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데 10인용 밥솥을 쓰는 이유
'가성비 인생'은 이제 그만, 개성대로 사는 1인 가구들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예를 들면 오피스텔은 주방이 무지하게 작다. 물이 언제 끓는지도 모를 하이라이트 2개가 전부다. 여분의 아일랜드 테이블은 1칸, 많아도 2칸이다. 사실 밥솥이나 에어 프라이어를 놓으면 채소 하나 썰 공간도 없다. 때문에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된다.
이 외에 화장실이 넓은지 좁은지, 창문 환기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방음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우리는 생활 방식을 맞춘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에드워드 사피어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생각한 만큼을 단어로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는 단어만큼만 사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집의 형태가 자취 형태를 지배한다."
가성비보다 개성을 드러낸 친구들
▲ 1인 가구 집 10인용 밭솥 ⓒ 최은경
충동적으로 10인용 밥솥을 주문했다. 집의 형태에 반항하고 싶었다. 이렇게 큰 밥솥을 산 적은 없었다. 맛있는 밥에 대한 욕망도 있었다.
원래는 필요할 때마다 즉석밥을 사 먹거나, 냄비에 밥을 지어 소분했다. 1인용 미니밥솥 정도는 사봤지만, 이정도 크기의 전문 압력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단가가 안 맞았나 보다. 밥맛이 영 별로였다는 말이다. 설익은 밥을 먹을 때마다 억울했다. 1인 가구는 입도 아닌가.
언제까지 맛보다 간편함을 추구해야 하는가. 합리적인 자취생이라며 위안했던 여태까지의 '가성비 인생'은 전혀 효율적이지 않았다. '살림 늘어나면 다 짐이다'는 생각으로 자제해왔던 모든 가구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언제든 갖다 버릴 수 있는 싸구려 용수철 침대도, 접이식 탁자도, 청소기 대신 쓴 쓰레받기도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사이, '췩' 하는 강력한 소리가 밥솥에서 난다. 뚜껑을 여는 순간, 자르르한 윤기가 도는 쌀밥이 나를 반긴다. 마음까지 배부르다. 많은 양을 보니 갑자기 나눠 먹고 싶어졌다. 없는 살림에 미뤘던 지인들을 초대한다. 집에 활력이 돈다.
처음엔 친구들이 밥솥을 비웃을 줄 알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딱히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건 난 혼자서 이 밥을 다 먹어야 하고, 전기요금은 그만큼 더 나올 것이고, 공간은 좁아진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자신의 이상한 소비행동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원룸인데 킹사이즈 침대를 샀단다. 병원에 가니 허리 디스크가 터지기 직전이라 해서 큰 맘 먹고 주문했다는 친구. 비록 방 안에 침대가 꽉 찼지만 이제 좀 살겠다는 말에 주위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또 한 명이 고해성사하듯 입을 연다. 자긴 홈시어터 스피커를 샀다고 한다. 영화 보는 게 너무 좋은데 매번 영화관 가기는 좀 그래서, 집에서 자유롭게 보고 싶어 90만원 짜리를 샀다고 한다. 오히려 방이 좁으니까 소리가 꽉꽉 들어차서 천국이다. 침대에서 보니까 리클라이너 좌석이 전혀 부럽지 않다고 자랑이다. 대단하다. 대단해.
▲ 기사 내용과 무관한 사진입니다. ⓒ Unsplash
한 친구는 우리 얘기는 안 듣고 휴대폰만 본다. 갑자기 우리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모두 '헉' 소리가 튀어나온다. 방 한쪽이 몽땅 화분이다. 벽에 걸린 덩굴은 푸미라, 옆에 공룡발처럼 생긴 식물은 새로 들여온 필로덴드론, 팝콘처럼 잎사귀가 작고 귀여운 것은 오렌지쟈스민…. 이게 식물원인지, 자취방인지. 왠지 친구가 말할 때마다 음이온이 퍼지는 느낌이 든다.
그 밖에도 애견카페를 방불케 하는 반려동물 위주의 인테리어를 한 친구, PC방처럼 RGB 빛이 번쩍번쩍한 게이밍 컴퓨터로 도배한 친구 등 모두 자신의 '비합리적인 소비'를 털어놓기 바쁘다. 이상한 일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개성이 살아난다. 모두 똑같아 보였던 단칸방이 진정 나만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틀은 바꿀 수 없지만 내용은 가능하다
우리는 아직 베짱이까지 될 용기는 없는 개미다. 뉴스에서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저축도 직장도 소용없다 해도 모든 것을 놔 버리기엔 걱정이 많은 개미다. 우리가 정한 방법은 개미굴을 바꾸는 것이다.
여왕개미를 따르고, 그저 일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효율적 인테리어'를 바꿔버리는 것. 개성 있는 개미가 되는 것. 되려 이것이 고여버린 우물을 다시 맑게 할지도 모른다. 왠지 "1인 가구에게 딱"이라는 말은 "네 수준엔 그 정도면 만족하라"는 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1인 가구도 고상한 취미가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자.
인테리어를 새로 바꾸고, 나의 밥친구인 <무한도전>을 보는 데 웬일로 유시민 작가가 나온다. "아끼는 게 능사냐"는 박명수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쓸 수 있으면 쓰는 게 좋다고 봐요. 오늘이 내일을 위한 디딤돌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순간 답답함을 느낀다. 사피어-워프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다. 자유롭고 끝없을 줄 알았던 사유가 한순간 '언어'라는 틀에 갇혀버렸다. 이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본인의 세계가 거대한 촬영장임을 깨달았을 때와 같은 충격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틀'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안의 내용물이다. 트루먼의 세상이 바뀐 것은, 세트장을 깨부셨을 때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이상행동'을 했을 때부터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면, 어떤 언어를 쓸지는 내 몫이다.
'방'도 마찬가지다. 인테리어가 공간의 정체성을 정한다. 공부방도 파티룸도 똑같은 원룸이다. 그 안에 문제집이 쌓여있는지, 노래방 기계가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취방'도 나 하기 나름이다. 내 결정에 따라 이곳은 감옥이 될 수도, 둥지가 될 수도 있다. 원룸이라고 마음까지 작을 필요 있겠는가.
과감히 틀을 벗어나 내용물을 채워보자. 원룸에 침대 하나 크게 들어찬들, 벽면 한 쪽을 모두 채우는 빔프로젝트가 있다 한들 큰일 나겠는가. 세트장을 깨부순 트루먼도 있는데. 세상의 모든 '비합리적인' 자취생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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