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에게 바리캉을 넘겨준 사부, 왜 이러시지?
오해는 풀리고... 기세등등해진 새끼 정원사의 작업현장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편집자말]
오전 6시 10분 전 사부댁 도착. 약속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칼같이 지켜 주는 건 필수다. 이곳에서 약속을 지키는 건 사람 됨됨이 판단의 기본이 되며 상호 신뢰의 기반이 되는 일이다. 하물며 나같은 초짜 한국 제자에게 일본 사부와의 약속은 더 말해 무엇하랴. 부지런한 사부는 벌써 정원 주변 불로워 작업을 하고 계시다.
▲ 현장 첫 작품사부정원에서 연습한 달덩이를 응용했다 ⓒ 유신준
이날 작업을 의뢰받은 곳은 사부댁에서 멀지 않은 개인정원이다. 작업도구를 경트럭에 챙겨 싣고 현장으로 갔다. 대략적인 작업 설명은 전날 사부에게서 들었다. 1차연수 현장 견학 때도 한 번 와본 곳이다.
도롯가에 위치한 단아한 주택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원 초입에 교토스기라 부르는 앙징맞은 정원수가 보인다. 스기나무 덩치를 줄이기위해 아래를 자르고 작은 가지를 몇 개 발달시킨 스타일이다. 그 안쪽으로 둥근 철쭉과 바위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돼 있다. 담 옆에는 상록수인 호랑가시나무와 동백이 가리개나무로 서 있다.
이 사람들은 안쪽이 직접 보이는 걸 극히 꺼린다. 그래서 가리개용 식재가 많다. 정문에서도 현관문이 보이지 않도록 반드시 비켜두는 관습이 생겼다. 거실 창 앞에는 청단풍도 같은 목적의 차폐 용도다. 나중에 무성해지면 거실의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로서도 훌륭한 구실을 할 것이다.
사부가 정원 오른쪽에 있는 3미터가 넘음직한 철쭉을 가리키며 전동 바리캉을 내밀었다. 아니? 이걸 내가? 나는 이곳에 와서 사부하시는 일 구경하면서 틈틈이 뒷정리나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었나?
▲ 해놓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현장작업의 즐거움이다 ⓒ 유신준
철쭉 형태는 끝이 둥근 원기둥. 작업 요령은 이미 배웠으니 알고 있다. 사부 정원에서 연습한 달덩이를 응용하면 되겠다. 다만 여기는 작업현장이라 연습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잠시 얼떨떨 했다.
그래도 사부께서 맡기시는 일이니 해야지. 아니 이건 실습의 첫 번째 관문이니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 바리캉을 들었다. 차분하게 머릿속에 생각한 이미지대로 잘라 나갔다. 아래쪽을 반듯하게 돌려가며 자른 다음 높은 곳은 사다리를 사용하려 했다. 거기는 사다리 세우기 어려운 곳이니 담장을 이용하란다.
옆 집은 지대가 낮아서 바닥까지 적어도 4미터는 넘어 보인다. 얇은 담장 위에 전동 바리캉을 들고 올라섰다. 다리는 후들거리지 바리캉은 덜덜 거리지 이건 거의 곡예수준이다. 설마 사부가 하기 어려운 일이라 나를 시킨 건 아니시겠지? 발 밑을 주의하면서 둥근 모양을 살려 작업해 나갔다.
실전은 연습처럼하라고 하지만 실전은 엄연히 실전이다. 다만 연습 때 배운 걸 참고할 뿐이다. 배운대로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보고 또 보고 자르고 털고 다듬고를 반복한다. 이건 내려가서 보고 올라와서 작업하고 반복해야 하니 장난 아니다. 체력도 체력이려니와 좁은 담장 위에서 상당한 주의력까지 요구되는 고난이도 작업이다.
주인이 멀리서 구경하고 있었지만 작업에 몰입되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현장 투입 후 첫 작품을 정성껏 잘 마쳤다. 입구에 있는 교토 스기나무를 손질하던 사부가 멀리서 보더니 잘 했단다. 첫 관문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본편은 지금부터다.
초짜에게 메인트리까지 맡긴 사부
다음 작업 대상은 석등 앞의 작은잎 철쭉이란다. 사부 정원의 달덩이보다 약간 큰 규모다. 그런데 이건 격이 다르다. 정원 포인트인 석등에 머문 시선이 옮겨가는 지점. 정원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정원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요한 나무다. 이른바 이 정원의 메인트리다. 아까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전동 바리캉을 들긴 했지만 초짜가 감히 메인트리까지?
▲ 정원 포인트인 석등에 머문 시선이 옮겨가는 지점. 메인트리다 ⓒ 유신준
하라신다. 둘만 있는 곳도 아니고 주인이 왔다갔다하는 엄중한 상황이다. 사부가 일을 시키고 서 있는데 해야지 별 수 있나. 될대로 돼라. 잘못돼도 어차피 사부 책임이지 초짜한테 뭘 어쩌겠나. 바리캉을 들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까 잘했다고 했으니 이번도 그렇게 하면 된다. 어차피 순서는 연습한 대로 하면 되는 거고. 문제는 사부의 다음 행동이다. 그가 내 옆에서 태연하게 청소를 하고 계시지 않은가.
누가 본다면 딱 내가 사부고 사부가 늙은 조수라 오해할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세상에 도대체 이런 일이... 이런 경우 응당 제자 앞에서 폼나게 사부의 60년 묵은 전동 바리캉 솜씨를 능수능란하게 보여줘야 하지 않나? 나는 사부의 기막힌 솜씨에 감탄을 하며 박수를 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야 딱 맞는 상황인데...
둥근 것은 직선보다 작업이 어렵지만 연거푸 몇 그루 해보니 할 만하다. 게다가 이놈은 일반 철죽보다 이파리가 작아 바리캉을 잘 먹는다. 이제 해는 중천에 올라 땀이 비오듯 한다. 그래도 바리캉 잡은 손놀림은 이미 물이 올랐다. 나무 다듬는 일이 천직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이거 안 맡겼으면 어쩔 뻔 했나.
▲ 거실창문앞의 청단품. 정원 장식을 겸한 그늘용이다 ⓒ 유신준
두 번째 작업도 무사히 마쳤다. 이번에도 잘 했단다. 사부가 잠깐 마무리 바리캉을 잡긴 했지만 메인트리 작업을 내 손으로 무사히 마쳐서 내심 뿌듯했다. 잠시 쉴 틈에 현관옆 바위에 앉아 주인이 내놓은 냉녹차와 생과자를 먹을 때였다.
내 티셔츠 앞 섶에 붙은 나뭇잎 부스러기를 떼어주던 사부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 말았다. 맡겨준 일을 척척해낸 이국의 늙은 제자가 내심 대견스러웠을까.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라도 된 듯한 내 기분을 짐작하시겠는가.
지인의 소개를 거절하지 못해 나를 억지로 떠 맡았지만 그동안 변하신 것인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아니었는데 내가 사부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아무튼 한일 사제지간이 여기까지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좋은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어쩌면 선입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이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듯 일본 사람들도 노골적으로 한국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웃나라로 부대끼고 살아오는 동안 만들어진 지정학적 운명이다.
▲ 첫날 작업끝. 나무 다듬는 일이 천직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 유신준
내가 이곳에서 만난 분들은 운좋게도 대개 친절하고 예의 발랐다. 내 수호천사 하루미씨는 물론이고 일생을 통털어 수많은 일본 사람을 만났지만 얼굴 붉힐 만한 일은 없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
언젠가 하루미씨에게 나는 일본에 와서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고 했더니 그건 니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나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민폐 끼치지 않고 하고 싶은 일하며 사는 보통 사람으로 족하다.
좋은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서로 배려하며 예절을 지켜 관계가 원만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거다. 사부는 좋은 사람이다. 사부가 만약 한국 사람을 싫어했다면 아무리 거절할 수 없는 지인의 부탁이라해도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겠나? 게다가 정성껏 가르쳐나 주셨겠나? 내일도 오전 6시 출근이다. 기세등등해진 새끼 정원사의 가위질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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