하는 둘레길 전설탐방로가 시작된다. 강가를 따라 놓인 나무 데크길은 시원한 물결 소리를 운치 있게 들려준다.

모전마을(용유담)에서 송전마을까지는 2.4km 거리이다. 지리산 자락 산촌 휴양 마을인 송전마을(세동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도로 옆 담장 벽화에는 수달이 한가롭고 지리산 반달곰이 늠름하여 눈길을 끈다. 둘레길은 강물을 따라 신작로처럼 천천히 이어진다.

엄천강 건너편 도로변에 백연마을이 보인다. 백연마을은 형제투금설화(兄弟投金說話)가 전해온다. 고려 시대에 선비인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을 두 덩이 주워서 나누어 가졌다가 강물에 황금덩이를 던져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재물보다 형제의 우애가 소중하다는 교훈으로 시대를 초월한다.
 

▲ 엄천강과 조화를 이룬 산등성이와 다랑논 ⓒ 이완우


송전마을에서 운서마을까지는 3.3km 거리이다. 운서마을로 향하는 둘레길은 오르막을 향한다. 새우섬이 있었던 강줄기와 강변이 풍경화처럼 보인다. 조선시대 세종의 왕자인 한남군(漢南君)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이곳에 유배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새우섬이 있던 지형 가까이에 이 왕자의 이름을 간직한 한남마을이 있다.

새우섬은 강물이 크게 에스(S) 자 모양으로 휘감아 흐르면서 두 줄기로 갈라져 중앙에 하중도(河中島)가 등 굽은 작은 새우처럼 있었다. 큰 홍수로 산어귀 쪽 물줄기가 메워져 바깥쪽 한 줄기로 흐르면서 섬이 지워졌다. 끊어진 산자락처럼 보이는 강변에 호박돌이 널려있는 곳이 옛날 작은 섬이 있던 위치이다.
 

▲ 강변 마을을 평화롭게 연결하는 추억 같은 신작로 ⓒ 이완우


운서마을에서 구시락재를 넘어 동강마을까지는 1.5km 거리이다. 운서마을을 지나 산등성이와 다랑논을 바라보며 구시락재를 넘는다. 구시락재에 이어진 산자락에서 9월 중순에 지리산의 송이가 나온다고 한다. 구시락재를 타고 산에 오른 약초꾼들의 오래전 호랑이 목격담은 실감 나게 전승된다.

지리산둘레길 4코스의 종점이며 5코스의 시점인 동강마을에 도착하였다. 당산 숲 쉼터 건물에 물레방아 형상의 장식이 눈에 띈다. 청(淸)나라에 다녀오며 물레방아를 견문한 연암 박지원이 1792년 안의(함양군 안의면)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수량이 풍부한 남덕유산 줄기의 용추계곡에 물레방아를 최초로 설치하였다.

형제 우애 설화와 새우섬의 애달픈 역사

백연마을과 한남마을의 중간 지점의 엄천강에 새우섬이 있었다. 금덩어리를 강물에 버린 우애로운 고려 시대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의 이야기가 이 마을에 전해온다. 이들은 다섯 형제로 이름이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과 조년(兆年)이다.

넷째와 다섯째 형제가 형제투금설화의 주인공이다. 첫째와 넷째 형제가 지리산에 은거하여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넷째 이억년의 무덤이 휴천면 문정리 마을 뒷산에 있다. 지금의 지명인 백연(白蓮)마을은 첫째의 이름을 딴 백년(百年)마을에서 변해온 지명이다.
 

▲ 백연마을과 한남마을 사이 강변의 와룡대 ⓒ 이완우


형제투금설화는 고려 시대 공민왕 때의 설화로 <고려사> 열전에 전하지만, 이들 형제는 충렬왕 때에 주로 활동하였고 <고려사절요> 등에는 그 연대가 충렬왕 20년(1294년)으로 나온다. 형제투금설화는 유사한 변이형 이야기가 여러 나라에 전승된다. 누군가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 황금 두 덩이를 선비 형제가 길에서 주어 선뜻 나눠 가진 이야기 설정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고려 말기는 원나라 황실을 배경으로 권문세족과 무신정권의 실세들은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점유하였고 백성들은 유민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의롭지 않은 부당한 이권을 탐하지 않으며 우애가 깊었던 선비 형제의 이야기가 백성들에 의해 형제투금설화로 각색된 것은 아닐까?

이들 형제는 권력층에게 부조리한 현실을 지적하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이 시조 다정가(多情歌)에서 아름다운 자연 예찬만이 아니라 시대 현실과 곤궁한 백성에 대한 지식인 선비의 고뇌를 찾아 감상해 본다.
 

▲ 왕자가 유배되어 머물렀던 새우섬의 흔적 ⓒ 이완우


한남마을 가까운 엄천강에 있었던 새우섬은 세종의 왕자 한남군 이어(李於, 1429~1459)가 유배된 곳이다.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소생의 왕자이다. 혜빈 양씨는 손자뻘인 단종의 유모였고, 단종이 왕위에 있을 때 보필하며 내명부의 중심이 되었다.

계유정난(1453)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단종은 폐위(1455)되었다. 단종 복위운동(1456년)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이에 연루됐던 혜빈 양씨는 청양으로 유배된다. 왕자 한남군은 금산과 아산을 거쳐서 이곳 함양 엄천강의 새우섬에 유배되어 고립된다.

혜빈 양씨는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한남군은 불의한 세상에 절망하며 가슴에 한을 안고 병을 얻어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새우섬 건너편 한남마을 지명에 왕자의 군호(君號)가 살아 있고 함양읍 교산리에 그의 묘가 있다.

후대의 선비들이 새우섬에 누대를 지어 한오대(漢鰲臺)라 하였으나, 1936년 병자년의 대홍수로 새우섬이 떠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강바닥이 되어 호박돌과 자갈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물레방아 형상의 동강마을 당산 숲 쉼터 ⓒ 이완우


엄천강 용유담의 수려한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백연마을과 새우섬의 역사와 이야기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지리산 엄천강을 따라 강변 이웃 마을의 천연색 경치는 새록새록 짙어지고 있다. 백연마을 형제들 이야기와 새우섬을 기억하는 애달픈 왕자의 역사는 새롭게 살아나서 지리산둘레길 4코스 걷는 여정에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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