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전 악쓰고 때리던 아이... 그속에 숨겨진 아픔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2] 딸 둘 입양하고 아들 하나 더 입양 진행 중인 이경아씨 부부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 1 첫 글은 2014년 12월에 썼다. 8개월 연재하고 멈췄다. 만으로 8년이 지났다. 그사이 입양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다시 들고 취재와 인터뷰를 시작했다.[기자말]
2016년, 부부가 인천에서 2시간 걸려 찾아간 보육원은 펜션처럼 생긴 가정형 시설이었다. 한 집에 10명 가까운 여자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중학생 초등학생 그리고 다섯 살과 네 살 아이들이 각각 둘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고 힘없는 아이가 있었다.
동갑인 이경아씨와 서원택씨는 7년 연애 끝에 스물아홉살이었던 2003년 결혼했다. 두 사람을 지난 2월 10일 만나 인터뷰했다. 부부는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걸 병원에서 알았다고 한다.
간절하게 아이를 원했지만
▲ 이경아(49) 서원택(49) 부부 20여년 전 사진 ⓒ 이경아씨
남편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같은 증상이어도 가까운 친척 하나는 7년 만에 득남했다. 그 사실이 어쩌면 막연한 위로와 희망이 됐는지 모른다. 모태신앙인 둘은 아이가 찾아와 주기를 기도하며 살았다. 몇 년이 지나도 기쁜 소식은 없었다. 포기라는 말이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경아씨 부부에게 아이와 연관된 어떤 일상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
"유아세례를 받기 위해 목사님 앞에 예쁘게 차려입고 젖먹이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젊은 부부를 볼 때면 눈물 한 방울이 갑자기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속도로 뚝 하고 떨어져요. 다른 사람한테 당연한 일들이 저한테는 당연하지가 않은 그런 거에 대해 약간 화도 나고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교회 친한 사람들도 누가 임신했다는 말은 그녀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 닦을 수가 없어요. 옆에 앉은 남편이나 우리 엄마가 눈치챌까 봐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그런데 그게 괴로워서 제가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애가 있든 없든 저런 장면을 되게 담담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요. 그게 어느새 응답이 되더군요. 그 뒤로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임신에 대한 희망을 꺾고 편안해진 일상이 흐르던 어느 날, 사회복지사인 사촌 언니의 소개로 입양기관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임신은 포기했지만 아이에 대한 미련까지 버려진 건 아니었다.
이경아씨가 앞장서서 남편을 이끌고 받은 교육이었다. 남편은 적극적으로 입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직 없었다. 남편의 그런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는 의외로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텔레비전에 한 출연자가 아이와 함께 노는 모습을 보고, '내게도 저런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경아씨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말 진짜야?"
남편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진짜 그러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아이에 대한 마음을 감추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마침 교회 고등부 교사를 함께 했던 동료 친구가 보육원 원장이었다.
2016년, 4살 지우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녀 나이 마흔셋이었다.
보육원 원장은 자신이 비록 아동양육시설을 운영하는 입장이지만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한다는 가치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육원 아이 중에 친권이 없는 아동은 어떻게든 입양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였다.
아이들 수에 따라 지자체의 재정 지원규모가 달라지는 보육원 운영구조 상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우가 있던 보육원 원장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분이었다.
경아씨는 남편과 함께 매주 지우를 보기 위해 왕복 4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다. 허락된 한 시간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거리에서 보낸 4시간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 가운데 즈음에 지우와의 외박이 허락됐다. 처음에 1박 2일이 나중에 2박 3일로 그러다가 일주일이 허락될 때도 있었다. 함께 살을 부비고 지내다 시설에 내려 놓고 돌아설 때는 눈물이 쏟아졌다.
1년여 가정 체험은 시설이 온 세상이었던 지우에게, 아이가 주는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 경아씨 부부에게 서로가 모르는 세상을 건너는 다리였다.
하지만 다리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지우나 경아씨 부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제는 서로의 가슴에 깊은 사랑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버거울 만큼 설레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벌어진 일
문제가 터진 건 지우를 장기가정체험으로 집에서 오래 데리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지우가 집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갑자기 경아씨를 세게 때렸다. 처음에 심한 장난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 폭력의 강도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눈물이 날만큼 아팠다. 몸엔 멍이 들고 혈관이 터졌다. 상처를 본 남편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했다. 아이는 분명 여기 와서 행복한 게 분명한데 이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우는 잘 놀다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행복이 짙어질수록 폭행도 강해졌다. 4년을 시설에 뒀다가 이제와서 저를 찾은 엄마아빠에 대한 원망 같기도 했다. 사회복지사인 사촌 언니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양가감정이라고 했다. '지금 너무 행복한데 왜 나를 시설에 버렸느냐'는 항의라고 했다. 행복한만큼 화가 나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이 경아씨에게는 더 큰 아픔이었다. 이 어린 아이 마음에 그렇게 큰 화가 숨어 있을 줄 상상조차 못 했다.
지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 숨겨졌던 아픔과 슬픔이 모두 쏟아져 나와야 했다. 지우는 새벽 4시에도 일어나 악을 쓰고 울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저를 껴안은 엄마를 저리 가라 소리를 질렀다. 가면 또 가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귀신들린 아이처럼 울었다.
그런 날엔 남편과 함께 몸부림 치는 아이를 껴안아 차에 태우고 정처없는 길을 달렸다. 지우는 운전하는 아빠를 때리고 말리는 경아씨를 또 때리면서 울었다. 아직 입양이 끝나지 않은 가정체험 기간이었다.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냐는 질문에 경아씨는 대답했다.
"처음 본 그날부터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다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 했어요. 나는 이미 제 엄마인데 엄마는 그러면 안되잖아요. 오히려 저는 아이가 그럴 수록 마음이 너무 아프기만 했어요. 이제 10킬로그램 조금 넘는 아이 속에 어떻게 저런 화나 아픔이 들어 있을 수 있는지 속상해서 미치겠는 거죠."
아이를 만나고 흑백 세상이, 컬러로 바뀌었다
▲ 인터뷰를 마치고 ⓒ 김지영
그러는 중에도 입양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례적일만큼 입양재판도 빨리 끝났다. 판사는 잔뜩 긴장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는 덕담으로 재판 결과를 암시했다. 입양이 완료됐다. 2017년 지우가 다섯 살, 그녀는 마흔 넷이었다.
입양으로 자식이 됐어도 한동안 지우의 폭행은 멈춰지지 않았다. 언니는 하소연을 듣더니 지우가 최선을 다해 가정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또 최선을 다하는 지우가 불쌍해서 울었다. 그렇게 죽을만큼 힘든 시간도 견디고 버티니 끝이 보였다.
지우의 화가 완전히 풀린 건 여섯 살 때로 기억한다. 폭행의 강도가 다섯 살이 지나면서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시설에 살 때 가장 약한 아이였던 지우의 잠꼬대는 '하지마, 하지마'였다. 그게 또 엄마가 된 경아씨의 가슴을 헤집었다.
시설에 살았던 기간만큼의 시간을 견뎌야 아이가 시설에서 가져온 모든 '시설병'이 나을거라는 속설이 있다. 격렬했던 증상 때문인지 지우는 그 시간을 앞당겼다. 제 물건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지만 경아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증상은 여섯 살이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가 와서 주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었다. 지우는 경아씨 부부의 일상뿐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단조로운 흑백 세상을 경이로운 컬러로 바꿨다.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다. 지우만 허락한다면 아이 하나를 더 키우고 싶었다.
지우도 동생을 원했다. 무서운 성격의 친정엄마도 지우한테는 꼼짝을 못 했는데 둘째를 입양한다는 말은 더 반겼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한 명이라도 더 해야 한다는 말을 붙이면서까지 좋아했다.
새로운 만남과 인연
지우보다 두 살 아래인 예주와의 만남도 지우가 살았던 시설에서였다. 한 해 전 장기가정체험을 갔다 돌아온 상처를 안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그 가정에서 받은 상처는 새로운 가정에서 회복시켜야 온당했다.
예주 얼굴을 보기 전에 사연을 먼저 듣는 자리에서 경아씨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작고 초라한 모습의 예주를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도 경아씨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지우의 전철을 따라 가정체험을 거쳐 입양재판을 받고 예주는 순조롭게 경아씨 둘째 딸이 됐다. 예주 나이 네 살이었다.
예주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였다. 지우가 울고 떼쓰고 때리는 걸로 제 속의 화를 풀었다면 예주는 오직 울음으로 제 속을 달랬다. 한 번 울면 오래 울었다. 엄마아빠가 달래다 지칠 때까지 울었다.
언니가 살짝만 건드려도 울고, 자다 깨서 울었다. 밥을 먹다가 울고, 이빨에 뭐가 꼈다고 울었다. 단추가 안 잠겨서 울고 양말이 안 올라가서 울었다. 예주는 한 번 울면 그치는 법을 못 배운 아이처럼 울었다.
어느 날은 그 어린 아이가 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걸 보는 부모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등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엄마도 울고 아빠도 울었다. 다행인 것은 지우처럼 길게 가지 않았다.
집에 와서 1년 만에 예주는 습관적인 울음을 그쳤다. 열 살 지우와 여덟 살 예주는 이제 '현실 자매'가 됐다. 밝게 변했고 더 이상 엄마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 둘은 잘 놀고 잘 싸우고 서로를 아껴준다.
경아씨에게 지우가 오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한창 난임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상이 흑백이었을 때 남편과 강릉의 바닷가를 찾은 적이 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 파도가 일렁이는 곳에 아빠와 딸 둘이 밀려오는 물결 따라 뛰어가고 도망치며 한껏 행복해하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너무 부럽게만 바라봐지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잊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주가 오면서 이제는 강릉이 아니라 어디 바닷가라도 경아씨 남편과 딸이 폴짝폴작 뛰어다니는 주인공이 됐다.
지우 혼자로도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색깔이 변했는데 그걸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예주가 온 뒤로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알았다. 아이들은 있는 만큼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였다.
지금 그녀의 집에는 20개월 지난 남자아이 재영이가 같이 산다. 딸 셋에 사위 셋이 있는 노년을 행복하게 상상해왔는데 건강한 남자 아이도 국내입양이 어려워 해외입양 간다는 말이 귀에 박혔다. 상상 속에서 사위 하나를 며느리로 바꾸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혼하고 10년을 적막강산으로 살다 2년 터울로 아이 둘을 입양하고 셋째는 입양 진행 중에 있다. 조용했던 일상이 복닥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설에 살았어도 아이마다 가지고 온 시설병이 달랐다. 지우는 때렸고 예주는 울었다. 재영이는 먹는다. 그리고 잔다.
처음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잠들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먹었다. 경아씨는 또 그게 안타까웠다. 저 어린 것이 저 자고 싶을 때 못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에만 먹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시설에서의 삶이었다.
▲ 아이와의 행복한 시간 ⓒ 김지영
하지만 집에 온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제 엄마아빠가 주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는 만큼 재영이는 제가 하고 싶은 만큼 오래 그리고 깊이 잔다. 재영이의 시설병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먹는 건 포기 못하지만 그것도 제 누나들처럼 점차 나아질 거다.
10년 세월 부부만 살았던 경아씨 집에는 지금 딸 둘 아들 하나가 같이 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이비박스가 생긴 이래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 중 입양가지 못한 더 많은 아이들은 지금 시설에 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이 아이들은 입양대상 아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