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메뚜기처럼 떠난 미군, '리틀 시카고'가 남긴 숙제

재생으로 거듭나려 몸부림 치는 동두천 보산동

등록|2023.06.06 15:52 수정|2023.06.06 15:52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공간은 무척 밝았다. 흡사 미국 소도시 느낌이다. 이곳을 '리틀 시카고'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한 시절 네온사인으로 휘황한 밤을 빛냈을, 영어 일색 형형색색 간판에 시선이 닿는다. 간판에서 이 공간이 살아 낸 시간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외국인 관광특구로 지정된 정식명칭 '캠프 보산(Camp Bosan)'의 첫인상이다. 경원선 보산역이 맞닿아 있다.
 

북측 입구CAMP BOSAN 입간판이 서 있는 북측 초입. 사진 왼편이 미군부대. ⓒ 이영천


밝은 얼굴 뒤, 감춰진 속살이 엿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내보이기 싫은 기지촌이었고, 기생적 소비공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지만 말이다. 사전은 기지촌을 '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이라 풀이한다. 즉 외국군 주둔지 주변에서, 부대가 필요로 하는 제화와 용역은 물론 인력을 조달하던 '배후지'란 의미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와 윤락업소가 기지촌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진 실정이다. 공간을 지키며 새롭게 탈바꿈시키려 애쓰는 이곳 상인과 장인, 청년 창업자들이 느낄만한 억울함이다. 기지촌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던 양가성이다. 그렇다고 양공주라 부르던 여성들을 상대로, 미군은 물론 공공연히 국가가 발 벗고 나서 저지른 범죄까지 면죄부를 받는 건 아니다.

그러함에도 논의를 공간에만 한정해보자. 남북분단과 주한미군의 필요성이나 인계철선, 한미동맹이나 동북아에서의 역학관계 같은 어렵고 무거운 논제들은 차지하자. 공간은 여하한 이유로 탄생하여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
 

거리풍경경원선에 잇닿은 이색적인 거리풍경. ⓒ 이영천


현재는 아니라지만, 이 공간도 분명 어느 시기엔 심각한 슬럼화를 맞아들일 터이다. 미군 부대가 완전 이전해 버리면 공간을 지탱하던 고갱이가 사라진다. 따라서 이때를 대비해 그를 대체할만한 소비나 생산 주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나아가 동두천이 자족 도시로 변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분명 마주 설 미래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임계점

공간이 쌓아 온 시간은 70여 년이다. 휴전선 가까이, 감악산과 소요산 등이 만들어낸 천혜의 분지가 공간 탄생 배경이다. 한국전쟁 후 지형과 군사적으로 유리한 분지에 미군 7사단이 주둔하자, 당장 생계가 급한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든다. 당시 나라 안에서 미군은 최고의 소비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게 상품이 되던 시절이다. 심지어 미군이 먹고 남긴 잔반을 다시 끓여 팔았던 꿀꿀이 죽처럼 말이다.
 

미군 부대 입구보산동 맞은편 미군 부대 입구. 수만 명이 주둔하다 평택으로 이전하고 소규모 부대만 남아 있다는 주민들의 전언. ⓒ 이영천


몰려드는 속도가 흡사 불나방을 방불했다. 공간을 세우는 무슨 계획이나 있었을까? 자연 지형을 따라 얼기설기 우후죽순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과 전답, 토지를 강탈당하다시피 미군에 빼앗기고 쫓겨 온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어찌 되었건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양주 이담면(伊淡面)이, 십여 년 만에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동두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전쟁 후였음에도 사회적 인구 증가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공간은 미군의 소비력으로 번성한다.

그러다 맞아들인 첫 위기가 1971년 미군 7사단의 철수였다. 한반도 내 2만여 병력을 감축하면서 동두천이 직격탄을 맞는다. 1970년대 내내 이어진 한·미 간 눈에 보이지 않은 긴장 관계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로 매듭지어지기까지다. 파주에 주둔하던 미군 2사단이 동두천으로 둥지를 옮겨온 건 다행(?)이었을까? 규모는 작아졌을지언정, 어쨌든 미군의 존재는 유효했으니 말이다.

1981년 동두천이 시(市)로 승격하지만 뚜렷한 산업시설 없는, 소비 위주의 공간구조는 그 확장성에서도 명확한 한계를 보인다. 미군 동태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보이던 공간에 다가온 두 번째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2천년대 초반, 동두천에 주둔하던 4천여 병력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되면서부터다.

반전운동이 활발했고, 한국군 파병은 물론 공개 처형당한 한국인이 있던 시기다. 그러함에도 주한 미군 파병이 이뤄졌고, 한국군도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되던 시점이다.
 

주 도로보산동 외국인 관광특구 주 도로 중 한구간. 영어 일색 간판이 즐비하다. ⓒ 이영천


이를 전후해 보산동은 찬물을 끼얹은 듯 위축된다. 이때를 기화로 미군과 전쟁은 물론 군사 주둔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변화가 태동하면서부터다. 더불어 미국이 '동북아 회귀' 전략으로 전환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어진 미군의 재배치 계획에 따라 평택 이전은 이곳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현재는 소규모 부대만 남아 있다. 결국 기생적 소비구조 해체가 공간이 임계점을 맞게 된 근인이다.

현재 진행형인 물음

보산동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은 30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기억에 뚜렷하다. 1992년 발생한 '윤금이씨 살해사건'이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의 모습에, 온 국민이 공분한다. 한 미군의 일탈로 보기엔 너무 흉측한 범죄였다. 미군이 주둔지 시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명쾌하게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거리 풍경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미군으로 보이는 외국인 여럿을 볼 수 있었다. ⓒ 이영천


어느 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공주에 기생한 국가 포주 제도'를 시행하며 달러 벌어드리는 산업 전사라 칭송(?)하는 한편 철저히 우롱한 건 우리 정부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더불어 그녀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물론 벌레 취급하듯 대우한 것 역시 우리였으니.

사건 전개는 '한미주둔군 지위 협정'인 SOFA 개정 운동으로 번져간다. 여기에 1990년대 초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빈발하면서 개정 요구가 들불처럼 인다. 그러함에도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몇 년이 지난 후인 1995년 11월부터 7차례 협상이 열리나, 매듭짓지 못하고 1996년 7월 결렬되고 만다. 두 나라 간 힘의 불균형, 또는 군사적 종속관계가 협상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다.
 

외국인관광특구야간 조명등이 줄지어선 보산동 남측 초입 모습. ⓒ 이영천


2000년 들어 매향리 포격 사건과 이태원 살인사건,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이 잇닿는다. 원성이 다시 비등하자, 그해 8월 부랴부랴 협상이 재개되어 번갯불에 콩 튀듯 12월 2차 SOFA 개정이 이뤄진다. 이마저 불완전한 것으로, 다수 항목에 문제를 남겨놓은 채였다.

우리 국민에게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기소할 권리 하나 찾아오는데, 이토록 엄청난 희생과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여중생 사망 사건 때도 SOFA 개정 요구가 있었으나, 극히 일부 조항에 한정된 합의서 체결로 매듭짓고 만다.

공간이 던진 숙제

이 공간과 미군의 움직임을 보면, 펄 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메뚜기떼가 연상된다. 메뚜기떼는 자기가 지나는 길의 작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주한 미군의 필요성이나 동북아 힘의 균형, 군사 관계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남측 입구CAMP BOSAN 입간판이 선 남측 교통광장 언저리. ⓒ 이영천


여하히 미군은 동두천에 주둔했고, 전쟁 후 궁핍과 맞물려 동두천이라는 공간이 탄생하게 된 건 변함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곡식을 망가뜨리고 떠나는 메뚜기처럼, 미군은 이 공간의 흥망성쇠엔 관심을 둘 필요나 그럴 의무가 없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아직 비워지진 않았으나, 미군과 당시 우리 정부가 주둔지 토지를 어떤 방식으로 강탈해 갔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그 땅으로 인해 부대가 주둔하여 도시가 탄생했고, 미군이 두고 갈 그 땅에서 이 도시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군 부대 터는 철저히 공공 영역에서 다루어야 한다. 다만, 1950년대 억울하게 징발당한 옛 토지주 후손들에겐 지금이라도 정당한 보상이 이뤄줘야 한다.

비워질 그 땅을, 어떤 기능으로 채울 것인지 전문가 집단과 시민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선심성 정책으론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동두천이라는 공간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기능으로 채워내야 한다. 그리고 미래와 통일을 지향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미군이 달러를 뿌려 지탱시킨 공간의 소비 규모에 더해, 한반도 중간지대에서 첨단기능의 생산력을 갖춰야 한다.
 

중심부보산동 중심부. 한미우호광장 주변 여럿으로 길이 갈리는 곳의 모습. ⓒ 이영천


이런 제 조건을 모색하다 보면, 역시 인프라로 문제가 귀결될 것이다. 사회간접자본은 물론이고 양질의 노동력이 몰려들 객관 여건을 먼저 구비할 필요가 있다. 긴 시간을 두고 차분히 준비한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좀 외진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도, 수도권이지 않은가? 그것도 통일을 예비한.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커다란 아픔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보이기 싫은 역사일망정 후손들이 반드시 되짚고 각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해 주길 빌어본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