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바닥의 취준생에게 수영을 권합니다
옷장에서 수영 용품만 두 박스... 내 숨통을 틔어준 수영의 매력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실내수영복, 수모, 수경은 기본이고 스노클링 고글, 스노클링 마스크, 일주일은 돌아가면서 입어도 될 래시가드들, 각종 튜브, 방수팩과 방수 카메라까지. 몇 년 전 수영장에서 잃어버린 오리발까지 있었다면 세 박스가 될 뻔했다.
취준생과 수영
그렇게 어렸을 적 배워둔 수영은 의외로 10여 년이 흐른 20대 중반 취업 준비생 시절 나에게 많은 힘을 준 친구가 되었다. 매일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고, 또 새로운 '자소설'을 쓰고, 면접에서 낙방하던 질풍노도의 시기. 우울감의 상승과 자존감의 하강이 반비례 하던 그때, '뭐라도 하자' 하는 마음에 아침 수영을 등록했다.
그 시기의 아침 수영은 나에게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머리에 흰띠라도 두르듯 비장하게 수모를 착용하고, 오늘 하루에 탈락과 낙심만 남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발버둥 같은 발장구를 쳤다. 아침 운동을 하고 개운하게 씻고 나오면 왠지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사회인이 된 것만 같았고.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혼자와의 싸움인지라 숨을 쉬는 것과 팔다리를 움직이는 리듬에만 집중하게 되어 잡생각이 없어진다. 최대 속력을 쏟아낸 후 레인 끝에서 숨을 몰아쉬며 뜨끈해진 등과 얼굴의 온도를 느끼면 묘한 쾌감이 차오른다.
많은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 되었던 그 시절, 누구든 물속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지니 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리발을 차고 접영까지 배우고 나면 돌고래처럼 물 위에서 펄떡펄떡 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는 수영반에서 막내였는데, 뭐든지 조급하게 느껴졌던 그때 수영반 동료들은 "어우 20대죠? 젊다~"라며 20대의 체력을 이유로 항상 1번으로 출발할 수 있게 양보(?) 해주었다. 1번으로 출발한 책임감은 더 빨리, 더 열심히 발차기를 하게 만들었고, 수영장에서만큼은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물 밖 세상은 답답했고 물속에서만큼은 숨통이 트였다.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운동
수영은 자전거나 운전과 같이 한번 배워두면 몸이 기억하는 신기한 운동이다. 힘든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수영은 사회인이 된 후에 내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수영을 할 줄 알면 선택할 수 있는 액티비티와 스포츠의 폭도 넓어진다. 휴가지를 선택할 때도 수영장과 바다의 유무는 큰 부분을 차지했다.
▲ 세부 스노클링 중 만난 물고기 친구들 ⓒ 이수현
하와이 하나우마베이와 괌의 리티디안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본 태평양의 산호초와 물고기떼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다큐멘터리 같았다. 세부에서 친구들과 했던 씨워크와 호핑투어는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고, 방콕의 호텔 수영장 베드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기분은 또 어땠던가.
올해 초 양가 부모님과 다녀온 베트남 푸꾸옥에서는 인피니티 풀에서 다 같이 수영을 하며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봤다. 신혼여행지였던 몰디브에서 매일 아침 일과처럼 물 속에 뛰어들어 봤던 푸른빛의 벅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몰디브 바닷속잊을 수 없는 몰디브의 푸른빛 벅참 ⓒ 이수현
▲ 인피니티 풀에서 본 푸꾸옥의 석양 ⓒ 이수현
최근엔 양양에서 첫 서핑에 도전했다. 바다의 온도는 지상의 계절보다 한 걸음 느려서, 봄의 바다가 가장 춥다고 한다. 발이 꽁꽁 얼 정도로 차가운 봄 바다였지만 파도에 리듬을 맞추어 몸을 일으켜 테이크오프를 하고, 그 파도가 나를 한 번에 바다에서 모래까지 데려다주는 경험은 짜릿했다. 물론 수영을 하지 못해도 스노클링이나 서핑은 할 수 있지만, 수영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더 마음 편히 접할 수 있는 경험들임은 확실하다.
올해는 남편과 주말에 시간이 날 때마다 자유수영을 하고 있다. 수영 후 우리끼리의 뒤풀이는 또 얼마나 꿀맛 같은지. 수영은 시간 대비 칼로리를 많이 태우는 운동으로 유명하지만 꼭 칼로리를 채워주고 있어 다이어트 효과는 없다. 덜 마른 머리끝에 물방울을 달고, 한 손엔 핑크색 수영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동네 맛집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주말엔 별 탈 없는 하루의 감사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유사시 수영을 할 줄 알면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데, 수영은 울적했던 시절 나를 숨쉬게 했고, 이후 삶을 훨씬 더 다채롭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도 수영이 준 힘으로 인생을 힘차게 유영하며 나아가는 물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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