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건전성 추구한다며 예타 면제 골몰하는 정치?
핵심은 행정부의 자의적 면제 판단... 완화 아닌 개혁 필요
▲ 대학생 단체 신전대협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기준 완화 법안 통과에 대해 규탄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4.19 ⓒ 연합뉴스
대한민국 정치가 수많은 단어의 의미를 비틀어 버렸지만, '재정건전성'이라는 단어만큼 껍데기만 남은 단어도 찾기가 힘들다.
1000조원 국가채무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며 균형재정을 강제하는 재정준칙을 추진하면서도 5년간 60조원이 훌쩍 넘는 감세를 합의하는가 하면, 세수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반도체 기업에게 조건 없이 세금 수조원을 깎아주는 데엔 거리낌이 없다.
거센 반발로 일단 상임위원회 통과가 보류되긴 했지만, 대한민국 국회의 96%를 점하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이해가 일치하는 안이 그대로 묻힐 리는 없을 것이다. 국민의힘이 법안 통과를 유보하는 표면적 이유도 숙원인 재정준칙 안과 함께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니, 중량급 법안의 우산 속에서 비판 여론을 회피하려는 속내가 읽힌다.
일단 개정안으로 예타기준이 상향되면 경제성 없는 사업이 다수 추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예타를 요구한 사업 중 개정안 기준으로 보면 59개 사업이 예타에서 제외될 수 있고, 이들 사업 중 5개, 총 5506억원의 사업이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 쪼개기'도 문제다. 지금까지는 500억 기준에 맞춰 490억원 정도로 사업을 쪼개거나 조정하는 관행이 성행했는데, 기준이 1000억원이 되면 990억짜리 사업으로 그 스케일이 커질 것이다. 기재부는 SOC는 쪼개기가 쉽지 않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예타 조사 철회 뒤 사업비 497억원으로 조정해 재추진), 영암 F1경기장(특별법으로 예타 면제), 한국해양수산원 이전(사업비 454억원으로 시작, 추진 과정에서 750억원으로 증액) 등 꼼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예타가 통과되지 않으면 사업비를 기준 이하로 낮춰 재추진하거나 기준금액 이하로 사업 추진 후 사업금액을 늘리는 식이다.
물가도 오르고 경제가 성장했으니 예타 기준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500억원은 지금도 결코 작은 사업 규모가 아니다. 예타 면제 요건에 경제 규모 확대를 반영한다면, 재정지출에 대한 감시와 검증이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국민적 인식 변화도 함께 반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 면제 규모 206조원
▲ 지난 2022년 4월 27일 가덕도신공항 예타 면제에 반발하는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 부산환경회의 소속 단체 회원들이 부산시청 광장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김보성
이미 예타는 재정책무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는 본래 제도적 취지에 너무 멀리 벗어나 운용되고 있다. 이명박정부 61조원, 박근혜정부 25조원, 문재인정부 120조원, 2008년 이래로 무려 206조원어치 사업에 대해 예타가 면제됐다.
핵심은 행정부의 자의적 판단이다. 국가재정법 38조 2항 10호,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해서 국무회의 거쳐서 확정된 사업'조항이 예타 면제에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고 있다. 자료 제출 기준도 규정된 게 없어 면제 사유가 타당한지 검증도 어렵다. 10호에 따른 예타 면제는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극심했는데, 2021년까지 예타 면제건 97조원 중 이 '국무회의 면제'건이 78조원에 달한다.
신공항이 대표적이다. 사업비가 13조 5천억원인 가덕도 신공항은 국토부 사전타당성조사에서는 비용대비편익비율이 0.6도 되지 않았다. 탄소중립 시대에 단거리 항공을 세계적으로 규제하는 시대임에도, 현 15개 공항 중 10개 공항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평균 활주로 이용률이 5%도 되지 않음에도, 무려 10개의 신공항이 추진 중이다. 예타제도 시행 이후 국토부가 올린 공항 계획은 모두 예외 없이 예타 대상이 됐고 미통과 사례는 없다. 타당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새만금이나 가덕도처럼 예타를 면제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과연 25개의 공항이 필요한 건지 대한민국은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한편 예타 면제는 소각장 같은 기피시설 관철을 돕기 위해서도 활용된다. 지난 10년 동안 16개 쓰레기소각장, 총 2조 2천억원 사업에 대해서는 전부 예타가 면제됐다. 국가재정법 38조 2항 8호, 이른바 '법령에 따라 추진하여야 하는 사업'이라는 조항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사업 추진 주체인 행정부나 지자체가 마음대로 판단한 사업타당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는 무시된다. 서울시의 일방 추진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마포구의 6653억원 규모 쓰레기소각장 사업 역시 관례에 따라 예타가 면제될 가능성이 높다. 예산 민주주의 위기의 한 단면이다.
필요한 건 예타 완화 아닌 예타 개혁
예타의 비용효율성 편향이 지역균형 가치를 무시하고 미래지향적 결단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지적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인구가 부족해 타당성이 늘 낮게 나오다보니 필수 인프라가 깔리지 못하고 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경부고속도로도 당시 기준에서 타당성 자체는 매우 낮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산업발전의 골간이 됐듯, 예타조사 결과가 금과옥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예타 기준 상향이라는 양 당의 해법은 이런 편향을 해결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도피하는 방식이다. 정치가 사회의 다양한 의견과 가치를 경합시키는 심의 기능을 포기한 채 예타결과에 사실상 최종판단의 권력을 쥐어줬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를 뒷구멍을 넓히는 식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
예타 면제 요건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하고, 예타 결과와 면제 사유를 검증할 수 있도록 공개 수준을 높이고, 책임감 있는 재정운용 원칙을 바탕으로 전문가나 관료주의를 넘어 국회와 국민의 참여까지 보장되는 예산배분의 의사결정 구조를 세우는 입법이 국회가 할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문제를 직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국회의원과 지자체의 사업유치를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확보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모습은 실망스럽다. 필요한 건 예타 완화가 아닌 예타 개혁이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국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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