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는 모든 것', 이 번역이 그렇게 어렵나요?
한국의 습관적인 '여성' 빠뜨리기, 실수라고 하기엔 반복적
▲ 영화 <바비> 포스터 비교 ⓒ WARNER BROS
'Barbie is everything', 이 문장은 초등학생이라도 해석할 수 있는 기초 영어다. 말 그대로 '바비는 모든 것이다'로 번역하면 정답인데 굳이 오역하여 일이 커졌다. 지난 12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공식 트위터에 공개된 영화 <바비>의 포스터가 그 주인공이다.
포스터 문구인 '바비는 모든 것(Barbie is everything)'을 그저 '바비'로, '그는 그냥 켄(He's just Ken)'이란 문장을 지우고 '켄'이라 표기하였다. 이 쉬운 문장을 누가, 왜 오역했을까? 원한다면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바비를 평범한 여자로 만든 그들은 누구인가.
▲ 영화 <바비> 속 '켄'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 '켄은 그저 액세서리며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다'고 말했다 ⓒ @fallontonight
1959년 미국 마텔에서 만든 인형 '바비', 누구나 한 번쯤 어렸을 때 갖고 놀았다. 바비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는 바로 바비의 남자친구, '켄'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미미하다. 바비가 외롭지 않게 들고 다니는 일종의 '액세서리'라고 할까나? 오, 이건 결코 켄을 무시하려는 말이 아니니 발끈할 필요 없다. '켄은 바비의 액세서리'라는 말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통한 밈(meme)이다!
바비 수집가들을 위한 잡지 <바비 바자>의 편집장 마를린 무라는 켄을 '그저 바비랑 데이트하는 남자'라고 표현하였고 영어권 예능에서 바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켄은 자주 등장하는 개그 소재다. 심지어 영화 <바비>에서 켄을 연기한 배우 라이언 고슬링조차 '켄은 액세서리이며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다'고 답했다. 연기한 장본인조차 켄을 '별거 아닌' 캐릭터라고 답하니, 영화 포스터 속 'He's just ken(그는 그냥 켄)'이란 문구가 그 본질을 꿰뚫었다.
바비는 모든 것이죠!
▲ 뭐든지 될 수 있다는 '바비'의 슬로건 ⓒ MATTEL
켄이 '그냥' 켄이라면 바비는 모든 것이다! 여자 아이들이 인형 놀이할 때 유심히 지켜봤다면 '바비는 모든 것'이란 말이 더 와닿는다. 그들은 매번 바비에게 다른 역할을 부여하며 상황극을 펼치는데 그때마다 바비는 다정한 엄마이기도, 멋진 모델이기도, 똑똑한 박사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롤플레잉 속 다양한 바비의 역할처럼 실제 바비도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초창기의 바비는 패션모델이나 에디터, 가수처럼 화려한 직업을 가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며 의사나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직업의 범주를 넓혔으며 그 이후로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바비, 게임 개발자 바비까지 등장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바비의 슬로건처럼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캐릭터다.
특히 영화 <바비>의 24종 포스터는 바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비를 연기한 여성 배우들이 대통령, 판사, 노벨상 수상자 등 다양한 직업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 내에서도 바비가 뭐든 꿈꿀 수 있는 여성임을 강조하였다.
의도적인 '빠뜨리기', 한국의 습관적인 오역
그러나 12일 공개된 포스터는 뭐든 될 수 있는 '바비'와 그저 '켄'인 두 캐릭터 간의 상징성을 무시하였다. 둘 다 영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으며 캐릭터를 수식하는 문구를 삭제한 채 단순히 '바비'와 '켄'으로 표기되었다. 영화 <바비> 포스터가 자국의 언어로 번역된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오직 한국에서만 발생한 오역이었다.
태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등 모두 '바비는 모든 것'이며 '켄은 그냥 켄'이라는 상징성을 유지하여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잘못된 오역은 타국의 언어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결코 치부할 수 없다. 게다가 여성 주연 영화의 포스터 오역은 <바비>가 처음이 아니다.
▲ '영웅적인(heroic)'을 '러블리한 날'로 바꾼 CGV아트하우스 ⓒ CGV아트하우스
2019년 CGV아트하우스는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포스터를 오역하여 공식 사과문을 게재한 적 있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두 번째로 대법관으로 임명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영화로 성차별과 맞서 싸운 인물이다. 포스터 문구 또한 그의 당당함을 담아 '영웅적인(heroic)'이라 칭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영화와 무관한 '러블리한 날'이라 번역되었다.
여성을 빠뜨리는 오역은 올해만 두 번째다. 최근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양자경의 소감 또한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양자경의 "여성 여러분, 당신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말을 믿지 마세요"라는 수상소감에서 '여성'을 삭제한 것이다. 한국의 습관적인 '여성' 오역, 몰라서 한 실수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여자
▲ 영화 <바비> 스틸컷 ⓒ WARNER BROS
결국, 13일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해명과 함께 포스터 문구를 수정하였다. 포스터 문구는 짧은 글자 수에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온전히 담기 위해 상징적이다. 이 상징을 적절한 맥락 속에 해석하는 것이 관건인데 영화 <바비>는 여성에 관한 영화임에도 여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삭제한 채 번역되었다.
영화 <바비>는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바비랜드에서 쫓겨난 바비가 인간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도 씩씩하게 여정을 떠난 바비처럼 영화 <바비> 또한 의도적으로 여성을 지우려는 움직임 속에서도 당당히 한국 극장가를 사로잡길 바란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여자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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