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심문 기록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유
[김종성의 히,스토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 유네스코가 1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2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승인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인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 문화재청
동학농민혁명이 4·19혁명과 더불어 인류의 공통 유산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4·19혁명 기록물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문화재청이 지난달 14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4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제14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와 11일 열린 임시회에서 두 기록물에 대한 등재권고 판정이 나왔다. 그 권고에 따라 집행이사회의 최종 결정이 나오게 됐다.
또 동학군이 관할 구역에 설치한 집강소에 대해서도 세련된 해석을 내놓았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민·관 협력(거버넌스)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라며 "이는 19세기 당시 전 세계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었던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동학이 민주주의로 가는 발판을 제공했다거나 외국의 반제국주의·민족주의·근대주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서술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동학은 현대와 무관한 과거 역사의 영역이 아닌 지금도 살아 숨쉬는 현실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 민주주의나 반제국주의·민족주의 등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성을 띠는 과제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운동치고 동학의 반외세·반봉건 정신과 이어지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동학군의 열망은 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나 집회의 구호들에도 묻어 있다.
동학의 지향점을 살펴보면, 그것이 우리 시대 대중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성을 띠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집강소에서 추진된 폐정개혁안 중에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불공정한 토지 제도로 인해 시달린 이들은 동학농민군뿐만이 아니다. 토지나 대지 혹은 건물로 대표되는 부동산 제도의 공정성은 우리 시대 사람들도 여전히 추구하는 바다.
폐정개혁안에는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의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같은 대목도 있었다. 노비제도, 과부 재혼 억압, 양반의 위세 등은 1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점들이었다. 우리의 고조부쯤 되는 조상들에게는 꽤 익숙한 사회 병폐였다.
만약 동학이 그런 병폐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고조부 밑의 조상들도 그런 고통을 많이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학군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았다면, 그 병폐와 우리 세대의 시간적 거리는 좀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우리 시대와 맞닿아 있는 동학군의 반외세 슬로건
동학군이 내건 반외세 슬로건 역시 우리 시대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그들이 맞서 싸웠던 외세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군이 동학군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며 인천에 불법 상륙해 경복궁을 점령한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이후로 동학군은 대일 굴욕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했다. 이 희생이 2023년 지금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학혁명은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졌지만, 그것은 15년 뒤인 1919년에 3·1운동으로 되살았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은 3·1운동 이듬해에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동학혁명을 평민혁명으로 규정한 뒤 이것이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이 책 제3장에서 "동학당은 호미와 곰방메와 가시나무 창을 들고 밭고랑에서 분연히 일어나서 우리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교전한 지 9개월 만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라고 서술한다. 흙덩이를 덮는 데 쓰는 곰방메 같은 농기구를 들고 9개월간이나 일본군과 싸웠던 것이다.
희생자도 매우 많았다. 박은식은 "사망자가 30여 만 명으로 유혈의 참상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라고 한 뒤 "대저 그들의 힘은 양반의 압제와 관리의 탐학에 대해 격분하여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평민혁명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동학혁명 주체세력의 한계와 역량 부족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이 민중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소위 독립을 우리 자력으로 얻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에 의해 부수어지고 말 것"이라며 동학이 민중의 자력에 기초했음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것이 오늘날 천도교가 다시 피맺힌 투쟁을 재연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3·1운동 시기에 쓴 이 책에서 천도교 3·1운동이 동학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박은식은 제25장에서는 일제가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고자 대종교·기독교·불교·천도교를 탄압한 사실을 설명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동학이 천도교로 거듭난 일을 설명한 뒤 "슬프다! 저들은 각 종교에 대해 강제로 속박과 압박을 시행하였다"라고 탄식했다.
그런 다음,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신은 이로 인해 줄어들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나아가 1919년 3월에 이르러 마침내 전 지구를 진동시키는 대활동을 하게 되었다"라고 평했다. 동학이 천도교로 거듭나 3·1운동에 영향을 주게 된 역사적 맥락을 그렇게 서술했던 것이다.
3·1운동과 연결되는 동학농민혁명
▲ 유네스코가 1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2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승인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인 전봉준 공초. ⓒ 문화재청
2019년에 <한국학 논총> 제51집에 수록된 장석흥 국민대 교수의 논문 '3·1운동의 역사적 원류와 계승'은 일반 대중이 3·1운동을 주도하게 된 배경을 동학혁명에서 찾았다. 논문은 "3·1운동의 중심에는 평민이 있었다"라고 한 뒤 "평민이 3·1운동의 전면에 나서기까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의병과 개화개혁운동 등 민족혁명을 통해 축적된 민족 역량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평한다.
동학과 3·1운동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좀 더 구체적인 자료는 인적 구성의 유사성이다. 1993년에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제7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김소진의 논문 '3·1독립선언서 33인에 대한 인적 분석>에 따르면, 3·1운동 민족대표 중에서 권병덕·나용환·나인협·손병희·이종훈·임예환·홍기조·홍병기 8인은 동학혁명에 명확히 가담했다.
한편, 박준승은 1891년에 입교했으므로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여덟 혹은 아홉이 동학혁명 참가자라면, 이 혁명이 3·1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9년에 <전북사학> 제56호에 실린 유바다 고려대 교수의 논문 '동학농민혁명의 3·1운동으로의 계승'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3646명과 3·1운동 관련 독립유공자 4948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를 제시하면서, 두 운동에 다 참여한 사람들은 백범 김구를 포함해 21명이라고 설명한다.
논문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대다수가 혁명 당시 처형당했음을 생각해볼 때, 21명은 결코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라며 "오히려 손병희·김구 등이 3·1운동 및 3·1운동이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체가 된 점에서 동학농민혁명-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인적 계승은 더욱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3·1운동은 역사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현실의 영역에 많이 걸쳐 있다. 헌법 전문도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여전히 살아 있는 3·1운동과 연결되는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두 운동의 캐치프레이즈뿐 아니라 인적 구성도 고도의 유사성을 띠었다. 이는 동학혁명이 3·1운동을 매개로 지금의 한국과 긴밀히 연계돼 있음을 보여준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정은 동학혁명이 지금의 한국에 미치는 생생한 영향력을 되돌아볼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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