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기다려서 만난 딸, 그 아이가 알려준 사실
오랜 난임 시술 끝에 입양 선택한 홍주혜씨 부부가 아이 통해 얻은 확신
▲ 기혼인구의 10~15%가 난임을 경험한다. ⓒ 픽사베이(pixabay)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난임 환자 수는 2017년 20만 8704명, 2018년 22만 9460명, 2019년 23만 802명에 이어 2021년 26만 3045명으로 연평균 5%씩 증가하고 있다. 기혼 인구의 10~15%가 난임을 경험한다.
난임 시술 현황을 보면, 1인당 평균 횟수는 7.02회다. 난임 시술을 받은 여성 10명 중 2명이 출산에 성공한다. 난임 시술 후 출산에 실패한 8명 중 일부는 출산을 포기 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또 다른 일부는 입양을 선택한다.
2021년 입양통계를 보면 전체 입양아동은 국내 입양이 226명, 국외 입양이 189명으로 총 415명이었다. 입양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58년 이후 가장 적은 수치였다.
2021년 26만 3045명의 난임 환자 중에서 20%인 5만2609명은 출산에 성공했다. 80%인 21만 436명은 출산을 실패했다. 단순 산술로 계산하면 실패한 난임가정 중 158쌍의 난임부부가 국내 입양 아동의 70%인 158명을 입양했다. 전체 비출산 난임자 중 0.07%였다.
입양을 깊이 고려하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손에 꼽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 편견'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웃과 사회 속에서 받아야 할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입양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이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더 진전되었다면, 그토록 말 많은 해외입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난임과 관계없이 겨우 189명(2021년 국외입양 수)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입양인식과 문화가 해외입양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다.
지난 4월 7일, 난임으로 입양을 선택한 입양모를 인천 작전동의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2021년 국내입양된 226명 중 한 아이를 입양한 0.07%의 소수점 부모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삶은 어딜 보아도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양이라는 특별한 선택을 했다.
아이를 원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 홍주혜씨 부부 ⓒ 홍주혜 제공
홍주혜(39)씨는 2010년 결혼했다. 남편(박상준, 38)과는 소개로 만나 일 년 연애한 후였다. 두 살 위 언니도 같은 해 결혼했다.
아이를 원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공교롭게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5년을 기다리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는 난임이었다.
원하는데 생기지 않는 데서 오는 갈급한 욕망과 다른 사람들은 원하면 다 되는 임신과 출산이 나만 비껴가는 것 같단 소외감이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일상을 주눅들게 했다.
자연임신에 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5년이 지나자 그녀가 먼저 시술을 제안했다. 처음에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임신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이 환히 밝아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심장이 떨릴 만큼 기뻤다. 일가 친척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기쁨을 나누었다.
8주차, 드디어 아이 심장 소리를 듣는 날이었다. 그런데 심장이 안 뛴다고 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충격과 조바심이 뒤섞인 3일을 보내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 날도 심장은 뛰지 않았다. 아이가 이미 죽었지만 자궁 안에 있는 계류유산이라고 했다.
그게 마치 본인의 어떤 잘못이나 실수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주혜씨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 날 시술을 하고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 날 마음이 무너져 내렸어요."
하지만 한 번으로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다. 두 달 뒤 두 번째 시도를 했다. 실패였다. 처음과 같은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상선 기능 저하까지 생겼다. 잦은 호르몬 처방의 결과였다. 휴식기를 가졌다.
2년 뒤인 2018년 시험관 시술로 세 번째 시도를 했다. 성공은 했는데 자궁외 임신이었다. 아기집까지 본 그날 집에 오자 복통과 하혈을 했다. 이미 두 차례 계류유산의 아픔이 있었는데 이건 충격에 충격을 더한 격이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6개월 후 그녀는 네 번째 시도를 했지만 처음 높게 나왔던 임신 수치가 며칠 뒤에는 떨어져 있었다. 자궁협착이었다. 또 죽은 아이를 떼어내는 시술을 했다. 이번에는 자궁까지 건드려야 했고 전에 없던 다른 약까지 먹어야 했다.
다섯 번째는 많이 망설였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따라 잘한다는 곳으로 병원도 옮겼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과거와 똑같이 8주 만에 계류 유산이 되었다.
▲ 난임 후 입양 사례를 생생하게 고백해 준 홍주혜씨 ⓒ 김지영
그녀는 1인당 평균 7회를 시도한다는 시술을 5회 만에 완전히 포기했다. 그녀는 뱃속 아기의 심장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아기 심장소리는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남편에게 입양 얘기를 꺼냈다.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집안 외동인 남편은 한두 번 더 시술 시도를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주혜씨가 남편에게 한 말은 자연임신에 대한 포기는 아니었다.
"우리 이제 시술은 그만하고 그냥 입양을 먼저할까? 시술은 내 몸이 너무 힘들고 이제는 아닌 것도 같고 그래서 자연임신이 되면 너무 좋지만 지금 그게 안 되는 것도 어떤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남편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지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말로 입양에 동의했다. 그녀라고 입양을 쉽게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몇 가지 고민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입양을 했는데 자연임신으로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혹시 차별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사춘기나 혹은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듣게 되는 사회가 주는 편견의 말이나 심상치 않은 눈초리를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가장 컸어요."
실제 이 두 가지는 거의 대부분 입양부모들이 입양 전 자연스럽게 공통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이다. 편견 가득한 우리의 입양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혜씨는 적극적으로 입양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정보를 찾았고 관련 서적을 사서 읽으면서 먼저 입양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입양가정의 고민과 출산가정이 가진 고민의 성격이나 유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입양가정 이야기를 책에서 보는데 그냥 다 똑같은 사람 사는 얘기였어요. 뭔가 좀 특별한 것을 찾았는데 제가 찾은 여러 가지 정보는 입양가정의 특별함을 찾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입양이 결국 아이 키우는 양육의 문제에 닿아 있었어요."
시술을 완전히 포기한 때가 2019년 12월이었고 남편과 입양을 결심한 건 2020년 2월이었다. 같은 해 결혼하고 난임으로 같이 고생했던 주혜씨 언니는 주혜씨가 입양을 결심한 그 해 출산에 성공했다. 결혼하고 십년 만이었다. 많이 부러웠고 마음 깊은 축하를 보냈다.
2020년 5월 첫 상담을 마친 입양기관에서는 주혜씨 부부가 모든 부분에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그해 11월 입양부모 자격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곧 아이가 올 거라는 신호였다. 20여 가지 이상의 서류를 만드는 데 한 달 정도 걸렸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을 임신하고 태교한다는 생각으로 보냈다. 출산은 아니지만 아이가 곧 온다는 확실한 가정 속에 어떤 아이일지를 상상하고 그 아이를 위한 물건을 사고 아이를 위한 방을 꾸몄다. 날짜는 알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출산은 임박한, 새롭게 들뜬 마음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반응도 같았다. 아이가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기뻐했다. 사실 시아버지는 인공수정 실패하고 시험관을 시도했을 때 입양을 권유했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시술로 인한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름대로 입양에 대해 공부를 하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2021년 2월 중순께였다. 아이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남편에게 온 전화였다. 이미 어떤 아기든 기관에서 전화가 오는 첫 아이를 결정하기로 부부는 약속했었다. 얘기를 전해 들은 순간 처음 인공수정으로 임신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깊은 감격이었다.
10년의 기다림 끝에 만난 딸
▲ 10년만에 얻은 딸이다. 10년을 갈망했던 사진이다. ⓒ 홍주혜씨 제공
임신은 과정이지만 아이는 현실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마침 옆에 함께 있던 친정엄마는 주혜씨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2021년 2월 23일, 첫 선보기를 하는 날이었다. 남편과 둘이 갔다. 10년 넘게 기다려 온 아이였다. 오롯이 둘이 가진 충만함으로 아이를 안고 싶었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온전한 가족이 되는 첫날이었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 내 딸이 된, 태어나 백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녀의 품에 안겼을 때 난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 1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하게 감격스러운 마음이었다.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품에 안은 아이를 쳐다보는 그 눈은 숨길 수 없이 찬란한 기쁨이었다.
일주일 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 아침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다. 몇 번을 깨워야 일어나는 남편이 일곱 시부터 일어나 종종거렸다. 가는 중에 설레던 느낌도 그대로 살아 있다. 집에 오려고 카시트에 태우려는 순간부터 울음을 터트린 아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이제 백일된 어린것이 낮선 사람과 변화된 환경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목욕을 시키면서부터 울음이 잦아들었다. 원래가 순한 아이였다.
아이가 입양되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친부모가 아이를 포기해서인데, 그 구체적인 사유는 나중에 아이가 커서 알고 싶어하면 알 수 있게 정보를 남겨두었다. 지금은 비공개입양이 불가능한 시대로 가족관계 서류에 친양자입양관계가 명시된다. 아이를 입양할 때 기본적인 정보를 받았다. 외가 쪽 유전적 질병, 신장, 성씨와 대강의 사연까지.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입양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다. 감출 수도 없고 감출 생각도 없다.
아이는 이제 네 살이 되었다. 양육은 처음이라 여전히 떨치지 못한 두려움이 있다. 사춘기가 되어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가 공존하는 입양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혹시나 엄마의 사랑을 의심할까 두렵다. 아직 대한민국은 혈연 중심의 가족 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라서 아이가 받을 상처가 여전히 두렵다.
주혜씨 남편은 아이를 매우 깊이 사랑한다. 그걸 감추지 못한다. 한 번은 부부의 난임, 그리고 입양 과정을 모두 지켜본 지인이 그런 남편을 보고 저렇게 예뻐하는 딸을 어떻게 시집 보내려 하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시집 안 보내고 아이 데리고 산에 들어가 살 거라고 농담으로 답했다. 그런데 지인은 '남의 애 데려다 키우면서 그러면 안 된다'라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고,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아직 우리 사회의 일부는 입양가족을 혈연가족만큼의 끈끈함은 결여된, 쉽게 만들어지고 해체되거나 혹은 도덕적 책임이 더 가중되는 인스턴트 가족으로 취급한다.
▲ 아이는 모든 가족들의 축복과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 홍주혜씨 제공
입양에 대한 인식이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다만 지금 바라는 건 아주 약간의 인식개선이다. 한 해 수백 명에 불과한, 낳은 부모로부터 어떤 이유에서든 양육이 포기된 아동이 있다.
한 해 출산되는 아이 수십만 명 중 수백 명에 불과한 아이들이지만 한 아이의 삶을 중심으로는 백 년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소한 이 아이들만큼은 우리 사회에서 포용해 줄 수 있는 아주 작은 품이다.
주혜씨는 낳아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기른 정도 사무치게 깊을 수 있음을 아이를 통해 확신했다. 아이는 이제 주혜씨나 남편에게는 없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원히 두 사람 마음을 압도하는 존재다. 모든 자식을 향한 부모의 그 마음과 같다. 출산이든 혹은 출산이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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