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한 싸움, 그들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5.18 구술 기록]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광주항쟁에 대해 말하다 ②
▲ 2006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인터뷰하고 있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기사 "5월 20일 광주, 젊은이들이 죽어 있었다... 관통상이었다" 에서 이어집니다.)
'5월 광주'를 전세계에 알린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2006년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의 구술 채록 사업을 통해 자신의 활동 전반에 대한 영상 기록을 남겼다. 이 영상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슴 졸이며 케이크 통에 필름 넣고 공항행... "결혼식 초대받은 모습으로"
저는 촬영한 자료인 60미터 필름을 원래의 테이프 보관통에 인식 번호를 붙여서 다시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필름으로 보이도록 하려 한 것이었지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필름을 셔츠 밑에 숨겼습니다. 모양이 좀 이상했지만,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도 넣었어요.
저는 한 군인이 우리 차 트렁크를 조사하고 박스도 뒤지는 사진도 갖고 있어요. 거기엔 촬영한 필름들도 들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군인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조선호텔에서 잤어요. 그날 서울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또한 필름을 가지고 공항을 뚫고 나가는 것이 겁이 났어요.
그런데 저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첫째로 자료를 어떻게 했는가의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의 동료인 위르겐 버트람(Juergen Bertram)이 1980년 9월 17일 김대중 사형선고에 대해 보도하면서 '케이크 통 속의 너무나 중요한 자료'라는 기사를 썼지요.
제가 그때 영상 편집을 같이 했습니다. 그 보도에는 제가 찍은 영상이 들어있어요. 저는 영상 자료를 케이크 통에 넣었지요. 강력한 뢴트겐 촬영이 영상 자료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아주 재밌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당시 저는 마음이 몹시 떨렸어요.
또한 저는 선물 포장지를 준비했는데, 한쪽은 다채로운 색깔들과 은빛이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오늘날에서도 결혼 선물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빨강, 초록, 노란색 줄무늬로 어우러진 색동 포장지였습니다. 그것은 알루미늄 포장지였는데 한 번 더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소에 비해 안전요원이나 공항 직원들은 느슨했고, 직원들이 충분히 배치돼 있지도 않아 검사가 엄격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거의 마지막 순간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뛰어들어간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선물은 엑스레이 스캐너 검사를 통과하지 않았어요. 선물이 눈에 띄게 화려해서 의심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결혼식에 초대받은 정장 차림의 직장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필름만 가져다주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3시간 뒤에 저는 도쿄에 도착했고, 동료들이 저를 환영했고, 저는 그들에게 이 과자 상자를 선물로 넘겨줬지요. 그 자료는 즉시 플라스틱 자루에 담겨 주소를 적은 후 승무원을 통해 독일로 이송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송신기를 통해 위성으로 자료를 브뤼셀,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에 있는 뉴스 센터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유로비전에 송출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방영됐습니다. 출처는 ARD Studio Tokio라는 이름으로요. 그리고 심지어 일본으로까지 보내졌습니다. 그건 우리가 도쿄에 있는 NHK와 협력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7) 5월 23일 두 번째 광주 방문 :
"도청 광장의 대규모 시위... 매우 인상적이었다"
▲ [5.18 구술 영상] 위르겐 힌츠페터가 증언한 '5월 23일 두 번째 광주 방문'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저는 5월 22일 목요일에, 서울에서 도쿄로 갔다가 동일한 비행기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요. 저는 이날 저녁 서울에 있었고 5월 23일에 광주로 갔어요.
거기서 우리는 차단초소를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가졌어요. <코리아 헤럴드> 신문에 외국인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기사가 있었어요. 저는 이것을 오려서 안쪽 호주머니에 넣어뒀어요. 그것이 신문 머리기사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도움이 되리라 믿었어요.
군대의 첫 번째 검문에서 저는 기사를 보여주고 우리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 물건들이 모두 광주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광주로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첫 번째 때처럼 고속도로가 아니라 논이 있는 들길을 안내받아 광주에 들어갔어요.
5월 23일 광주에 있었고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5월 24일 토요일에 저는 서울로 돌아갔어요.
도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이 연설을 하고 애국가 제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인싱적이었습니다. 저는 YMCA 건물 옥상으로 가서 그곳으로부터 필름을 찍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행히 여러 소절이 불렸습니다. 애국가 제창 말이에요.
그 뒤 저는 오전에 다시 시신들이 안치된 체육관(유도장)에서 촬영을 했어요. 거기서 관들이 담긴 영상이 만들어졌어요. 관들이 몇 개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서 저는 움직이는 카메라로 촬영을 했는데 많은 필름이 소요됐어요. 그러나 저는 이 두 번째 방문에는 많은 필름을 갖고 갔어요. 그리고 관마다 하나씩 촬영했고, 얼마나 시신들이 많았는지 알 수 있도록 관의 번호도 볼 수 있게 촬영했습니다.
(8) 5월 27일 이후 세 번째 광주 방문 :
"적십자와 함께 다시 광주로... 운전수는 다시 김사복씨"
(기록자 한운석: 세 번째 방문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것이 언제였고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28일이었습니다. 아주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들어간 적십자 트럭들과 함께 다시 광주로 들어갔어요. 저는 그래서 오래 지체되지 않고 자동차로 들어갔어요. 운전수는 다시 김사복씨였죠.
우리는 직접 도청으로 갔어요. 거기서 저는 군대의 철거 작업을 봤어요. 군대는 모든 출입구들을 청소하고 소독을 하고 몇 군데 남아있던 혈흔을 제거했어요. 이 모든 것을 저는 촬영했어요. 거기서 소독약으로 커다란 연기를 뿜어대던 차량 한 대를 봤어요.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학생들이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출구에서 군부대의 통제를 받으며 무릎 꿇고 기어야 했던 광경을 봤습니다. 저는 시신들이 안치돼 있던 영안실도 쳐다봤는데 다 치워져 있었어요. 그밖에도 저는 모래주머니들을 봤는데, 그것은 도청 앞에 세워진 군대의 보호 장벽이었어요. 건물 앞에는 열기 속에 기관총과 헬멧을 가진 초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벽을 이용했고 사진도 찍고 그 위에서 필름도 갈아 끼웠어요.
(9) 광주항쟁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과 순간 :
"끔찍한 장면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불타는 시신, 울부짖는 가족"
▲ 광주항쟁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과 순간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우리를 트럭에 태워서 시내로 데려다준 학생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그들은 분명히 봉기 동안 목숨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시민위원회가 군대와 통화했던 날의 그 불확실성. 군대가 지금 밀고 들어올지, 들어와서 시민군을 쓸어버릴지에 대한 불확실성.
저는 제 스스로의 신변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제가 일을 할 때는, 즉 촬영을 하고 조직을 할 때 저는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녁에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아마도 오늘 밤은 아니겠지.'
그건 대부분 어두워진 밤중이나 새벽에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이틀 뒤였죠. 저는 이 끔찍한 장면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병원과 시신들이 놓여있던 홀이 화염에 휩싸였고 관 옆에 서서 절망적으로 울부짖던 가족들을 말이에요.
(10) 광주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김대중 :
"독재 대신 민주주의... 5.18은 한국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기를 원했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원했어요.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이었어요. 민주주의 역시 이상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독재 대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은 아무튼 이상적인 목표였어요.
그것은 한국에서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았던 중국의 천안문 사건과 비교해서, 이 사건은 모든 학생 데모들을 거쳐서 이런 과정의 정점이자 전환점이었고, 결국 야당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만들었지요.
저는 김대중이 두 번 대통령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먼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고, 그 다음에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지요. 사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김대중을 더 선호했습니다.
▲ 광주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김대중에 대한 평가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11) 사후에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한 이유 :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젊은이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저는 매우 아팠어요. 그러나 얼마나 심한지 알지 못했어요. 저는 그때 상태가 안 좋았는데 실제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때에야 그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계단 하나도 올라갈 수 없었고, 몇 주 동안 침대에 묶여 있었어요. 아내인 에델트라우트는 킬 대학 병원의 내 곁에 있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묻혀있는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 말이에요. 근본적으로 저는 거기서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젊은이들, 그리고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했어요.
저는 이걸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고 이 생각은 무언가 저의 잠재의식 속에 뿌리를 내렸어요. 저는 작년(2005년)에 광주에 있었고, 재단에서 그걸 위해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수행했어요. 저는 살아있을 때 제 신체에서 채집한 유물을 거기 뒀어요. 그래서 저의 일부가 함께 묻힐 수 있게 됐고, 그럼으로써 저도 그곳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어요. (2016년 위르겐 힌츠페터의 유가족은 그의 유품을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했다. - 편집자 주)
* 이번에 공개한 11개의 위르겐 힌츠페터 구술 동영상 전체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페이지 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EsG52elnb1uUBGvPeBfXmX
▲ 2016년 5월 16일 독일 언론인 고 위르겐 힌츠페터씨의 배우자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가 광주 북구 망월동 5.18 구묘역에서 고인의 추모비를 쓰다듬고 있다. ⓒ 연합뉴스
덧붙이는 글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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