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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남자에게 우선권, 이거 하나 고치는데 15년이라니

제사주재권 대법원 판결로 돌아본 '남성우선주의' 잔재들

등록|2023.05.20 19:33 수정|2023.05.20 19:33

▲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 연합뉴스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복 남동생이 아버지의 유해를 납골당에 봉안했다.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이복 남동생의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와 우리의 마음은 무너졌다. 어머니와 혼인기간 중 아버지가 다른 여성으로부터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다시 밀려오는 듯하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혼인 생활 중 두 딸을 둔 A씨가 다른 여성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A씨 사망 후 혼외자인 아들이 일방적으로 고인의 유해를 납골당에 봉안한 것이다. 딸들과 배우자는 '고인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소송했지만 1~2심 모두 패소했다. 조상의 제사는 무조건 남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1일, 이 사건 상고심에서 기존 대법원 판례가 15년 만에 깨졌다.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에도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장남에게 있었다. 2008년 대법원은 공동상속인들끼리 협의해 제사 주재자를 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장남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까지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성별 관계없이 연장자가 우선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달라진 시대상과 사회의 성평등 인식을 반영한 대법원의 이번 판례변경은 우리 사회에 만연히 유지되어 오고 있는 여러 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제사주재권 이외에도 아직 우리 민법에는 남성우선주의의 잔재가 남겨져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성우선주의'다. 민법 781조는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아빠 박기용과 엄마 이수연은 너에게 아빠 성이 아닌 엄마 성을 주기로 결정했어. 그래서 네 이름은 '이제나'란다... 네가 커서 이 글을 읽고 이해할 때에는 엄마 성을 따른 것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 이수연, 딸에게 아빠 성이 아닌 엄마 성을 물려주며 https://omn.kr/1mez2

2020년 딸에게 아빠 성이 아닌 엄마 성을 물려주며 엄마 이수연이 작성한 글에는 엄마 성을 따르는 일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이길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지만 아직도 엄마 성을 따르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민법상 ​​​예외적으로 혼인신고 시 엄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하면 엄마의 성을 쓸 수 있도록 했지만 혼인신고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면 결국 이혼 후 다시 혼인신고를 하거나 법원에 성·본 변경 신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2019년 9월 정부가 발표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내용 중 '자녀의 성과 본'에 대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녀의 출생신고 시 부모가 협의하여 자녀의 성과 본을 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응답자의 70.4%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성우선주의 폐지안이 2021년 3월 8일 국회에 발의되기도 했고, 시민단체 활동가인 이설아 장동현 부부의 헌법소원제기도 있었지만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헌법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 지난 6일 영국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 출전한 토트넘 핫스퍼의 손흥민에게 인종차별적인 제스처를 한 관중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토트넘 구단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한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 토트넘 핫스퍼


차별의 영역은 성별만이 아니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평등권을 규정한 헌법 조항의 주어마저 '국민'이어서일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국민' 우선주의는 아주 확고부동하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선수가 영국에서 인종차별적 행위를 당했다는 뉴스를 듣고 분노하면서도 국내 거주 외국인 200만 명이 당하고 있는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인종차별적 동작을 하는 관중에게 매우 엄중한 처벌과 제재를 가하는 영국과 달리 우리는 인종차별을 처벌하고 제재하는 규정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니네 나라로 가라"고 소리치고, 히잡을 쓰고 있는 외국인에게 "테러리스트"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뉴스거리가 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외국인 혐오는 공기처럼 퍼져있다. 혐오표현보다 심각한 것은 '국민' 우선주의에 기반을 둔 외국인노동자 제도다.

"외국인고용법 제1조(목적) 이 법은 외국인근로자를 체계적으로 도입·관리함으로써 원활한 인력수급 및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이른바 3D 업종의 구인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4년 10개월 근무하는 동안 원칙적으로 사업장을 옮길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엄동설한 난방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열악한 기숙사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이주노동자, 4년 10개월 일하고도 3년치 급여를 지급받지 못한 이주노동자 등 비극적인 사건 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6조(균등한 처우)는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성(性)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고, 국적·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지만, 내국인 노동자와 달리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기지 못하도록 한 차별은 두 번이나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건재하다.

헌법 전문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딱 두 가지로 요약한다.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

그러나 여성가족부가 작년 9월 6일 발표한 '상장법인의 성별 임금격차 조사결과'를 보면 현실은 다르다. 2021년 성별 임금 현황을 공시한 2364개 상장법인의 성별임금 격차를 조사한 결과 상장법인 전체의 남성 1인당 평균임금은 9413만 원, 여성 1인당 평균임금은 5829만원이었다.

상장법인 근로자 1인당 평균임금의 성별격차는 무려 38.1%였다. 남성과 여성의 상장법인 평균 연간급여(평균임금) 차이가 3584만 원이니 월급으로 따지면 매월 300만 원 수준이다.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 아직도 남녀차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남성 우선주의의 잔재로 남아 있는 '부성우선주의' 같은 법들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라는 헌법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이미 이웃으로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기지 못하도록 막아 사업주에게 착취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있는 외국인고용법의 독소조항을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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