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수립일 기념, 함양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
독립을 위해 몸을 내던진 함양 의인 5인을 돌아보다
4월 11일은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독립운동사를 통해 민족 공동체 의식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국가기념일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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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1919년 4월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의 뿌리를 잇는 역할과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더불어 국무총리와 행정부, 국무원을 두는 등 우리나라 최초,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 공화제 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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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27년간 지속하며 독립운동의 큰 역할을 한 임시정부의 수립기념일을 맞아 본지는 1919년을 기점으로 제국주의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내던진 함양의 의인(義人)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특집으로 함양지역 안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시금 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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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해당 내용들은 모두 2007년 9월 함양문화원에서 발간한 '함양 항일 투사록'과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참고했음을 밝힌다.[기자말]
▲ 함양읍 독립만세 기념비. 1985년 12월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 내에 건립됐다.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선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 주간함양
김동호 선생
경남 함양 지곡면 남효리 출신인 김동호 선생은 1919년 3월31일의 안의면 안의읍 장날을 이용해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김병창·임채상·정순완·전재식·조제헌·김채호·최석룡 선생 등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이들은 안의읍 장날인 3월 31일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 준비를 진행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 선생은 이에 적극 찬성해 3월 31일 오후 1시 30분경 안의읍 장터에 나아가 만세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김병창 등 주동자 5명이 체포되었고, 이에 격분한 김 선생은 오후 2시경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워 15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체포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오후 7시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로부터 체포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지방법원과 대구 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석방되고 난 후 김 선생은 1927년 상해 임시정부에 정치자금 200원을 전달했으며 1932년 2월 중국 남경에 도착해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의 지령을 받아 정보 수집, 자금 조달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함양읍 독립만세 기념비. 1985년 12월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 내에 건립됐다.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선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 주간함양
김한익 선생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출신인 김한익 선생은 1919년 4월2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27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이에 격분한 김 선생은 다음 장날인 4월 2일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인근지역의 동지를 규합했다. 그는 아침 일찍 자기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가지고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5시경 3000여 명의 장꾼이 이에 호응하자 김 선생은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7월 2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본 헌병들에게 당한 혹독한 고문과 대구 감옥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당한 고통과 감옥에서 생긴 병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4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김한익 선생의 공적이 인정되어 1982년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함양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한익 의사를 기리고자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 내에 건립됐다. ⓒ 주간함양
백초월 선생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출신인 백초월 선생은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교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비밀 출판물로 <혁신공보>를 간행해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 전남 천은사의 주지인 하룡하로부터 군자금으로 200원을 받고 동년 10월7일에 다시 300원을 모금해 만주 갈림성에 있는 독립군에 11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6명을 각각 선발해 그들에게 여비를 주고 군자금을 전달하도록 했다.
11월 25일 단군의 건국 기념일을 기해 시위 계획을 세워 종로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해 배포한다. 12월에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피체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 서울 마포의 어느 포교실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 후 1920년 4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귀국한 승려 신상완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해 의용승군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에 피체된다.
1938년에는 봉천행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힘으로써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함양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한익 의사를 기리고자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 내에 건립됐다. ⓒ 주간함양
정규환 선생
수동면 상백리 출신인 정규환 선생은 1919년 11월 함양군을 무대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규환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고재경, 정재원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에 사는 부호 차우진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11월15일 오전 1시경 차우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결사대라 소개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차우진은 가진 돈이 없다며 음력 10월 1일에 일금 1만 원을 제공할 것을 약정했다. 정 선생은 12월 12일 약정한 군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갔다가 일경에 피체된다.
그는 이 일로 인해 1920년 1월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3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으나 1921년 4월 16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하종진 선생
안의면 금천리 출신인 하종진 선생은 1919년 3월 안의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참여했고 1922년 10월 대구고보의 맹휴운동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받았다. 1923년 5월에는 경성전차회사 파업을 주도해 민족 차별 대우에 항거하며 항일 투쟁을 펴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고 한다.
이후 1925년 9월 29일 대구 신정 이금이의 집에서 신재모, 방한상 등과 회합해 무정부주의를 실현하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30일에 대구 서성정 대구노동회관 내에서 진우연맹을 비밀결사했다.
그러나 1926년 5월 이금이의 집에서 회합하고 일본과 상행의 동지들과 제휴해 8월10일을 기해 상해의 고삼현으로부터 폭탄을 입수, 대구 시내의 주요 관청 폭파, 각 관서의 수뇌 살해, 번화가 점포 파괴 등을 계획했으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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