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추대 거부, 만주로 귀환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40] 독립운동 진영이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거치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 이항증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한 인사들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불신하고 있었다. 불신의 대상은 이승만이었다. 그의 위임통치론은 절대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공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또 하나는 무장전쟁의 기지를 만주에 두기로 하고서도 그동안 외면해온 처사, 그리고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은 생명을 걸고 싸워왔지만 임시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원성과 비판이 쏟아졌다.
만주의 무장전쟁 세력이 비록 '벽상조각'에 그쳤지만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면서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만큼 그는 이 분야의 확고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북경군사통일회의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고, 임시정부 측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리는 등 독립운동 진영이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거치면서 1924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상룡은 이같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작시 <만주에서 겪은 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3
연경(베이징) 회의가 투지 다시 떨쳐
성토문 전달하매 옹호당 미친 듯 고함친다
한번 물어보자 위임통치 청원이
이웃나라 의지해 보호받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14
분쟁을 진정하려 국회가 열려
동해에 떠오르는 해 기다림 서광이 돌아왔다
까닭없는 개조다 창조다 한가한 싸움
달팽이 두 뿔처럼 솟아 났네. (주석 4)
얼마 후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했다. 이상룡은 <이승만이 도장을 소매에 넣어 태평양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서>란 시를 지었다.
잘못이 있으면 모름지기 스스로 꾸미지 말아야 하며
자연스럽게 물러나서 민족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이네
명성은 무너졌고 자취도 탄로 나서 더 이상 여지가 없거늘
갑자기 또 무슨 마음으로 도장을 소매에 넣고 달아났는가. (주석 5)
주석
4> <석주유고(상)>, 219쪽.
5> 앞의 책, 206쪽.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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