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부산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 범어사 옆으로 가세요
사찰과 또 다른 매력 선사하는 천연기념물 등나무 군락지... 보라색 꽃과 어우러진 숲 매력적
▲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 ⓒ 문화재청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든 근현대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겠느냐만, 부산은 6.25 전쟁의 피란수도가 돼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진 도시다. 서쪽으로는 피난민들을 수용하던 산비탈의 오랜 주거지들이 알록달록 옷을 바꿔 입고 특유의 정취를 풍기며, 동쪽 해변 라인의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높은 빌딩이 화려한 야경을 뽐내며 역동적인 이 도시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반면 북쪽에 위치한 부산의 가장 높은 산인 금정산(810m)은 다른 쪽이 시대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온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하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 중턱에는 신라 문무왕 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남 3대 사찰 범어사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등나무 군락지가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는 듯 하다. 지역주민이라 가끔 범어사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가람 내에 큰 규모의 등나무 군락지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됐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상... 숲이 주는 사색의 시간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과 범어사로 가기 위해 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범어사 입구에서 눈을 돌리면 안내판과 함께 샛길이 하나 보인다. 바로 등나무 군락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 군데 무리 지어 자라는 것이 드물다는 등나무가 6만 5502㎡의 면적에 약 6500그루 정도 서식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몇 걸음 들어섰을 뿐인데 이곳의 공기가 갑자기 미묘하게 바뀐 것만 같다. 봄을 맞아 다양한 농도의 초록을 한껏 자랑하는 무성한 숲길과 그 밑을 조용히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속세를 벗어난 공간인 사찰과 또 다르게 아예 멈춘 것만 같은 아득한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6500여 그루의 등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 박은정
▲ 거친 야생의 원시림 같은 등나무 군락 ⓒ 박은정
표지판을 지나 곧 눈에 들어오는 부도탑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자연에 불쑥 들어선 듯한 풍경과 마주한다. 군락지 내의 등나무들은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 한쪽에 자라던 나무와 전혀 다르게 정글이나 야생의 것들처럼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메말라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묘하게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땅에서부터 올라가 꽃을 피워낸 작은 나무도 종종 있지만, 많은 나무들이 10m 이상 다른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 높은 곳에서 햇빛을 받고 꽃을 피워내고 있다. 등꽃은 부처님 오신 날 즈음 피는 꽃이라 알려졌다. 4월 말인 지금 이미 옅은 보라색 등꽃이 일부 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본격적인 개화 시기인 5월이 되면 화려한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곧은 나무에 휘감긴 등나무 줄기를 보면서 걷다보면 등나무가 다른 나무에 의지해 꽃을 피워내는 것인지 다른 나무를 밟고 올라가 꽃을 피우려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마음 속 의문을 읽기라도 한듯, 등나무와 칡의 얽힘에서 유래된 '갈등'의 뜻이 새겨진 나무 팻말이 나온다.
서로 같은 콩과 식물로 다른 나무를 휘감아 햇빛을 받고 자라나는 것도 비슷하지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성질 때문에 함께 자라면 결국 그 나무를 죽이게 된다는 칡과 등나무에서 유래된 '갈등(葛藤)'
▲ 등나무와 칡에서 유래된 갈등의 의미 ⓒ 박은정
팻말에 새겨진 글을 읽고 등나무가 감아 올라간 나무들을 바라보며 잠시 한숨 돌려본다. 이곳 등나무 수령이 100년 정도 됐다고 하는데,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나와 다르게 저 나무는 현명한 공생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부도탑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내느라 군락지 일부가 훼손됐다고 하는데, 워낙 넓은 군락지 내에는 여전히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숲길 너머로 야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등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거나 높은 곳까지 타고 올라가 특유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숲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산책로 걷고 '보물' 범어사 들러보길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산책로다. 방문객을 배려한 인공산책로도 있지만 이 산이 솟아났을 무렵부터 줄곧 땅에 박혀 있던 것인지, 산위에서 굴러내려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큰 바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다. 이 숲길이 지닌 태초의 원시림 같은 신비스러움과 은근히 어울린다.
서두르지 말고 이 장소에 어울리듯 천천히 길을 오르라는 듯 한 길을 따라 경사를 올라가다 보면 30m 높이의 거대한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길쭉길쭉 시원하게 뻗은 나무들이 장관이다. 해가 비치면 비치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숲의 트인 자리에 만들어 둔 쉼터가 나온다.
이 숲에 서 있다가 쓰러진 나무 둥치를 다듬어 만들었을까? 새삼 궁금해지는 동그란 모양의 벤치에 새겨진 나이테를 손으로 짚어가며 세다 보면, 긴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켰을 나무에 대한, 여전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서서히 밀려든다.
▲ 부산 범어사 전경 ⓒ 범어사
▲ 특유의 정취를 풍기는 범어사 계단길 ⓒ 박은정
군락지 내 둘레길을 다 돌았다면, 들어왔던 입구로 나가 범어사에도 들러보자. 보물 1461호로 독특한 양식을 자랑하는 범어사의 일주문과 대웅전, 삼국유사를 보관한 성보 박물관 등 사찰의 유래와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보는 즐거움도 누리면 좋을 것이다. 내려갈 때는 경내 왼편의 대나무가 늘어선 계단길을 추천한다.
범어사는 참선을 통해 마음 속 잡념을 다스리고 내면세계에 정진해 마음의 근원을 구하는 수행도량이라는 의미의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고 한다. 등나무 군락지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숲속에서 오랜 세월 서로 몸을 맞대고 있는 나무들, 하늘을 향해 곧게 몸을 뻗어올린 나무들을 살피며 걷다보면 마음의 근원까지는 닿지 못할지라도 마음의 자세를 살짝 바꿔볼 여유 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주소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 범어사(청룡동 546)
주차 : 3000원
대중교통 이용 시 입장료 무료
▲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삼나무 숲길 ⓒ 박은정
▲ 등나무 군락지를 걷다 보면 나오는 바위길. ⓒ 박은정
덧붙이는 글
'내 고장 봄 여행 명소 공모'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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