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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에 '회오리춤' 바람, 전설이 된 김현정

[명반, 다시 읽기] 김현정 1집 < Legend >

등록|2023.06.18 18:52 수정|2023.06.18 18:52
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스스로를, 그것도 처음부터 '전설'이라 칭한다는 자부심.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상당히 공격적인 출사표다. 그럼에도 이 도발적인 타이틀의 데뷔작 < Legend >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를 대표하는 댄스 가수 김현정에 대한 보증이자 확신이었다.

출발이 매끄럽진 않았다. 2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97년 야심 차게 등장했지만 10대 아이돌 그룹에 필적하기엔 스타일링이 다소 촌스러웠고, 방송 출연과 같은 홍보 또한 소극적으로 진행해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정난을 겪던 소속사까지 도산한 탓에 김현정은 음악 활동 자체를 중단하고 보컬 강사, 코러스와 같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다
 

▲ 가수 김현정 1집 < Legend > 앨범. ⓒ 카오엔터테인먼트


금세 불길이 사그라드나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장소에 흩뿌려진 불씨가 그 기세를 뒤집었다. 타이틀곡 '그녀와의 이별'은 빠른 비트감과 서정적인 멜로디를 앞세운 덕에 당대 댄스 음악을 책임지던 나이트클럽 DJ들의 선곡표에 오를 수 있었고, 밤무대 인기에 힘입어 길거리에서 성행하던 불법 복제 테이프까지 높은 판매량을 보였다. 전파(電波)를 타지 않고 순수 입소문으로 퍼졌으며 시각이 아닌 청각, 즉 음악 본연의 매력으로 대중을 강타한 것이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새 레이블과 계약한 김현정은 1년 뒤인 1998년 기존 1집을 < Shocking >이란 이름으로 바꿔 재발매했다. 급하게 후속작을 선보이기보다 이전에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던 본인의 역량을 이 기회에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의지 표명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도드라진 건 외적인 변신. 헤어짐에 덤덤한 듯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화자의 감성을 적절히 드러내기 위해 곱슬기 가득했던 단발머리는 생머리로 펴 내렸고, 댄스 트랙의 핵심인 안무도 여성 댄서들과 함께 팔다리를 크게 쓰며 훤칠한 신체 조건이 돋보이도록 다듬었다. 특히 팔을 번갈아 가며 위아래로 흐느적거리는 포인트 동작은 간결함과 중독성을 동시에 챙기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관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밴드 보컬리스트로 활약했던 김현정
 

▲ 가수 김현정(자료사진, 2009.11.26). ⓒ 연합뉴스


당연한 얘기지만 탄탄한 기본기가 뒷받침된 흥행이었다. 고교 시절에 헤비메탈 밴드 보컬리스트로 활약했던 김현정은 그 경력을 증명하듯 진성으로 초고음을 뽑아내는 벨팅 창법을 구사하며 파워 보컬의 면모를 과감히 드러냈다. 립싱크가 만연하던 시기에 춤을 추면서 안정된 라이브를 소화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실력파 댄스 가수라는 독보적 위치를 손쉽게 점할 수 있었다.

록 보컬의 질감은 거침없는 감정 표출을 자극했다. 차임벨을 들여와 귀엽고 명랑한 인상을 심어준 후속곡 '혼자한 사랑'에선 짝사랑 상대에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고백을 전하다가도, 제목부터 공격적인 어조를 풍기는 댄스 트랙 '폭군을 사랑한 여자'에선 날이 선 듯한 목소리로 일방적인 연인 사이를 비판하며 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섬세한 가사 전달도 돋보인다. 미디움 템포의 록 발라드 '내 안에 너를'은 밴드 세션의 연주 위에서 '언제나 내 안에 너를 느끼며 살아갈 테니'와 같은 구절을 전하며 애절한 감성을 호소한다. 한국적인 선율을 드리운 '연', 바이올린이 비절하게 울려 퍼지는 'The End' 또한 발라드의 기본 골조는 유지하되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장르 확장을 도모했다.

역주행 신화를 겪으며 메인스트림으로 도약한 김현정은 1집의 성공 비법을 꾸준히 활용하며 승승장구했다. 데뷔곡에 이은 이별 시리즈 '되돌아온 이별'부터 회오리 춤 하나로 온 국민을 돌려놓았던 '멍', 기존 활동곡들과는 다른 결로 변용을 추구한 '떠난 너'까지.

굵직한 히트곡들을 써 내려간 덕분에 여성 솔로 댄스 가수 진영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그를 뒤따라 등장할 수 있었다. 역경은 있었지만 극복과 부활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1집 < Legend >. 김현정은 그렇게 실존하는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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