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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와의 운명적인 만남... 정원사는 나무로 말한다

일본정원이 여름에 더 돋보이는 이유

등록|2023.06.28 15:37 수정|2023.06.28 16:51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편집자말]

▲ 일본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초록의 그라데이션이 봄의 절정이었다 ⓒ 유신준


본격적으로 전지가위를 잡기 전에 이론공부 과정이 있었다. 이론공부 이전에 물론 사부와의 만남이 있었고. 인연의 끈은 사람을 통해 이뤄졌다. 하루미씨였다. 우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때로 비명을 지르며 살지만 또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들 아니던가.

하루미씨는 몇 년간 내 일본 생활의 수호천사였던 분이다. 그녀에게 졸랐었다. 조경사 자격을 땄으니 실무 연수가 필요하다고. 그러니 사부님을 구해달라고. 당시는 농반진반이었다. 잊고 지냈는데 전화가 왔다. 적당한 분을 구했으니 시간 있으면 건너와 보라고. 말이 씨가 됐다.

사부와의 만남

부라부랴 카멜리아 배편을 예약했다. 그때는 일본입국 절차가 꽤 복잡했었다. 나는 백신접종을 하지 않아 72시간 이내에 PCR 검사를 마치고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이걸 여권사진과 함께 비짓재팬 사이트에 올려 관계자의 확인을 받아야 비로소 입국허가 블루화면이 떴다. 이미그레이션 통과 전 입국 절차의 시작이 이정도였다.

하루미씨가 소개해 준 사부님은 쿠마우에 코타로(㙗上환太郞, 75세)씨다. 쿠마우에 조원(造園;정원을 만듬)의 2대째 대표로 평생 정원에서 잔뼈가 굵은 일본정원 전문가란다. 그동안 거리를 오가며 단아한 일본정원들을 눈여겨 보기만 했는데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 세 점의 바위도 바닥에 깔린 이끼와 더불어 일본정원의 고즈넉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 유신준


오후 3시쯤에 하루미씨와 함께 사부댁으로 갔다.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교토의 어느 전통정원이라도 옮겨 놓은 듯 단아하고 인상깊은 정원이었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도 듣기 전에 한눈에 정원에 매료됐다.

초인종을 누르자 사부가 나왔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부의 안내를 받아 거실 정면에서 본 정원은 한폭의 그림이었다. 나고야 세이가이라는 단풍을 메인으로 오른쪽에 소나무와 왼쪽에 다른 종류의 단풍을 배치했다. 4일 전만 해도 새 잎이 막 피어날 때 핑크빛이었다는 세이가이는 수관 둘레 바깥쪽부터 연초록으로 변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 철쭉은 녹색의 계조를 즐기기 위해 단풍나무 아래 두었다 ⓒ 유신준


사부는 하루미씨와 평소 교분이 깊다. 핑크가 절정이었을 때 사부 혼자 보기 아까우니 얼른 와서 함께 보자고 하루미씨에게 전화했었단다. 한국에서 유상(나)이 오기로 했으니 같이 보러가겠다며 그동안 미뤄왔다고 한다.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간에 쫒겨 잠깐 지나가듯 정원을 보는 건 싫었다고 했다. 이렇게 시간을 잊고 느긋하게 보고 싶었다며. 사부의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응어리들이 세탁이라도 되는 듯 정결해지는 느낌이라 했다. 하루미식 정원 사용법이다.

사부의 정원은 두 사람의 혼을 온전히 빼어놓기에 충분했다. 계절을 즐기는 일본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초록의 그라데이션이 봄의 절정이었다. 사부는 본래 일본정원이란 꽃이 아니라 녹음이 주제라 했다. 여름에 시원함을 누리기 위한 기능적 역할이 정원의 출발이었다.

풍경의 핵심은 밸런스
 

▲ 나무를 선택할때 전체적인 정원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는게 고급기술이다 ⓒ 유신준


인상적인 것은 철쭉의 위치가 단풍나무의 그늘 안에 있는 거였다. 양수인 철쭉이 그늘에 있는 이유를 여쭸다. 본래 철쭉은 꽃을 즐기는 나무지만, 그늘에서는 꽃이 안피는 걸 이용해 전체 풍경 조성에 도움이 되도록 배치했단다. 녹색의 계조를 즐기기 위해 단풍나무 아래 두었다는 것이다.

종류가 다른 단풍나무가 또 있었다. 응접실 바로 앞 양쪽에도 늘씬한 청단풍을 배치해 전체적인 풍경에 싱그러움을 더 하고 있었다. 뒷쪽으로 물러앉은 세 점의 바위도 바닥에 깔린 이끼와 더불어 일본정원의 고즈넉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왜 하필 단풍이냐고 여쭸더니 '이 땅의 나무여서'라고 했다. 선대 정원사였던 아버지가 밭에 심어놓은 것을 점찍어 두었다가, 50여년 전 정원을 처음 만들 때 메인 트리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나무라야 풍경과 조화를 이뤄 전체적인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는다고 했다. 풍경의 핵심은 밸런스라며.

사람들은 이쁘고 잘 생긴 나무를 찾지만 도드라져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너무 도드라지면 전체 풍경이 죽는다. 이쁘면 사람들은 그것만 바라보게 되니까 결국 실패하는 거다. 나무를 선택할 때 전체적인 정원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는 게 고급기술이란다.
 

▲ 풍경의 핵심은 밸런스다. 정원사는 나무로 말한다 ⓒ 유신준


셋이서 담소를 나누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오면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마키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가지에 밤톨을 올려 놓은 것처럼 깎아 만드는 일본 정원의 전형적인 나무인데 잘 생긴 소나무를 보는 듯 이채로웠다.

밤톨은 한 그루 두 시간이면 되지만 저렇게 다듬으려면 하루종일 걸린다는 사부의 설명이 이어졌다. 결국 실력은 작품으로 보여주는 거다. 입이 아니라 솜씨인 거다. 구구한 설명같은 거 필요없다. 정원사는 나무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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