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 생울타리 두부깎기, 세 시간 만에 받은 오케이
[일본정원사 입문기] 서툰 제자를 다독여주는 사부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의 한국 제자의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사부의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 사부정원의 적송 ⓒ 유신준
일본 정원사 사부가 5월 하순 소나무 손질하는 시기에 건너 오라셨다. 마침 코로나가 풀려서 귀찮은 PCR 검사가 없어졌다. 예약하고 당일 여권 제시하고 승선하면 끝이었다. 간단해진 출국 절차여서 좋았다.
5월 1일부터는 귀국시 신고할 게 없으면 세관신고서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문도 있었다. 국경을 넘는 일은 관문도 많고 복잡한데 귀찮은 일이 하나 둘 줄고 있다. 그만큼 온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바람직한 반증이다.
▲ 사부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 사부정원의 적송 ⓒ 유신준
드디어 소나무 손질하는 날, 약속 시간인 오전 10시에 도착했더니 사부는 벌써 크레인 트럭을 세워놓고 혼자 일하고 계셨다. 인사를 드렸더니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신다. 다듬고 계신 소나무를 봤다. 무슨 일이든 관록이 붙으면 예술의 경지가 되는 건가. 잔가지 하나하나 공간의 섬세한 배열이 사람의 솜씨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평생 동안 일본 정원을 가꿔 온 사부 솜씨답다. 감히 넘보지 못할 기량에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다. 감탄하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 하신다. 이건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다른 사람들 신경도 안 써.
▲ 사부가 적송을 손질하는 모습 ⓒ 유신준
지난 번에 찍었던 정원사진 중 몇 장 인화해 온 것을 드렸더니 뜻밖의 선물이라며 좋다 좋다를 연발하신다. 과묵한 분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게 기뻐하시는 모습이다. 너는 감각이 있구나. 주제를 가운데 배치하지 않고 1/3원칙을 지켰고만. 이건 교토의 어느 유명한 정원 사진이라 해도 믿겠어. 그 감각으로 정원 일도 하면 되는 거야. 칭찬이 길어진다. 정원사에게는 모든 판단 기준이 정원이다.
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연장부터 준비해야 한단다. 옆 동네 다누시마루로 가서 사부 단골 가게인 듯한 정원재료 전문점에 들렀다. 이 지역 묘목시장이 잘 나갈 때는 이런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이제는 한 곳 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일본 정원의 쇠락이 느껴진다.
▲ 사부가 내 도구를 준비하고 계시다. 관록이 묻어나는 사부의 전지가위 케이스가 돋보인다 ⓒ 유신준
사부가 정원사 벨트와 전지가위 가죽 케이스를 고른다. 전지용 작은 톱을 고르려다 맘에 드는 게 없는지 잠시 망설인다. 장인답게 연장에 까다롭다. 자기가 쓰고 있는 메이커를 찾았는데 없단다. 연장은 오래 써야하니 좋은 것 골라야 한다며 연장이 좋아야 일을 잘 할 수 있단다.
내친 김에 안전화를 맘에 드는 것 하나 고르라기에 골랐더니 싼거 고르지 말란다. 돈 신경 쓰지 말고 좋은 것 고르라고. 늘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라서 부모님한테 조차도 이런 말씀 들은 적이 없는데... 잠시 울컥해진다.
계산대에 가져가니 20만 원 가까이 찍힌다. 내가 돈을 내려 했더니 이런 건 본래 사부가 사줘야 하는 거라며 쇼핑백을 손에 쥐어준다. 가게를 나오면서 사부 아는 분을 만났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제자라 소개하신다.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남에게 소개하는 건 다르다. 우리끼리만 서로 그렇게 알고 지내는 게 아닌 거다.
제자로 공표한다는 건 가족이나 마찬가지 관계로 공식 인정한다는 뜻이다. 제자 공표는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제자 생활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별로 말씀도 없는 분이라서 억지로 떠맡은 나를 맘에 안 들어 하시나 했더니 오늘은 왠지 분위기가 다르다.
점심은 아는 분의 우동가게에 들렀다. 이 땅은 어디든 아는 얼굴로 이어지는 관계사회다. 우동은 가게에 따라 만드는 면의 종류가 다르다. 부드러운 면과 식감있는 면이 있는데 이곳은 부드러움이 자랑인 곳이다. 가게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고 가다랑어 국물맛이 진국이다.
새끼 정원사의 첫 나무 손질
오후부터 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는 맘에 드는 게 없었다며 사부가 쓰던 소나무 전용가위를 챙겨주고 손 톱은 날을 새 것으로 갈아 넣어 주셨다. 전지도구를 가죽케이스에 챙겨서 새 밸트에 걸어 허리에 매어주시고는 어때 뿌듯하신가? 한다. 이제 새끼정원사 시작이란다.
정원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있는데 연장을 절대로 땅바닥에 놓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밥벌이 도구이기도 하려니와 잘못하면 귀중한 연장의 날이 손상될 수도 있어서 만들어진 계율이라고 설명하신다.
▲ 사부가 시범을 보이시는 중이다. 딱 한 뼘 만큼이었다. ⓒ 유신준
전동 바리깡을 챙겨 입구의 철쭉 생울타리에 두부깎기 시범을 보이신다. 보면 아는 것이니 생각대로 한번 해보라며 건네주신다. 자기는 소나무를 다듬어야 한다며 그걸로 끝이다. 평소 별 말씀이 없으신 분인 건 알지만 오늘같은 날은 설명이 좀 있어야 하지 않나?
말이 없는 게 편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 불편하다. 차로 함께 이동할 때도 곤혹스러운 시간이 길었다. 뭘 생각하시는지 내가 뭘 잘못하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이는 거다. 건네받은 전동 바리깡을 들고 철쭉 앞에 섰다. 이제부터는 내 생각대로 내가 알아서 해야하는 시간. 캄캄해진다. 어차피 내가 초짜인 건 아시는 거고 그저 정성들여 하면 되는 거겠지. 서둘지 않고 천천히 기계음을 들으며 진행했다.
사부가 쉬는 틈에 소나무에서 한번 내려와서 잠시 봐 주시긴 했다. 나는 자로 잰듯 반듯하게 깎은 것 같은데 미세한 요철을 잡아낸다. 보는 눈이 다른 거다. 수평자를 대며 구간구간 점검하니 고저가 더 분명해진다. 여기가 좀 올라왔지? 초짜 눈에 뭐가 보이랴. 그렇다 하시니 그런 것 같을 수밖에.
10미터 남짓되는 짧은 생 울타리인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쪽을 다듬어 놓으면 저쪽이 신경 쓰이고 저쪽을 잘라 놓고 보면 또 이쪽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장님 문고리잡는 일을 위, 아래, 양옆을 반복해야 한다. 가까이서 보고 멀리 가서 또 보고. 털고 자르고 다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남들하는 것은 별 것 아니었는데 직접 해보니 일이 만만치 않다.
가꾸고 다듬는 원초적 즐거움
▲ 내 첫 실습작품. 3시간넘게 진땀을 뺐다. ⓒ 유신준
대충보면 그럭저럭 잘 된 것 같은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걸리는 게 많다. 대충이 없는 게 전문가 영역이다. 네가 납득할 때까지 해보라는 게 참 어려운 주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더구나 이곳은 사부 정원의 입구다. 정원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는 곳이니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에 결국 사부의 오케이 사인이 났다. 기레이니낫다네(깔끔해졌구나). 이 한마디를 듣는데 오랜시간 진땀을 뺐다. 물론 초짜 정원사의 날림 공사가 사부 맘에 들 리 없다. 제자를 다독여주는 배려라는 것 쯤은 안다.
전동 바리깡으로 초벌 다듬어 놓고 빳빳한 가죽케이스에서 새 전지가위를 꺼낸 다음, 이리저리 살펴보며 잔가지 다듬어 나갈 때 사각사각 전지가위 소리가 제법 뿌듯했다. 싱그러운 풀 냄새 맡으면서 일에 빠져 몰입되는 재미도 있었다. 새끼 청원사의 첫날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느낌.
헤르만 헤세가 쓴 <정원 일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내가 오늘 느꼈던 이야기 같은 게 써 있지 않을까. 물론 그는 10미터 철쭉을 세 시간 걸려 두부깎기를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가꾸고 다듬는 원초적 즐거움이 다르랴. 정원 일은 동서양을 떠나 인류 공통의 유전자에 새겨진 태곳적 즐거움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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