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겹도록 고맙다... 전교생 6명 중학생들이 사는 법
[홍정희의 세상살이] 산골 중학교 아이들에게 내가 꽂힌 이유
▲ 벚꽃이 피었다. 사진찍자 얘들아! 담임 선생님께서 1학년 친구들 사진 찍어 주는 동안 3학년 형님들은 뒤에서 자신들 차례를 기다리며 나뭇가지를 주워 놀고 있다. 단단한 내면의 힘 기르는 중. ⓒ 홍정희
중3 남학생이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며 말한다. "밖에 산 좀 잠깐 봐."
학생은 작년에 내가 가르친 제자다. 나는 그가 들려준 저 이야기에 크게 감탄했다. "게임 좀 그만해!"라며 다그치지 않고 창문 열어 스스로 몸과 마음을 깨치게 만든 어머니의 지혜로움과 창문을 열면 빌딩 숲이 아닌 푸른 산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학생은 스스로도 그 일화가 마음속에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삶의 순간순간, 고비고비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고 건전하게 살아낼 것이다.
강원도 산속에 살아도 우리 아이들은 엄연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하교 후 컴퓨터로 게임도 즐기고 코딩 프로그램으로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만들기도 한다. 챗GPT에 '홍정희 선생님을 아냐'며 질문도 한다. (물론 챗GPT는 나를 모르더군!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할게. 얘들아~)
존재 자체를 존중
▲ 작년 겨울 학교 축제에서 3학년 학생과 내가 우쿨렐레+리코더 연주를 선보였다. 이날을 위해 매일 학생과 연습하는 시간조차 얼마나 신이 났는지. ⓒ 홍정희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작년 재학생들에 이어 올해 신입생까지 모두 욕과 비속어를 쓰지 않으며, 핸드폰에 매여 살지도 않는다. 형, 동생 할 것 없이 전 학년이 다 같이 천진하게 잘 어울려 지낸다. 신록으로 물들고 있는 앞산과 운동장에 흩날리는 벚꽃을 알아채는 눈을 가졌으며, 기력 없어 보이는 교사에게 먼저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을 줄 안다.
여름 방학 날에는 친구 집 앞 계곡에서 다 같이 모여 물놀이를 하며, 겨울 방학 날에는 꽝꽝 언 계곡 그 자리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그러곤 계곡 앞 친구 집에서 며칠씩 먹고 자며 방학을 시작하는 자신들만의 행사를 꼬박꼬박 거행한다.
갑자기 키가 부쩍 큰 친구가 주인의 풍채를 감당하지 못해 짤막해진(때론 구멍이 나 있는) 바지를 입고 와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당사자도 자신의 옷차림에 개의치 않는 듯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 장면에 나는 그만 꽂히고 말았다. 어디서나 누구나 행색으로 평가받거나 놀림당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위축되지 않는 세상 같아서, 우리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이미 그런 고운 가치관을 장착하고 있는 '정상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크고 있어서, 그렇지 않은 '비정상적'인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어른으로서는 눈물겹도록 고맙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한 번은 어머니가 외국인인 한 녀석이 어머니 나라의 언어를 같은 반 친구들과 나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새로 배운 몇 가지 단어들을 조합해 재밌는 문장을 만들어 대화를 이어간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다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주 즐겁게 환대와 공존을 마음에 새긴다.
우리 아이들의 이런 어질고 선량한 성정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내가 이곳에서 이 년째 근무하며 내린 잠정적 결론은 '심심함을 견디며 자란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디지털 네이티브임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에 코 박고 있지 않고 주변의 자연과 사람을 볼 줄 아는 그 자기조절력은 우선은 그들의 보호자들이 물려준 것일 테다. 잘 키워주셨다.
다음으로는 심심한 이곳의 환경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치킨 먹고 싶으면 배달 앱 켜서 주문하고 몇 십분 만에 집 앞에서 픽업하는 세상인데, 이곳 아이들은 치킨이 생각난다면 일단은 기다려야 한다. 주말이 되어 보호자가 시내에 나가 사다 줄 때까지 며칠씩 기다리는 게 기본값이다(물론 당일에 보호자가 사다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달 앱으로 주문해 받는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 친구가 개인적으로 시내에 나갈 일이 생기면 삼각김밥 꼭 사 오라고 당부를 거듭한다. 편의점도 치킨집도 없는 이곳은 기다리는 게 일상이다. 특별한 이벤트도 잘 없다. PC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네컷을 찍을 수도 없으니 학교가 일찍 끝나면 음악 시간에 배운 악기 뚱땅거리고, 운동장에서 캐치볼도 했다가, 집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다시 학교로 모여 해가 질 때까지 옹기종기 또 논다. 심심한 줄도 모른 채 심심한 환경을 잘 견디고 있다.
세상은 믿을 만하다는 걸 충분히 경험
▲ 지난 겨울방학 어느 날엔 전교생 4명과 옆 동네 동해시의 작은 책방에 갔다. 책방 구경하고 차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사먹으며 하루 즐겁게 놀았다. ⓒ 홍정희
그래서, 심심함과 기다림이 일상의 기본값이 되면 뭐가 좋다는 말인가? 일단 사람이 참 바르고 착하다. 착해 빠져서야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나 반문한다면 괴테 연구가로 유명하신 전영애 교수님의 말씀을 옮기고 싶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바르게 살면 손해 볼 것 같지요? 아니에요. 일흔두 해를 살아봤더니 바르게 살아도 괜찮아요. 바르게 산다고 꼭 손해 보고 사는 거 아니에요.
전영애 교수님의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 이미 기사로 연재된 바 있다. 바르게 일구신 삶을 만날 수 있다(관련기사: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https://omn.kr/1zjeu).
그리고 불안하거나 초조한 마음이 덜하다. 쉽게 화를 내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곡해해 타인과 자신을 괴롭히는 일도 적을 것이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너무 확대해석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험한 세상도 경험해 봐야 단단해지지 그렇게 비슷한 아이들끼리 그렇게 적은 경험으로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냐고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겪고 공부한 바로는 험한 세상을 경험하고도 잠시 주저앉았다가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려면 그 험한 세상을 경험하기 이전에 따뜻하고 바른 세상 속에서 충분히 보호받고 지지 받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믿을 만하고 아름답다는 걸 미리 충분히 경험해 두어야 그렇지 않은 세상을 목도했을 때 좌절해 쓰러지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 "이런 경험도 다 해보는군" 하고 다시 '바른' 자기의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육아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들이 자주 쓰는 용어 '회복탄력성'이 바로 이런 거 아닌가?
'챗GPT' 시대다. 디지털이 점점 더 인간화되어 갈수록 우리 인간만이 가진, 이곳 산골 아이들이 장착한 그 성정은 더욱 빛을 발하리라. 나는 이곳에서 더 감탄하고 더 박수 칠 것이다. 아이들과 심심하게 희희낙락할 것이다.
덧) 작년 이맘때 오마이뉴스에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기사로 올린 적이 있습니다(관련기사: 전교생 4명 중학교, 교사가 호들갑 떠는 까닭 https://omn.kr/1ym16). 고마우신 독자님들께서 응원 글과 함께 12만 5000원의 원고료를 보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저희 그 돈으로 소고기와 삼겹살 사 먹었습니다. 다 같이 정말 기뻤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시민기자 개인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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