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안심시킨 한 방, '우린 민주당과 다르지 않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민주당을 이용한 박정희의 굴욕외교
▲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정권의 굴욕외교와 박정희 정권의 굴욕외교는 기본적으로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당연히 있다. 박 정권 때가 파급력이 훨씬 컸다는 점도 다르지만, 일본의 신뢰를 얻는 방식도 다소 다르다.
윤 정권은 '우리는 민주당 정권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런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에 다가서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직후의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반대였다. 박 정권의 굴욕외교는 전체적으로 보면 윤 정권과 비슷했지만, 초기에 일본의 환심을 사는 단계에서는 윤 정권과 판이했다. 박 정권은 '우리는 민주당 정권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했던 것은 장면 정권이 일본 정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본과 가까웠던 민주당 정부
하지만, 4·19 당시의 민주당은 A단계만 거친 뒤라, 한민당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웠다. 4·19의 최대 수혜자인 장면 총리 역시 군국주의전쟁 협력기관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간사 및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지낸 친일파였다.
여기에 더해, 4·19 당시에는 유럽의 경제적 자주성 증대와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그룹의 발언권 증대 등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우방인 한·일을 삼각동맹으로 엮고 이를 발판으로 세계적 영향력을 재정비하려는 미국의 욕구가 팽배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이 한·일 접촉을 부추겼기 때문에, 장면 정권은 국민들의 눈치를 덜 보면서 대일 유화적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런 입장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문제에 즉각 반영됐다. 장면 내각은 일본에 대해 각종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협력을 요청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국교 정상화 조건으로 경제협력의 비중도 높이 평가했으므로, 일본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수월한 상대였다.
그 같은 분위기가 1961년 1월 14일 민의원(하원) 대정부질문에도 나타났다. 이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대일 유화정책을 비난'은 "야당 측은 일본과의 국교가 되기 전에 일본의 경제협력을 얻으려는 듯한 장 내각의 태도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정부의 유화적인 대일정책을 비난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야당은 장면 내각이 일본 경제시찰단의 방문을 허용한 것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장면 내각이 그처럼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한·일 양국 내에서는 한일관계가 조만간 급반전하리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5·16 쿠데타 전날인 5월 15일 발행된 <동아일보> 1면 좌상단 기사는 "한일 국교정상화의 앞길은 갑자기 훤히 열리는 것 같다"며 "지금 서울과 동경에서는 국교정상화의 분위기가 가속도적으로 무르익어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속에서 일본 정부는 양국 국민감정이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인식하면서도 국교정상화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같은 날 보도된 <조선일보> 1면 중간 기사는 "일 외무성은 10월경 한국과의 국교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이곳 산경 신문이 15일 보도하였다"고 전했다. 가을을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산케이신문>에 보도됐을 정도로 일본 정부는 친일파 장면을 우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쿠데타가 발발했으므로 일본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17일 자 <동아일보> '한일 예비회담 중단'은 머지않아 외무대신이 될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정부 대변인)이 "이승만 정권 붕괴에 뒤이은 행정부 하에서 남한의 사태가 안정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 소식에 놀랐다"고 발언한 사실을 전했다. 이 기사 제목처럼 장면 내각이 진행하던 한일회담도 쿠데타로 인해 중단됐다.
쿠데타 당일인 16일에 발행된 <조선일보> '일(日) 육사 출신 강직한 성품'에 보도된 것처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아닌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군의 실질적 지도자이며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사실이 5월 16일 당일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일본 정부를 안심시키기 힘들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박정희보다는 장면 총리처럼 널리 알려져 예측 가능한 친일파를 상대하기가 더 용이했다.
또 실질적 지도자일 뿐 공식 지도자가 아니므로, 박정희가 친일 성향을 드러낸다 해도 그것이 군사정권에 어느 정도 파급력을 끼칠지도 당시로서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상황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안 가 일본 정부는 희망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5월 20일 자 <조선일보> '한일회담에 영향 없을 듯'에 따르면, 고사카 젠타로 외무대신은 19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사혁명 지도자들이 대일 우호관계의 희망을 피력한 것으로 안다고 언명"했다며 희망을 드러냈다.
일본의 분위기가 바뀐 데는 미국의 태도도 한몫했다. 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오히라 외무대신은 미국이 불개입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내각관방실에 보고했다. 쿠데타를 용인하는 미국의 입장 역시 일본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예나 지금이나 '성의 표시'
▲ 1961년 11월 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 상태에서 결정적 한 방이 된 것은 군사정권 자신의 표명이었다. 자신들이 민주당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공식 표방이 일본을 안심시키는 기능을 했다.
쿠데타 엿새 뒤인 22일 군사정권의 김홍일 외무부 장관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전 장(張) 정권과 다름없다"는 말로 민주당 정권과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은 가장 인접 국가이며 관계가 깊은 나라"라며 "일본과 국교 회복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말로 일본을 안심시켰다.
그날 군사정권은 2022년 5월 10일 이후의 한국인들이 익숙해지게 될 표현도 사용했다. 일본을 상대로 성의 표시를 운운하는 말이 그것이다. 김홍일 장관은 "형식적으로가 아니고 우리도 성의 표시를 하고 있으니 일본도 먼저 성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결국에는 일본의 성의 표시를 받아내기는커녕 윤석열 정권처럼 홀로 성의 표시를 하는 데 그쳤지만, 쿠데타 직후의 군사정권은 이처럼 성의 표시를 받아낼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도 먼저 성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대목보다는 "우리도 성의 표시를 하고 있으니"라는 대목에 좀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민주당 정권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 표명과 더불어 이런 것도 신호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정권이 반공주의를 표방해 대북 적대적 자세를 명확히 한 것 역시 그런 신호가 됐음은 물론이다.
기자회견 다음 날인 23일 발행된 <조선일보> '일(日)서 환영 표시'에 따르면, 일본은 군사정권이 민주당 정권과의 연속성을 강조한 부분을 확실한 사인으로 이해했다. 이 기사는 김홍일 장관의 발언 중에서 "일본과의 우호 관계가 필요함은 장면 정권과 일치하며 예비회담은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재개될 것"이라는 대목에 일본이 주목했다고 보도했다.
박 정권이 사인을 보내자 일본도 적극적으로 '윙크'하기 시작했다. 23일 일본 외무대신은 군사정권을 합법 정부로 생각한다며 지지 입장을 표시했다. 24일 자 <조선일보> '혁명정부를 지지'에 따르면, 아베 신조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같은 우파 지도자들은 "적극적 지지"까지 표명했다.
민주당 정권은 지나치게 대일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가운데서 일본을 상대로 청구권도 요구하고 경제협력도 요구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반면 박 정권은 '청구권은 필요 없다'라며 선제적 양보를 하면서 경제협력에만 치중했다.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으로 체결된 청구권 협정은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협력을 받기로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박 정권은 결국에는 민주당과 크게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쿠데타 직후에 일본의 신뢰를 얻는 과정에서는 민주당과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민주당 정권을 전복했으면서도 대일정책에서만큼은 민주당을 발판으로 일본의 환심을 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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