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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개념 없던 100년 전, '형평'을 처음 외치다

김장하 선생 등 주도로 일어난 진주 형평운동 재평가... '실질적 인권운동 실현' 역할 다할 것

등록|2023.04.25 17:32 수정|2023.04.25 18:01
백정 신분 해방을 부르짖었던 형평운동이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지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진주시와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형평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글을 보내와 싣는다.[편집자말]

▲ 1928년 "형평사 제6회 정기 전국대회"를 알리는 포스터. ⓒ 자료사진


'인권'이란 개념이 배태도 못한 시절인 1923년의 경남 진주에서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신분해방과 차별철폐를 부르짖으며 나선 것이 형평운동의 시작이다. 운동은 삽시간에 들불이 돼 전국에 번졌다. 불합리한 제도에 희생돼 오랜 시간 깎이고 발리며 천대받아 처절한 한을 품고 흩어져있던 44만 백정들의 핏발선 시선이 진주에 모였다.

형평운동은 절실함과 '돈'과 후원 세력이 여물게 어우러졌기에 기틀 잡을 수 있었다. 백정이 제아무리 합당한 주장을 내세워 모여 외쳐도 미동은커녕 위해를 가하려 덤빌 것이 그 시절 인심이었으니. 그럼에도 그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본 깨친 지식인들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은 '신(新) 백정'이란 칭호와 함께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백정의 바람막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지와 참여가 없었다면 백정들의 외침은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 눈뜬 시민운동가들의 희생적 후원으로 백정들의 함원(含怨)은 평등을 부르짖는 운동으로 불붙어 전국으로 번질 수 있었다. 그 엄혹한 시절 감히 '천민의 인권'을 말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참으로 존경받고 기억돼야 할 정신이며 두고두고 칭송할 고귀함이다.

둘째는 백정 이학찬의 돈이다. 그는 천업이자 독과점업인 도축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이학찬은 한 맺힌 계급 세습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자식의 취학으로 이루려 했으나 좌절되며 형평운동에 몰입한다. 우호적 여론 세력을 편입하는 큰 역할을 했다.

셋째는 이 일을 도모하고 기획하고 조정 연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정 장지필(張志弼)이란 인물이다. 그의 드러난 흔적은 "의령 사람, 메이지대 법학부 3년 중퇴, 형평사 창립 멤버이며 초대 총무, 강상호와의 주도권 다툼으로 분화. 1935년까지 백정해방운동에 깊이 관여" 정도이다.

1898년생이고 29세에 유학을 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아귀도 맞지 않는다. 형평사 창립이 1923년인데 역산해보면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의 한국사>에 기록된 생년은 1884년이다. 고려혁명당 공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니 그편이 그럴듯하다. 그는 어떻게 백정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에 오를 수 있었으며 중도에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와 일본 '수평사'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천민의 신분으로 신학문을 접한 그의 심회는 어땠을까 등의 궁금증이 일지만 실증적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갖은 소설적 상상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그처럼 가장 절실했을 것이고 그래서 투쟁의 전위에서 분투했을 당사자인 '백정' 자신의 세세한 기록은 없다. 가담자 명단은 화석처럼 남아 있지만 그들 각자가 견뎌 낸 삶의 질곡과 운동 가담의 계기, 소회에 관한 기록은 한마디도 없는 것이다.

유물이나 유품 또한 한 점 그럴듯한 것이 없다. 저울같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로 붙인 '형평'의 상징이랄 수 있는 고기 달던 저울 하나 남은 게 없는 것이다. 조상의 비참한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백정의 후손들은 그 모든 유무형의 유산을 한데 모아 가만히 'Del'(삭제) 키를 누른 듯하다.

"실질적 인권운동의 실현"
 

▲ 4월 22일 하동 여행 때 함께 한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김장하 선생(왼쪽부터). ⓒ 윤성효


진주에서 형평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창립 70년을 앞둔 1992년이다. 진주의 존경받는 시민 김장하(金章河)와 지역사를 연구하던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 김중섭의 주도로 '형평운동(70주년)기념사업회'가 꾸려진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형평사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형평운동의 현대적 조명'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시작으로 1996년에는 시민 1500여 명의 성금으로 진주성 정문 앞에 형평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시민사회에 재인식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형평탑 건립 이후 이렇다 할 활동 방향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정체된 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2년 형평사 창립 80주년을 앞두고 형평운동의 발전적 계승을 위해서는 기념사업회의 역할을 다부지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었다. 역사적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한편 새로운 인권운동으로 재도약하자는 결의다. 시민사회에 재창립을 알리는 의미로 2003년 4월에는 형평운동을 주제로 한 공연과 학술회의와 사진전 강연회가 있었다.

아울러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일본의 '부락해방연구소' 관계자를 초청해 국제적 연대를 꾀하기도 했다. 그리고 '형평운동이란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에 명철히 주목하고 그 의미를 새기는 실천적 운동에 매진키로 했다.

이제 한국 사회에 백정이란 신분으로 박해받는 집단은 없다. 그러나 백정이 없어졌다 하여 사회적 차별도 함께 없어졌는가. 다만 백정이란 이름의 신분이 없어졌을 뿐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혼모라는 이유로, 한 부모 가족이라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다른 성적지향과 성별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모질게 차별받는 이들이 상존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백정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어깨를 겯고 그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부숴 나가는 것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고 또한 기념의 의의요 운동이다.

올해 형평사 창립 100주년을 맞는 진주는 다시 형평 바람이 일고 있다. 진주시가 범시민적 기념행사로 치르겠다는 적극적 의욕을 보이며 손을 내미니 형평운동기념사업회도 추진단을 구성해 진주시와 손발을 맞추었다. 때마침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이끌어오던 김장하(南星 金章河) 선생의 삶이 지난 설날 아침에 MBC 다큐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고 '어른 김장하'가 책 <줬으면 그만이지>로 깔리며 상승작용을 일으키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형평운동 100주년은 시민운동의 쇠퇴기를 거치며 명맥만 유지해오던 우리의 이상을 되짚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기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배제돼 고통받는 오늘의 백정과 함께하며 그들과 어깨를 겯고 연대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라 여긴다. 그것이 2003년 2차 개편을 통해 내세웠던 '실질적 인권운동'의 실현이다. 100주년을 통해 다시금 형평과 그 정신을 시민사회에 환기시켜 살아있는 '형평'을 다음 주자에 승계하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 시집 <형평사를 그리다>를 출간했던 고 박구경 시인(2023년 3월 작고)이 형평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내려고 했던 시집에 싣기 위해 발문으로 써 놓았던 글이다.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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