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드는 선물 받고 싶으면 무조건 보세요
친구의 셔츠를 만들면서 알게 된 것... 원하는 걸 분명히 알려주는 사람이 되자는 결심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원하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면
▲ 친구에게 선물한 셔츠 ⓒ 최혜선
봄에 입어야 할 가족들의 옷 만들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주말에 친구와 그림 전시를 보러 나갔다가 삼청동에서 식사를 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카페를 찾아 갈 때였다. '나는 이런 질감의 셔츠가 좋아'라며 길가 옷집에 걸려있는 부들부들한 재질의 천으로 만들어진 셔츠를 가리켰다. 친구가 생각하고 있는 흰색 셔츠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친구가 말한 것 같은 느낌의 천이 마침 있었다. 몇 년 전에 여리여리해 보이는 블라우스나 셔츠 만들려고 사둔 것이었다. 그런데 천을 주문해서 손에 받아드는 순간 재단을 할 때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같이 그려졌다.
차르르한 원단을 마루 바닥에 펴 놓고 그 위에 패턴을 올려 초자고로 시접을 그리는 순간 천은 이리 저리 휘어질 거고 기껏 올을 바로잡아 가위질을 시작하면 서걱서걱 가윗날에 이리 미끌 저리 미끌 움직여서 재단을 하다 뒷목을 잡게 될 게 뻔했다.
그 천은 그렇게 손도 대지 못하고 원단 산에 깔린 채로 몇 년이 흘렀다. 그 세월이 헛되게 흐른 것만은 아니어서 나도 나름 노하우가 생겼다. 이렇게 찰랑거리는 원단을 재단할 때는 바닥에 담요 같은 걸 깔아놓고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귀동냥한 지식을 써먹을 때가 왔다.
▲ 찰랑찰랑한 천을 재단할 때는 담요 같은 걸 깔아놓으면 좋다. ⓒ 최혜선
까다로운 원단을 재단할 마음을 먹고 이번주에 셔츠를 만들 거라고 친구에게 미리 말을 했다. 친구는 '내가 생각보다 사이즈가 크다, 너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직장 다니는 친구가 주말의 시간을 쪼개어 만드는 옷이니 사이즈 선정을 잘못해서 못 입으면 서로 아쉬울 테니 잘 입고 싶어서 그런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역시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입는 사이즈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알아서 잘 해주겠지 하고 내버려두지 않은 친구 덕분에 주말 동안 나의 수고는, 만든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만족스러운 셔츠라는 형태로 보상을 받았다.
노래 가사일 때만 아름다운 '알잘딱깔센'
몇 년 전 라디오에서 얼핏 들은 설문조사에서, 주는 사람이 알아서 고른 선물과 받는 사람이 달라고 한 아이템 중 어느 쪽이 받는 사람의 만족도가 높은지를 맞춰보라는 퀴즈가 나왔다.
답은 단연 받는 사람이 받고 싶어한 선물을 주었을 때였다. 선물을 끝까지 비밀에 부치고 "서프라이즈~" 하면서 내미는 것을 더 좋아할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무엇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옷을 만들어서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특히나 더, 옷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괜찮을지부터 물어보았다. 다들 거절하거나 다들 좋다고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좋다고 하면 내가 만들 수 있는 후보군들을 몇 가지 주고 고르게 한다. 고른 후에는 신체적인 특성이나 희망사항을 듣는다. 평소 옷을 사입을 때 팔이 긴지 짧은지, 옷의 길이는 엉덩이를 가리는 게 편한지 반쯤만 내려오는 게 편한지.
실제로 물어서 나오는 대답은 내가 그 사람을 평소 봐온 인상으로 어림짐작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때도 많았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알잘딱깔센'은 신뢰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의 줄임말인 이 단어는 말을 안 해도 내 맘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이다. 누군가가 일을 잘 했다고 칭찬할 때 쓰이기보다는 구체적인 지침은 없이 뭔가를 요구할 때나 비난할 때 쓰이기 쉽다. '디자인은 알잘딱깔센 해주시구요, 주부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도 알잘딱깔센이 안 되니?' 같은 식으로 말이다.
가족을 대할 때도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알잘딱깔센'을 기대하면 결과가 좋지 못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눈빛만 보아도 안다는 건 노래 가사일 때만 아름다운 말이다. 제일 힘든 상사 유형 중 하나가 구체적인 업무 지시는 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얘기만 하다가 막상 일을 해가면 "내 말은 이게 아니잖아!"라며 버럭 하는 사람인 건 다 이유가 있다.
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선물을 할 때 제일 어려운 사람은 뭘 받고 싶은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뭘 좋아하는지 자기도 모르거나 뭔가를 갖고 싶다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이 힘든 사람일 수도 있다. 어릴 때 수줍음이 많았던 내가 딱 그랬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가끔 방학이나 주말 행사에 동원되는 날 학교에 나를 데려가셨다. 보통은 동료 선생님의 딸이니 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 있으면 내게 선뜻 내주셨고 그걸 수줍게 감사히 받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다. 그 선생님은 기념품을 받고 싶으면 '주세요'라고 말을 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선생님이 괴팍하다고 생각했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뭔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치고 싶으셨나보다 싶다. 30년의 세월을 건너 이제야 받들 수 있게 된 가르침이다.
가정의 달이다. 이래저래 선물을 주고받을 일이 많다. 주는 사람도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줄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받는 사람도 그 범위 안에서 받고 싶은 것을 말하고 조율해서 서로 기분 좋은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한 스무고개의 수고를 덜어준 친구처럼 나도 선물 주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자기가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그걸 표현하는걸 주저하지 않는 쉬운 사람이.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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