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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탕 같은 복싱, 어찌 열광하지 않으리오

'복싱은 없는' 얼굴인데 링에 오릅니다... 채식인으로서 복싱대회 나가려고요

등록|2023.05.28 20:26 수정|2023.05.28 20:26
"얼굴에 복싱이 없어~!"

아내가 내게 얼굴에 복싱이 없다고 말했다. 복싱이 있는 얼굴이란 어떤 얼굴인가. 타이슨? 파퀴아오? 메이웨더? 갸우뚱했지만 아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보다.

두 달 전 집 근처 복싱장에 등록했다. 그런 내게 관장님은 2주 차에 조심스레 스파링을 제안했다. 흔쾌히 사각링에 나선 내 모습에 관장님은 꽤 놀란 눈치였다. 3라운드를 가까스로 마친 뒤 링 아래로 내려오자 "얼굴이 스파링 제안하면 손사래 칠 것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두 달 밖에 안 된 내게 관장님이 무턱대고 스파링을 제안한 건 아니다. 반년 정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관장님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려 4~5년 전의 경험이고 반년밖에 안 되는 경력의 '초보 복서'다.

두 달 밖에 안 됐지만, 나는 확실히 복싱에 미쳤다. 온통 복싱 생각이다. 점심시간에도 혼밥 중에는 촬영 영상을 보며 스파링을 복기한다. 동작이 크진 않은지, 가드는 내려가지 않았는지, 턱은 올라가지 않았는지.
 

▲ 힘겹게 구매한 인조가죽 비건 복싱 글러브 ⓒ 이현우


퇴근할 때에도 복싱장으로 갈 생각에 설렌다. 프로나 아마추어 복싱 영상을 보며 강한 선수들의 자세와 복싱 스타일을 연구한다. 다음 스파링에는 주먹을 좀 더 뻗고 스텝을 활용해서 화려한 복싱을 해보겠다는 계획과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타이슨의 명언이 떠오르면서 한층 진지해진 표정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내가 서른 중반에 복싱에 미친 이유

그동안 해본 운동들과 비교해 보면 복싱의 매력은 긴장감이다. 보통 취미로 복싱을 하는 이들은 3분 3라운드를 한다. 라운드 간 30초 쉬는 시간을 포함하면 정확하게 10분. 라운드 내내 시종일관 긴장하며 쉬는 시간 30초 동안은 숨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경험해 본 운동 중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운동이다. 유도는 대련 도중 한 명이 넘어가서 등이 닿으면 경기가 종료되는 반면, 복싱은 큰 펀치를 맞더라도 다운만 되지 않으면 이내 복수할 기회가 찾아온다.

복싱을 수식하는 표현이 많지만, 한마디로 말해 주먹만을 사용해 맞고 때리는 운동이다. 최소한의 장비만 착용하고 많이 때리는 사람이 이기는 격투기다. 사각의 링 위에서 두 발을 쉼 없이 움직이고 입으로는 '취취' 호흡을 내뱉으며 주먹을 뻗고 피하고 맞아내야 한다.
 

▲ 나보다 스피드가 빠르거나 몸집이 큰 사람이 압박해 오면 별다른 움직임을 하지 않았는데도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체력이 소진된다. ⓒ 이현우


몸이 얼어붙기도 하고 연습의 반만큼도 보여주지 못해 아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링 위에 오를 때만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은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운동에서도 느낄 수 없다. 바로 링 위에 오르는 이유다.

생활체육대회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다

오래전부터 생활체육대회를 나가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되지 않았다. 관장님께 생활체육대회를 나가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곧바로 5월 대회를 알려주셨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경험에 의미를 두고 경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스파링은 주로 관장님이나 일반 회원과 가볍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은 "오늘은 좀 센 애(?)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죽기야 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복싱 초보의 객기가 아니다. 오히려 실력이 출중한 분들은 수준을 맞춰서 스파링을 진행해 주기 때문에 안전하기도 하고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스파링을 하기 때문에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일은 많지 않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쓰러지진 않았지만 훅을 강하게 몇 대 맞고서 코피가 났다. 스파링 후에 관장님께서 휴지로 코를 틀어막아주시길래 깨달았다. 피였다. 그와중에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쓰러지지 않고 라운드를 마무리한 것에 만족했다. 다시 한번 마음 속 스승 타이슨의 명언이 얼얼한 얼굴 위에 드리운다.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희열이 느껴졌다. 날을 새서 공부하거나 놀 때도 안 나던 코피가 터지다니. 알고 보니 스파링 상대는 얼마 전에 데뷔전을 치른 신인 프로복서였다. 프로복서와 주먹을 맞교환한 값진 경험을 한 것이다. 얼얼하고 아프기까지 하지만 다시 찾게 되는 중독성. 복싱을 음식 마라탕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운동선수 수준' 몸으로 만들어준 복싱

복싱의 장점은 또 있다. 몸도 건강해진다. 복싱하기 전 16%였던 체지방율이 복싱 2개월 만에 12%가 되었다. 체지방을 측정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운동선수 수준'이라고 인정해 주는데 괜스레 팔과 복근에 힘을 꽉 줘보게 된다.
 

▲ 복싱 이후 체성분 분석 ⓒ 이현우


복싱은 시간당 칼로리 소모량이 매우 높은 운동이다. 복싱장마다 '다이어트' 카피 문구를 괜히 건 게 아니다. 체력도 자연스레 증가하고 체내에 축적된 지방을 태워줄 것이다. 물론 성실하게 운동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 하에 말이다.

3분 운동, 30초 휴식. 어느 복싱장을 가든 똑같다. 공이 울리고 3분 동안 운동하고 30초만 쉰다. 공 울리는 시간에 맞춰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치다 보면, 어느새 땀은 비 오듯 올 테고 숨은 가빠질 것이다. 지방을 지키려야 지킬 수 없다. 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지방이 불타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필자는 비건이다. 지난해 펴낸 <그러면 치킨도 안 먹어요?>에서 비록 작은 대회일지라도 채식인으로서 복싱대회에서 우승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읊조렸다. 그때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베지터블 파워를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

하지만 출전하기로 했던 5월 복싱 생활체육대회가 대회사 사정으로 취소됐다. 너무나도 아쉽다. 1~2개월 동안 자주 스파링하면서 훈련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생활체육 복싱대회 트로피를 손에 거머쥘 수 있을까. 다음 대회는 6월이나 7월이 될 것 같다. 더욱 훈련에 매진해서 후회 없는 시합이 되도록 준비해야겠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기에 승패를 함부로 예측할 순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비록 상대에게 지더라도 공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뻗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승리한다면 '올해의 훈장'이 되지 않을까.

복싱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복싱은 맨몸운동이기에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신체의 모든 부위가 사용된다. 따라서 복싱을 한방 싸움으로 안다면 큰 오산이다. 때리고 맞기만 하는 단순하고 무식한 스포츠도 아니다. 복부, 얼굴 정면, 측면, 턱 여기저기를 때려야 빈틈이 생긴다. 거리도 재고 방어도 해야 한다.

복싱의 기술 수준은 매우 높다. 미국올림픽위원회 소속 전문가 집단은 지구력, 내구력, 힘, 스피드, 유연성, 민첩성 등 10개의 항목을 제시하고 60개 스포츠 종목을 평가했다. ESPN(미국의 스포츠 전문 방송)에서 그 결과를 공개했는데 복싱이 1위에 올랐다. 쉽게 말해 복싱이 가장 힘들고 기술 수준이 높은 스포츠 1위에 오른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듯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로 갈린다. 그리고 기록이 남는다. O전 O승 O패. '전(戰)'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싸움이다. 보통 승자는 기쁨을 누리고 패자는 고개를 떨군다.

물론 경기에 나가서 승리하는 것만이 복싱의 목적은 아니다. 다이어트나 체력 증진 등 복싱을 하는 이유는 각자 다르다. 그럼에도 시합에 나가는 이들은 극히 일부다. 복싱장에서도 모두가 스파링을 하는건 아니다.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패배가 주는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패배한다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누가 패배하고 속 좋게 하하 호호 웃을 수 있겠는가.

복싱은 상대방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패배하더라도 끝까지 주먹을 던지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복싱에서 가장 중요하다. 실력이 부족해서 허우적댈지라도 주먹을 뻗어야 하고,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도 질지언정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가드로 주먹을 받아내면서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체력이 소진된 후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주먹을 한번이라도 더 뻗어야 한다.

승부의 추가 이미 기울었더라도 자신과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후회가 없다. 물론 상대를 이기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내고 링 위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 뿌듯한 한판이 된다. 과거의 나보다 성장했다는 느낌으로도 충분하다.

링 위에서만 싸움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누가 링 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오르겠는가. 링 위에서 흘리는 땀보다 링 아래에서 흘리는 땀이 훨씬 많다. 다름 아닌 내 안의 게으름은 최고의 적이다. 링 위에 오르기 전에는 수없이 반복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

현실 세계와 복싱 세계관이 거의 일치해보이지 않는가. 내가 사는 세계를 복싱장의 사각형 링으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복싱에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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