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씨 부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를 낳은 까닭
'아들 부자' 송지안씨 부부의 입양기... 아이에게는 부모와 가정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통계가 없다. 다만 70년 가까이 국가 대신 입양을 전담해왔던 기관 실무자의 말에 따르면 입양을 하는 사람들 중 20% 정도는 사회적 동기 때문에 입양을 한다. 말하자면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어떤 이들은 이를 아동의 이익이 아닌 양부모의 지사적 결단에 의한 구원 서사라는 근사한 말로 비난한다. 아이를 구원한 양부모는 뭔가 보답 받기를 원하고, 아이는 고마워해야 하는 부담감을 평생을 갖고 살 것이라는 논리다.
그들은 아이의 필요가 아닌 부모의 필요에 의한 입양은 부모 중심의 이기적 입양이기 때문에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아동중심의 입양을 말하는 주된 논리다.
이른바 난임도 아니었고 종교적 동기도 아니었으며 지사적 결단 조금에 순전히 딸을 키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입양을 한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구원 서사 논리는 틀렸다. 그들에게 나는 자기 필요에 의해 딸이라는 선택적 입양까지 한 매우 이기적 부모인 셈인데 그게 왜 잘못인지를 나는 모르겠다.
예컨대 딸을 입양하기 9년 전에 낳은 아들도 나와 아내의 필요가 불러 온 결과다. 아들을 위해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나와 아내의 욕망이 불러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내 아들이다. 이게 잘못인가?
유감스럽게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입양한 딸은 나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사는 것 같진 않다. 오늘 아침만 해도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학교로 갔다. 나와 아내는 죄없는 죄인으로 눈치를 살폈다.
물론 나와 아내 역시 딸에게 모종의 보답 따위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건강하고 순탄하게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진심으로 나는 낳은 아들과 입양한 딸의 내 새끼로서의 차별점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이든 입양을 하면 그저 자식이 된다.
'아들 부자' 두 부부 이야기
지난 2일 부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한 송진안(64, 교사)씨 부부는 낳은 아들이 둘, 입양한 아들 하나에 수양아들까지 아들만 넷을 둔 '아들 부자'다.
큰 아들(36, 기혼)과 둘째 아들(32, 미혼)이 고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당시 다섯 살이었던 셋째 아들(23)을 입양했는데 이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들이 부모가 없어 시설 대기 중인 어린아이를 돌봐주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걸 열 번을 넘게 보다가 저 아이가 결국은 시설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위탁을 해볼까 하다가 입양까지 생각하게 됐죠."
입양을 선택한 이유가 이른바 사회적 동기다. 남편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입양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아들 둘의 교육비도 빠듯한 집안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완고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물어보나마나였지만 '어느 핏줄인지도 모르는데'라는 지인들의 부정적 반응은 우리 사회 혈연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이런 부정적 환경이 입양 결심을 오히려 부추겼다.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위로 형들만 다섯이었던 남편의 로망은 딸이었지만 결혼 전부터 아들 셋이 로망이었던 아내의 선택은 하나 더 채워야 할 아들이었다. 그런데 성별의 문제는 사실 입양 결심과는 상관 없었다. 성별은 선택의 다툼이었다. 양육을 책임질 아내의 승리였다.
시간이 흘렀고 시댁의 가장 큰 어른 둘이 돌아가시면서 입양 환경이 무르익었다. 입양에 불이 붙은 건 당시 대안학교를 다니던 큰 아들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 주말 마지막 저녁 식탁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입양 입양 얘기만 할 거예요?"
아들이 떠나기 무섭게 전화기를 들어 입양기관을 수소문했다. 입양을 하겠다는 결심만 했지 입양에 대한 공부는 전혀 없었다. 맞벌이를 계속 할 수 있게 젖먹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되는 아이를 입양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다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말귀를 알아먹을 것이고, 집안 환경은 흔들림 없을 것이란 단순한 생각이었다. 죽을만큼 힘들다는 큰아이 입양의 어려움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아빠를 받아들인 그 순간
수소문 끝에 집에서 가까운 시설과 연락이 닿았다. 당시에는 가능했던 입양 방식이었다. 약속한 날 시설에 가서 선보기를 했다. 다섯 살 근이와 일곱 살 석이를 차례대로 만났다. 근이는 자다 깨서 억지로 끌려온 탓에 화가 나서 왔다가 바로 가버렸다. 고분고분했던 석이는 한 번 파양경험이 있는 아이였다.
가르쳐서 학교에 보낼 수 있는 다섯 살 근이를 입양하자는 둘째 아들의 의견이 그럴싸 했다. 몇 달을 시설을 왔다갔다 하며 가족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가지다 집으로 데려와 5년 치 벌금을 내고 친자로 출생신고를 했다. 당시에는 관행이었고 지금은 불가능한 입양방식이다.
집에 온 근이는 6개월을 내리 울었다. 자다 오줌싸는 일도 잦았다. 몇 달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낯을 익혔는데도 터전을 바꾸는 건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변화였다. 분리불안이었다. 수녀님한테 가고 싶다는 말만 했다. 맞벌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공개입양이란 단어를 듣기 힘든 시절이었다. 엄마아빠가 너를 낳고 다섯 살에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눈물 나는 콘티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놨었다. 신문에 공개입양단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찾아가서 만난 직후 비밀입양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근이를 데리고 입양모임을 쫓아다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근이가 유치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엄마가 안 오면 병원에 안 간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다고 연락이 왔다. 머리가 하얘진 채 달려가 병원에 입원시켰다. 시설에 있을 때 아프면 선생님이 약 주고 아이들하고 떼어놨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병문안 오고 엄마아빠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안아주니 아이가 좋아하는 게 눈이 보일 정도였다.
입원해 있는 일주일동안 시설에 있던 아이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근이가 비로소 엄마아빠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입양모임을 계속 나가면서 아이에게 입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버려졌다'는 표현에 깜짝 놀랐다.
시설에서 준 기록을 다 보여줬다. 근이는 생후 한 달 반 정도 됐을 때 병원 내 벤치에서 발견된 아이였다. 버린 게 아니라 너를 키우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람들 많은 안전한 곳에 놓고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제 삶의 긍정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근이의 사춘기는 남자아이 치고는 빨리 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매사에 차별이 심했다. 근이는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친구 집을 떠돌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교 밖을 떠돌았다. PC방으로, 친구집으로, 시도 때도 없이 찾으러 다녔다.
이미 큰아들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터라 근이의 사춘기 행각을 비교적 덤덤하게 치러낼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유전자든 뭐든 가정 환경 안에서 사랑을 듬뿍 주면 무조건 아이가 잘 자랄 줄 알았다. 큰 아이 겪고 근이를 다시 겪으면서 기질과 성향이 절반 이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1학년까지도 공부 잘하는 아이였던 근이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공부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밖은 떠돌아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권위적이고 불편한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근이가 입양됐다는 사실은 근이를 평가절하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낳은 아들과 입양한 아들의 사춘기는 내용이 다르지만 부모가 치러야 할 고통의 분량은 같다.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의 평가는 입양한 아들에게 유독 가혹했다. 엄마라서 억울하고 분했다.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야 하는 우리 학교에서 근이 같은 아이가 수업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는 교감의 말을 듣고는 화딱지가 났다.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자퇴를 했다.
자퇴하고 학원을 다닌 근이는 그해 8월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하지만 대학 준비로 이어가진 않았다. 제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움직이는 아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대견한 게 제 용돈벌이는 스스로 한다.
지금 하고 있는 학원 조교 알바 전에는 전국을 돌면서 철도 노동 일을 1년 가까이 했다. 스무살 넘어 근이는 제 나름대로의 인생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이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든 제가 필요할 때 찾아들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돼주는 정도다. 나머지는 성에 안 차고 답답하지만 묵묵하게 기다려주는 일이다. 어쩌면 그게 부모가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일 테지만.
고분고분했던 석이 이야기
근이에게는 위로 엄마아빠가 낳은 두 형 말고도 수양아들 삼은 형이 하나 더 있다. 근이 다섯 살에 처음 시설에서 선보기를 했던 그날, 자다 끌려나왔다고 화가 나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근이와 달리 고분고분했던 일곱 살 석이는 끝내 다른 곳으로도 입양되지 못했다.
근이를 입양한 뒤에도 엄마아빠는 석이를 잊지 않고 개인후원을 시작했다. 시설의 허가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밖으로 데리고 나와 백화점도 가고, 서점도 가고, 세상구경을 함께했다. 몇 년을 그렇게 꾸준했더니 외출증이 외박증으로 바뀌었다.
주말이면 집에 데려와 근이랑 함께 재웠다. 입양을 하진 못했지만 송진안씨 부부가 석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석이는 시설에 살며 차근차근 성실하게 성장했다. 기술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기능반에 들어갔고 기능대회 나가서 메달도 몇 개를 땄다.
시설에 살면서 가정이 있는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납득 안 되는 편견에 상처받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려운 고비들이 있을 때마다 석이 옆에는 송진안씨 부부가 함께 있었다. 18년을 이어 온 인연이다.
올해 스물다섯 석이는 전공을 살려 큰 회사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자립청년 지원이 끝나는 스물여섯 시점에 송진안씨 부부는 성인 입양을 통해 석이와의 길었던 후원자로서의 인연을 끝내고 이제는 부모자식으로의 인연을 평생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아쉬운 점 하나는 아들 형제만 여섯인 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는데 또 아들만 넷을 키워내고 있는 아빠 송진안씨의 딸에 대한 로망이다. 아무리 양육을 책임진 아내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해도 인생의 다소 억울한 부분으로 남을 수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사실 송씨 부부는 인천의 한 보육원에서 실시했던 확대가족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 인연을 맺은 두 딸이 더 있다. 그게 벌써 8년 전 일인데 당시 고3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스물여섯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명절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두세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송씨에게는 평생의 로망이 두 딸을 통해 실현된 셈이지만 송씨 아내는 다 커서 뒤늦게 인연이 된 두 딸에게 앞으로 넘어야 할 인생의 고비마다 언제든 품어줄 수 있는 친정 엄마로 살아가고 싶다.
모두에게 차별없이 당연해야 할 권리
낳아 준 부모 밑에서 자라 사회인으로 자리잡고 다시 부모가 되는,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서사가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는 그 아이들이 사실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아직도 산다.
동기 따위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 한번 가족이 되면 웬만하면 끝까지 가족이 되는 법이다. 중요한 건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권리를 그 아이들도 누려야 한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하고 가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태어난 아이의 당연한 권리다.
송진안씨 부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를 낳은 이유다.
어떤 이들은 이를 아동의 이익이 아닌 양부모의 지사적 결단에 의한 구원 서사라는 근사한 말로 비난한다. 아이를 구원한 양부모는 뭔가 보답 받기를 원하고, 아이는 고마워해야 하는 부담감을 평생을 갖고 살 것이라는 논리다.
이른바 난임도 아니었고 종교적 동기도 아니었으며 지사적 결단 조금에 순전히 딸을 키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입양을 한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구원 서사 논리는 틀렸다. 그들에게 나는 자기 필요에 의해 딸이라는 선택적 입양까지 한 매우 이기적 부모인 셈인데 그게 왜 잘못인지를 나는 모르겠다.
예컨대 딸을 입양하기 9년 전에 낳은 아들도 나와 아내의 필요가 불러 온 결과다. 아들을 위해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나와 아내의 욕망이 불러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내 아들이다. 이게 잘못인가?
유감스럽게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입양한 딸은 나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사는 것 같진 않다. 오늘 아침만 해도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학교로 갔다. 나와 아내는 죄없는 죄인으로 눈치를 살폈다.
물론 나와 아내 역시 딸에게 모종의 보답 따위를 바라진 않는다. 그저 건강하고 순탄하게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진심으로 나는 낳은 아들과 입양한 딸의 내 새끼로서의 차별점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이든 입양을 하면 그저 자식이 된다.
'아들 부자' 두 부부 이야기
▲ 출산, 입양, 결연, 후원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를 둔 송진안씨 부부. ⓒ 송진안시 제공
지난 2일 부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한 송진안(64, 교사)씨 부부는 낳은 아들이 둘, 입양한 아들 하나에 수양아들까지 아들만 넷을 둔 '아들 부자'다.
큰 아들(36, 기혼)과 둘째 아들(32, 미혼)이 고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 당시 다섯 살이었던 셋째 아들(23)을 입양했는데 이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들이 부모가 없어 시설 대기 중인 어린아이를 돌봐주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걸 열 번을 넘게 보다가 저 아이가 결국은 시설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위탁을 해볼까 하다가 입양까지 생각하게 됐죠."
입양을 선택한 이유가 이른바 사회적 동기다. 남편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입양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아들 둘의 교육비도 빠듯한 집안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완고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물어보나마나였지만 '어느 핏줄인지도 모르는데'라는 지인들의 부정적 반응은 우리 사회 혈연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이런 부정적 환경이 입양 결심을 오히려 부추겼다.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위로 형들만 다섯이었던 남편의 로망은 딸이었지만 결혼 전부터 아들 셋이 로망이었던 아내의 선택은 하나 더 채워야 할 아들이었다. 그런데 성별의 문제는 사실 입양 결심과는 상관 없었다. 성별은 선택의 다툼이었다. 양육을 책임질 아내의 승리였다.
시간이 흘렀고 시댁의 가장 큰 어른 둘이 돌아가시면서 입양 환경이 무르익었다. 입양에 불이 붙은 건 당시 대안학교를 다니던 큰 아들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 주말 마지막 저녁 식탁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입양 입양 얘기만 할 거예요?"
아들이 떠나기 무섭게 전화기를 들어 입양기관을 수소문했다. 입양을 하겠다는 결심만 했지 입양에 대한 공부는 전혀 없었다. 맞벌이를 계속 할 수 있게 젖먹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되는 아이를 입양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다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말귀를 알아먹을 것이고, 집안 환경은 흔들림 없을 것이란 단순한 생각이었다. 죽을만큼 힘들다는 큰아이 입양의 어려움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아빠를 받아들인 그 순간
수소문 끝에 집에서 가까운 시설과 연락이 닿았다. 당시에는 가능했던 입양 방식이었다. 약속한 날 시설에 가서 선보기를 했다. 다섯 살 근이와 일곱 살 석이를 차례대로 만났다. 근이는 자다 깨서 억지로 끌려온 탓에 화가 나서 왔다가 바로 가버렸다. 고분고분했던 석이는 한 번 파양경험이 있는 아이였다.
가르쳐서 학교에 보낼 수 있는 다섯 살 근이를 입양하자는 둘째 아들의 의견이 그럴싸 했다. 몇 달을 시설을 왔다갔다 하며 가족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가지다 집으로 데려와 5년 치 벌금을 내고 친자로 출생신고를 했다. 당시에는 관행이었고 지금은 불가능한 입양방식이다.
집에 온 근이는 6개월을 내리 울었다. 자다 오줌싸는 일도 잦았다. 몇 달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낯을 익혔는데도 터전을 바꾸는 건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변화였다. 분리불안이었다. 수녀님한테 가고 싶다는 말만 했다. 맞벌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공개입양이란 단어를 듣기 힘든 시절이었다. 엄마아빠가 너를 낳고 다섯 살에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눈물 나는 콘티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놨었다. 신문에 공개입양단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찾아가서 만난 직후 비밀입양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근이를 데리고 입양모임을 쫓아다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근이가 유치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엄마가 안 오면 병원에 안 간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다고 연락이 왔다. 머리가 하얘진 채 달려가 병원에 입원시켰다. 시설에 있을 때 아프면 선생님이 약 주고 아이들하고 떼어놨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병문안 오고 엄마아빠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안아주니 아이가 좋아하는 게 눈이 보일 정도였다.
입원해 있는 일주일동안 시설에 있던 아이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근이가 비로소 엄마아빠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입양모임을 계속 나가면서 아이에게 입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버려졌다'는 표현에 깜짝 놀랐다.
시설에서 준 기록을 다 보여줬다. 근이는 생후 한 달 반 정도 됐을 때 병원 내 벤치에서 발견된 아이였다. 버린 게 아니라 너를 키우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사람들 많은 안전한 곳에 놓고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제 삶의 긍정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손녀까지 모든 자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 송진안씨 제공
근이의 사춘기는 남자아이 치고는 빨리 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매사에 차별이 심했다. 근이는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친구 집을 떠돌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교 밖을 떠돌았다. PC방으로, 친구집으로, 시도 때도 없이 찾으러 다녔다.
이미 큰아들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터라 근이의 사춘기 행각을 비교적 덤덤하게 치러낼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유전자든 뭐든 가정 환경 안에서 사랑을 듬뿍 주면 무조건 아이가 잘 자랄 줄 알았다. 큰 아이 겪고 근이를 다시 겪으면서 기질과 성향이 절반 이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1학년까지도 공부 잘하는 아이였던 근이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공부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밖은 떠돌아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권위적이고 불편한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근이가 입양됐다는 사실은 근이를 평가절하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낳은 아들과 입양한 아들의 사춘기는 내용이 다르지만 부모가 치러야 할 고통의 분량은 같다.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의 평가는 입양한 아들에게 유독 가혹했다. 엄마라서 억울하고 분했다.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야 하는 우리 학교에서 근이 같은 아이가 수업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는 교감의 말을 듣고는 화딱지가 났다.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자퇴를 했다.
자퇴하고 학원을 다닌 근이는 그해 8월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하지만 대학 준비로 이어가진 않았다. 제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움직이는 아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대견한 게 제 용돈벌이는 스스로 한다.
지금 하고 있는 학원 조교 알바 전에는 전국을 돌면서 철도 노동 일을 1년 가까이 했다. 스무살 넘어 근이는 제 나름대로의 인생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이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든 제가 필요할 때 찾아들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돼주는 정도다. 나머지는 성에 안 차고 답답하지만 묵묵하게 기다려주는 일이다. 어쩌면 그게 부모가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일 테지만.
고분고분했던 석이 이야기
근이에게는 위로 엄마아빠가 낳은 두 형 말고도 수양아들 삼은 형이 하나 더 있다. 근이 다섯 살에 처음 시설에서 선보기를 했던 그날, 자다 끌려나왔다고 화가 나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근이와 달리 고분고분했던 일곱 살 석이는 끝내 다른 곳으로도 입양되지 못했다.
근이를 입양한 뒤에도 엄마아빠는 석이를 잊지 않고 개인후원을 시작했다. 시설의 허가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밖으로 데리고 나와 백화점도 가고, 서점도 가고, 세상구경을 함께했다. 몇 년을 그렇게 꾸준했더니 외출증이 외박증으로 바뀌었다.
주말이면 집에 데려와 근이랑 함께 재웠다. 입양을 하진 못했지만 송진안씨 부부가 석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석이는 시설에 살며 차근차근 성실하게 성장했다. 기술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기능반에 들어갔고 기능대회 나가서 메달도 몇 개를 땄다.
시설에 살면서 가정이 있는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납득 안 되는 편견에 상처받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려운 고비들이 있을 때마다 석이 옆에는 송진안씨 부부가 함께 있었다. 18년을 이어 온 인연이다.
올해 스물다섯 석이는 전공을 살려 큰 회사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자립청년 지원이 끝나는 스물여섯 시점에 송진안씨 부부는 성인 입양을 통해 석이와의 길었던 후원자로서의 인연을 끝내고 이제는 부모자식으로의 인연을 평생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아쉬운 점 하나는 아들 형제만 여섯인 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는데 또 아들만 넷을 키워내고 있는 아빠 송진안씨의 딸에 대한 로망이다. 아무리 양육을 책임진 아내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해도 인생의 다소 억울한 부분으로 남을 수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사실 송씨 부부는 인천의 한 보육원에서 실시했던 확대가족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 인연을 맺은 두 딸이 더 있다. 그게 벌써 8년 전 일인데 당시 고3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스물여섯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명절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두세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송씨에게는 평생의 로망이 두 딸을 통해 실현된 셈이지만 송씨 아내는 다 커서 뒤늦게 인연이 된 두 딸에게 앞으로 넘어야 할 인생의 고비마다 언제든 품어줄 수 있는 친정 엄마로 살아가고 싶다.
모두에게 차별없이 당연해야 할 권리
▲ 송진안씨 가족사진. ⓒ 송진안씨 제공
낳아 준 부모 밑에서 자라 사회인으로 자리잡고 다시 부모가 되는,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서사가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는 그 아이들이 사실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아직도 산다.
동기 따위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 한번 가족이 되면 웬만하면 끝까지 가족이 되는 법이다. 중요한 건 누구나 누리는 당연한 권리를 그 아이들도 누려야 한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하고 가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태어난 아이의 당연한 권리다.
송진안씨 부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를 낳은 이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