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하면 단연 세종대왕을 꼽는다. 한글 창제는 가장 뛰어난 치적이지만, 외에도 정치, 사회, 경제 등에서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눈부신 업적을 이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한글의 문자적 가치를 세계적 석학들의 말을 통해 강조해 보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한글은 값지고 귀하다기보다는 소박하고 수수한 글자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김을 받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고위 관료들이나 위정자들에 의해 제1 언어로서의 자리를 위협받기도 한다. 또 소박하고 수수함이 강조되며 '고급스러움'의 자리는 다른 언어에 내어주는 일이 다반사다.
15년을 국어 교사로 밥 벌어먹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 이유로 역사의 어느 임금보다 세종대왕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각별하고 애틋하다.
따스한 봄날 뽀얀 속살을 내민 한 송이의 꽃이 사람의 마음을 쿵! 울린다면, 무리 지어 핀 꽃은 마구 흔든다. 왠지 나서야 할 것 같아 꽃무리도 보고 세종의 자취도 볼 겸 찾은 곳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이다.
내게 특별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 잠들어 있는 곳. 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는 봄꽃에 흔들린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하다.
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중 세종 임금과 소헌왕후의 합장릉(英陵)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효종과 인선왕후의 묘(寧陵)가 있다. 세종대왕의 능은 헌릉(태종의 능) 서쪽 산줄기에 있었으나 1469년에 현재의 위치(경기도 여주시)로 옮겨졌다고 한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이후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고 하니, 탁 트인 시야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능자리의 기운이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이 한쪽에 자리한다.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 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소박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문화관을 나와 세종대왕 때의 과학 기구 복제품 등이 전시된 곳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관람하면 30~40분 정도 소요되고, 효종의 영릉까지 관람하려면 관람 구역 내의 두 영릉 사이에 약 700m 길이의 숲길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에 <세종실록> 1444년의 일기에 적힌 글귀가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시대에 중국의 역법과 과학 기구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종은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과학 기구를 발명하는 데 힘쓴다.
'혼천의' 등 천문관측기구, 해시계 '앙부일구'와 '자격루',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완성하고 농사법을 개선할 수 있도록 <농사직설>을 제작 배포한다. 이런 업적의 바탕에는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애민 정신이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고 먹는 것이 하늘이었던 과거, 세종대왕은 백성에게 하늘인 먹거리를 위해 고심했고 다양하고 세세한 분야에서 백성을 위한 위정자의 역할을 넘치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한 결과로 현재의 농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 같다.
국토의 보존 사례도 소개된다. "대왕께서 이르시기를 '진심으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식을 요구하는 대로 해 주어라'라고 하셨으니, 은혜를 배반하고 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이 세종의 뜻을 대마도주에게 전하는 장면과 함께 소개된 글이다.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본거지로 한 왜구들이 자주 남해안 일대를 침범하자 1419년 이종무 등 1만 7천여 군사를 보내어 섬을 정벌하고 대마도주로부터 조공을 받고 경상도 계림부(지금의 경주)로 편입하였다, 고 전한다.
세종대왕의 치적을 보면 현재의 우리가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독도와 관련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태도,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 등은 국민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세종대왕의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도 닮아 있는 것 같다. 세종대왕의 행한 모든 업적은 국민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중심에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바로 헌법의 정신과 상통한다.
역사문화관을 나서면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나오는 세종대왕릉의 재실은 아쉽게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멸실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재실은 복원이라기 보다는 규모와 건축양식이 다른 신축에 가깝다고 한다. 이웃한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니 비교하며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왕의 묘역답게 영릉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세종대왕릉이다. 능역도 크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더불어 세종대에 발명한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전시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왕릉 또한 능침 앞까지 올라가서 자세히 관람할 수도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세종대왕릉 오른쪽 능선을 따라 봄꽃인 진달래가 무리지어 소나무와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또 4월 8일은 세종대왕의 기일로 매년 기신제를 거행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4월이 코앞이지만 진달래 무리는 만날 수 없었다.
영릉(英陵)을 걸으며 세종대왕과 함께 소환되는 인물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등. 그들의 구국의 결단과 애끓는 고뇌가 새삼 경외스러운 시간이다. 과거의 고난과 영광은 반드시 필요한 용기를 내고 힘든 선택을 했던 위인들의 희생 덕분이었음을 생각한다. 이 봄, 그들의 자취가 더욱 절실해지며 분별 없이 흔들렸던 마음이 송구하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한글의 문자적 가치를 세계적 석학들의 말을 통해 강조해 보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한글은 값지고 귀하다기보다는 소박하고 수수한 글자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15년을 국어 교사로 밥 벌어먹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 이유로 역사의 어느 임금보다 세종대왕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각별하고 애틋하다.
따스한 봄날 뽀얀 속살을 내민 한 송이의 꽃이 사람의 마음을 쿵! 울린다면, 무리 지어 핀 꽃은 마구 흔든다. 왠지 나서야 할 것 같아 꽃무리도 보고 세종의 자취도 볼 겸 찾은 곳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이다.
내게 특별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 잠들어 있는 곳. 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는 봄꽃에 흔들린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하다.
▲ 영릉 전경 탁 트인 시야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능자리의 기운이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 장순심
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중 세종 임금과 소헌왕후의 합장릉(英陵)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효종과 인선왕후의 묘(寧陵)가 있다. 세종대왕의 능은 헌릉(태종의 능) 서쪽 산줄기에 있었으나 1469년에 현재의 위치(경기도 여주시)로 옮겨졌다고 한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이후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고 하니, 탁 트인 시야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능자리의 기운이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이 한쪽에 자리한다.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 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소박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문화관을 나와 세종대왕 때의 과학 기구 복제품 등이 전시된 곳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관람하면 30~40분 정도 소요되고, 효종의 영릉까지 관람하려면 관람 구역 내의 두 영릉 사이에 약 700m 길이의 숲길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내부"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 장순심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에 <세종실록> 1444년의 일기에 적힌 글귀가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시대에 중국의 역법과 과학 기구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종은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과학 기구를 발명하는 데 힘쓴다.
'혼천의' 등 천문관측기구, 해시계 '앙부일구'와 '자격루',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완성하고 농사법을 개선할 수 있도록 <농사직설>을 제작 배포한다. 이런 업적의 바탕에는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애민 정신이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고 먹는 것이 하늘이었던 과거, 세종대왕은 백성에게 하늘인 먹거리를 위해 고심했고 다양하고 세세한 분야에서 백성을 위한 위정자의 역할을 넘치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한 결과로 현재의 농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 같다.
국토의 보존 사례도 소개된다. "대왕께서 이르시기를 '진심으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식을 요구하는 대로 해 주어라'라고 하셨으니, 은혜를 배반하고 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이 세종의 뜻을 대마도주에게 전하는 장면과 함께 소개된 글이다.
▲ 대마도 정벌세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이 세종의 뜻을 대마도주에게 전하는 장면 그림 ⓒ 장순심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본거지로 한 왜구들이 자주 남해안 일대를 침범하자 1419년 이종무 등 1만 7천여 군사를 보내어 섬을 정벌하고 대마도주로부터 조공을 받고 경상도 계림부(지금의 경주)로 편입하였다, 고 전한다.
세종대왕의 치적을 보면 현재의 우리가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독도와 관련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태도,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 등은 국민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세종대왕의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도 닮아 있는 것 같다. 세종대왕의 행한 모든 업적은 국민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중심에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바로 헌법의 정신과 상통한다.
▲ 효종대왕릉 재실 전경이웃한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니 비교하며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 ⓒ 장순심
역사문화관을 나서면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나오는 세종대왕릉의 재실은 아쉽게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멸실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재실은 복원이라기 보다는 규모와 건축양식이 다른 신축에 가깝다고 한다. 이웃한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니 비교하며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왕의 묘역답게 영릉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세종대왕릉이다. 능역도 크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더불어 세종대에 발명한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전시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왕릉 또한 능침 앞까지 올라가서 자세히 관람할 수도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세종대왕릉 오른쪽 능선을 따라 봄꽃인 진달래가 무리지어 소나무와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또 4월 8일은 세종대왕의 기일로 매년 기신제를 거행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4월이 코앞이지만 진달래 무리는 만날 수 없었다.
영릉(英陵)을 걸으며 세종대왕과 함께 소환되는 인물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등. 그들의 구국의 결단과 애끓는 고뇌가 새삼 경외스러운 시간이다. 과거의 고난과 영광은 반드시 필요한 용기를 내고 힘든 선택을 했던 위인들의 희생 덕분이었음을 생각한다. 이 봄, 그들의 자취가 더욱 절실해지며 분별 없이 흔들렸던 마음이 송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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