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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기생, 조선 최고 '셀럽'이 되기까지

[리뷰] tvN 스토리 역사 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등록|2023.04.13 17:06 수정|2023.04.13 17:06
김만덕(1739-1812)은 조선 시대 후기의 거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의 한계 속에서 뛰어난 상인이자 빈민구제에 앞장선 사회활동가로 '시대를 앞서간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신분차별과 계급질서가 엄격하던 조선 사회에서 김만덕은 기생출신이라는 비천한 신분과 핸디캡을 딛고 국왕인 정조를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과연 어떻게 역사에까지 이름을 남기는 놀라운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4월 12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51회에서는 '인생역전, 제주 기생 김만덕은 어떻게 정조를 사라잡았나'편을 통하여 김만덕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제주도는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평화의 섬으로 불린다. 하지만 김만덕이 살았던 시대의 제주는, 자연재해와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며 험지중의 험지로 불리우는 시련의 섬이었다. 제주는 중죄를 입은 죄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김만덕은 1739년 양인 부모를 둔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제주상인이었던 김만덕의 부친은 1750년, 그녀가 11세였을때 바다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1년뒤에는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고아가 된 자녀들중 일손에 도움이 되는 남자 형제들은 친척 집으로 가게 되었지만 유일한 여자였던 김만덕은 친척들에게조차 모두 외면당했다.

갈곳없는 만덕에게 손을 내민 것은 제주의 한 관기(관아에 소속된 기생)였다. 기생은 국가에서 소속된 공노비로서 관아의 재산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서 생계는 해결할 수 있지만 양인이었던 김만덕은 양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천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김만덕은 결국 기생의 수양딸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0대 후반이 된 김만덕은 제주 관청에 등록된 관기가 되어 기생 활동을 시작했다. 기생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현재의 접대부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예능인'에 가까웠다. 기생들은 노래, 춤, 악기 등 다양한 기예에 능했고, 양반들의 문화인 시 짓기와 그림그리기까지 두루 섭렵했다.

김만덕인 예능적 재능을 발휘하여 제주에서 부와 명성을 떨쳤다. '감은편'에 따르면 "자색이 있어서 부에 속한 기생으로 뽑혔고 기예를 배울 때 무엇이나 다 잘했다"고 김만덕의 미모와 재능을 기록하는가하면 한편으로 "성격이 활달하여 대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평했다.

또한 조선시대의 명신 체제공은 '번암집'에서 김만덕을 가리켜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생 노릇을 하였으나 그 자신은 기생으로 처신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김만덕이 기생임에도 줏대있고 당찬 기개를 지닌 여성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0대가 된 김만덕은 당시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선택을 내린다. 번암집에는 김만덕이 '탐라의 여러 사내들을 머슴으로 거느렸으나 남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그녀가 '비혼주의'를 선언했음을 의미한다. 신분과 관계없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고, 기생들은 편안한 노후를 위하여 양반이나 유력한 인물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만덕의 고향인 제주는 과거부터 돌, 바람, 여자가 많기로 소문난 지역이었다. 지역적 특성상 뱃일을 하러 나간 남자들이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의 여성들은 혼자 살아남기 위하여 더 씩씩하고 강해져야 했으며 김만덕 역시 그런 제주 여성들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

김만덕은 나이가 들면서 입지가 좁아드는 기생 대신 새로운 일에 도전할 것을 결심했다. 타의로 선택받은 기생이 아닌, 자신이 직접 선택한 '상인'으로서의 인생 2막이었다. 18세기 조선은 전국적으로 시장이 들어서고 상업이 활발해지던 시기였다. 김만덕은 기생 시절 육지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하여 빠르게 변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파악하고 상업의 변화에 눈을 떴다.

김만덕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제주 포구를 오가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점포를 열었다. 김만덕의 점포는 숙박업소의 기능은 물론 상인들간의 거래를 연결해주는 역할도 맡았다. 현대적으로 치면 한 점포를 통하여 원스톱 거래가 가능한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다.

점포가 번창하면서 김만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직접 물건을 팔면 어떨까'라는 발상에 이른다. 김만덕은 점포 운영을 통하여 확보한 인맥과 거래망을 바탕으로 직접 육지로부터 물건을 수입하며 장사에 나선다.

김만덕이 장사를 시직한 품목은 바로 쌀이었다. 제주 출신인 김만덕은 척박한 지역으로 농사가 어려운 특성상, 쌀이 구했던 제주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번암집에 따르면 김만덕은 '재화를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내어팔거나 쌓아놓곤 했다'고 기록하며 그녀의 장사 수완과 통찰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김만덕은 수입만이 아니라 이번엔 양반들이 이용하는 갓의 재료가 되는 말총과 양태 등을 육지로 수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제주도의 말총과 양태는 갓의 재료로 최상품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었고, 18세기들어 조선의 상업과 상인계층이 크게 번성하며 돈으로 양반 지위까지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화려한 양반의 복장은 이른바 당대의 패션 아이템으로까지 진화했다.

하지만 남다른 수완과 안목으로 거상의 지위까지 올라간 김만덕을 향하여 질투와 시샘의 시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효전산고'에 따르면 김만덕이 기생 시절부터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며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돈을 모으는데 악착같다는 평가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김만덕의 인색함을 비난할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인으로서 성공할수 있었던 기질을 보여주는 장면으로도 해석될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된 김만덕과 제주 일대에 뜻하지 않은 격랑이 닥쳐온다. 제주가 무려 3년넘게 극심한 흉년과 기근에 시달리며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한 것.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94년 당시 6만 2천에 이르는 제주 인구가 약 1/4에 이르는 1만 8천명이나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만덕이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당시 제주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소 임금이던 정조는 전국 곳곳이 기근으로 지원을 호소하던 상황에서 힘겹게 제주로 구휼미를 모아 보냈으나, 바닷길에 쌀을 실은 배가 대거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지며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 소식을 들은 김만덕은 자신이 사비로 직접 곡식을 사오기로 결심했다. 막대한 비용은 둘째치고 김만덕이 보낸 운반선도 험한 바닷길을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 국가도 해내지 못한 일에 기끼어 나선 김만덕은 아예 30년간 모은 전 재산을 모두 투자하는 결단을 내린다. 김만덕에게는 재산보다도 평생을 바친 고향 제주도를 살리는 게 더 우선이었다.

다행히 김만덕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쌀을 무사히 제주까지 운송해 올 수 있었다. 김만덕이 전재산을 들여 제주로 들여온 쌀은 60섬(약 10톤)에 이르렀고 약 3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었다. 이전에 김만덕을 수전노라고 비방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번암집에는 당시 제주 백성들이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우리를 살린자는 만덕이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여인, 그것도 기생 출신의 거상이 전재산을 들여 백성을 구제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크게 감동한 정조는 제주목사에게 교지를 내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양인으로의 신분 회복이나, 재물 보상같은 소원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김만덕이 밝힌 요청은 전혀 뜻밖이었다. 김만덕은 수도 한양에 가서 임금이 계신 궁궐을 구경하는 것. 당시 조선 제일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두 가지 소원을 털어 놓았다.

김만덕의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출륙금지령 때문에 허가받은 일부 남성을 제외하면 섬밖으로 나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살기힘든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도망치려는 제주 백성들이 많았기에 내린 조치였다.

고심 끝에 정조는 김만덕을 위하여 출륙금지령을 페지하는 결단을 내린다. 정조는 김만덕의 여행길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지시했고, 그녀가 한양에 올라온 뒤에는 그녀를 내의원 의녀의 반수(우두머리)로 삼아 천민 신분으로 벼슬을 내리는 특별선물까지 안겨줬다. 이는 조선 궁궐의 법도상 기생은 입궁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궁궐을 구경하고 싶은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정조의 배려였다.

김만덕은 창덕궁으로 나아가 국왕 정조를 직접 만났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천민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김만덕이 인생역전에 성공하며 국왕까지 만날 수 있었던 뜻깊은 순간이었다.

정조는 김만덕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당시 자신이 공들여 육성하던 초계문신 시험에서 만덕의 일화를 시험문제로 출시하여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했다. 또한 측근인 체제공에게 김만덕의 일대기를 집필한 '만덕전'을 편찬하게 한다. 천민과 여성에 대한 이러한 특별대우는 조선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고,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정조가 김만덕을 통하여 당시 양반이나 관리 등 집권층에게 그녀를 보고 본받으라는 일종의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797년 3월, 김만덕은 또다른 평생의 소원이던 금강산 관광길에 나선다. 금강산은 조선 제일의 명산으로 이름 높았지만 지체높은 양반들조차 쉽게 가기 힘든 지역이었다. 제주도에서 평생을 갇혀 지내며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림, 상상으로만 머릿속에 떠올리던 금강산의 경치를 직접 감상하게된 김만덕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채제공은 제주도 출신으로 조선의 두 명산인 한라산과 금강산을 모두 보게 된 김만덕을 가리켜 "수많은 사내 중에도 김만덕만한 복을 누린 자가 있겠는가"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김만덕이 한양에 돌아왔을 때, 도성에는 양반과 백성을 가리지 않고 김만덕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만큼 김만덕의 명성이 조선에 널리 퍼지게 된 것.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김만덕이 '조선 제일의 셀럽'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공을 이뤄내고 또한 자신의 이룬 것을 기꺼이 희생한 김만덕의 삶은 당대 대중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제주도로 다시 금의환향한 김만덕은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다가 1812년 10월 22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만덕을 생전에 유언으로 놀랍게도 "전재산을 제주의 빈민들을 위하여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그녀의 삶이 진정한 귀감이자 대인배로 기억되는 이유다.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우리는 흔히 영웅이라 부른다. 척박한 섬에서 태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거상이 되고, 다시 백성을 구원한 구세주로 거듭난 김만덕의 삶은 '평범한 사람들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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