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역겨움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카프카처럼
카프카 탄생 140주년...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읽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바퀴벌레 놀이'가 인기라고 한다. "만약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질문하는 놀이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기습적으로 질문하면 엉겁결에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응을 테스트 하는 의미가 있어 씁쓸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좀 역겹지만 사랑하니까 먹이를 주겠다, 고 하면 합격, "나 벌레 무지 싫어하거든, 벌레니까 죽여야지" 하면 낙제점이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더 웨일>도 역겨움에 관한 이야기다. 272kg의 고도비만자 찰리를 실감 나게 연기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랜든 프레이저는 실제 이혼과 비만을 극복한 인간 승리 역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영화는 묻는다. 인생에서 단 한 명만 구원할 수 있다면 과연 누구인가? 죽음을 예감한 찰리는 자신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혐오하는 딸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기를 바라며 구원의 여정에 나선다. 딸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구원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소중한 사람이 만약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최악의 상황이라 이렇게 시험에 빠질 땐 난감하다. 바퀴벌레 놀이의 기원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출근을 걱정하고, 바이올린에 재능 있는 누이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려던 계획이 틀어져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가족은 그를 점점 외면할 뿐이다. 벌레로 변한 그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 역겨운 존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올해가 카프카 탄생 140주년이라고 한다. 카프카의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읽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변신>의 쇼킹한 느낌이 다시 살아난다. 내가 마치 벌레가 된 듯 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묘사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섬뜩하고 끔찍하다. 나라도 출근과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카프카 책 속의 글들이 돌연 내 인생의 카프카를 불러 깨운다. 카프카는 경계에 서서 삶 전체를 방황하고 고뇌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곳에선 소수 언어인 독일어를 모국어로 썼고,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 신앙은 없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고, 여성 관계도 순탄하지 못했다. 국영 보험공사의 생계형 관리와 야간 올빼미형 집필가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후대에겐 위대한 작가지만 삶 자체는 '전차의 입석'처럼 늘 경계에 선 채 평생 소속감과 정체성 부재에 시달렸다.
젊은 시절, 나는 한때 카프카에 빠졌다. 그의 작품은 불안과 초조, 절망과 부조리의 세계를 그리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런 카프카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재능이 부족했고, 현실적으로 취직이 잘 되던 경제학과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평생 공직 생활을 하게 됐다.
카프카가 관리 신분이었다는 점은 내게 일종의 동질감을 줬다. 혹시 나도 카프카처럼 뭔가를 꿈꿀 수는 없을까. 답답한 현실에서 어떤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직생활 중 2년 간의 영국 연수가 끝나가던 2000년 여름, 자동차를 몰고 네덜란드와 독일을 거쳐 체코 프라하까지 갔다. 카프카가 살았다는 집과 주변의 황금소로를 둘러봤다. 가슴이 몽글몽글 벅차올랐다. 신구가 조화로운 매력적인 프라하는 내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꼭 다시 와야지, 했는데 아직 가지 못하고 있다.
카프카는 현실의 역겨움과 부조리를 견디며 끊임없이 탈출을 꿈꿨다.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힘들었을까. 골목으로 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면서 카프카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갔다. '놀랍도록 짧은' 40세에 삶을 마감했지만, 구원의 창이었던 그의 글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으로 남았다.
나는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마치고 어느덧 60을 넘겼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은 내게도 일종의 탈출구 같다. 답답한 현실을 견디며 꾸는 꿈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힘과 에너지를 얻는다. 그 일을 할 때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에 거창한 구원의 손길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제보다 1cm만 앞으로 나아가도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의 시간을 채워나가면 되지 않을까. 구원을 향한 카프카의 고단한 삶과 용기 있는 인생 여정에 경의를 표한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응을 테스트 하는 의미가 있어 씁쓸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좀 역겹지만 사랑하니까 먹이를 주겠다, 고 하면 합격, "나 벌레 무지 싫어하거든, 벌레니까 죽여야지" 하면 낙제점이다.
영화는 묻는다. 인생에서 단 한 명만 구원할 수 있다면 과연 누구인가? 죽음을 예감한 찰리는 자신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혐오하는 딸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기를 바라며 구원의 여정에 나선다. 딸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구원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소중한 사람이 만약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최악의 상황이라 이렇게 시험에 빠질 땐 난감하다. 바퀴벌레 놀이의 기원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출근을 걱정하고, 바이올린에 재능 있는 누이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려던 계획이 틀어져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가족은 그를 점점 외면할 뿐이다. 벌레로 변한 그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 역겨운 존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올해가 카프카 탄생 140주년이라고 한다. 카프카의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읽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변신>의 쇼킹한 느낌이 다시 살아난다. 내가 마치 벌레가 된 듯 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묘사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섬뜩하고 끔찍하다. 나라도 출근과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 돌연한 출발 책 표지 ⓒ 김성일
카프카 책 속의 글들이 돌연 내 인생의 카프카를 불러 깨운다. 카프카는 경계에 서서 삶 전체를 방황하고 고뇌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곳에선 소수 언어인 독일어를 모국어로 썼고,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 신앙은 없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고, 여성 관계도 순탄하지 못했다. 국영 보험공사의 생계형 관리와 야간 올빼미형 집필가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후대에겐 위대한 작가지만 삶 자체는 '전차의 입석'처럼 늘 경계에 선 채 평생 소속감과 정체성 부재에 시달렸다.
"나는 전차의 입구 쪽 입석에 서 있다. 이 세계, 이 도시, 나의 가족 안에서 나의 위치를 헤아려 보니 여지없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 <승객>
젊은 시절, 나는 한때 카프카에 빠졌다. 그의 작품은 불안과 초조, 절망과 부조리의 세계를 그리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런 카프카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재능이 부족했고, 현실적으로 취직이 잘 되던 경제학과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평생 공직 생활을 하게 됐다.
▲ 프라하의 카프카 조형물 ⓒ 픽사베이
카프카가 관리 신분이었다는 점은 내게 일종의 동질감을 줬다. 혹시 나도 카프카처럼 뭔가를 꿈꿀 수는 없을까. 답답한 현실에서 어떤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직생활 중 2년 간의 영국 연수가 끝나가던 2000년 여름, 자동차를 몰고 네덜란드와 독일을 거쳐 체코 프라하까지 갔다. 카프카가 살았다는 집과 주변의 황금소로를 둘러봤다. 가슴이 몽글몽글 벅차올랐다. 신구가 조화로운 매력적인 프라하는 내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꼭 다시 와야지, 했는데 아직 가지 못하고 있다.
"쓸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그 어디든 끼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 그는 골목으로 난 창 없이는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 - <골목길로 난 창>
카프카는 현실의 역겨움과 부조리를 견디며 끊임없이 탈출을 꿈꿨다.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힘들었을까. 골목으로 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면서 카프카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갔다. '놀랍도록 짧은' 40세에 삶을 마감했지만, 구원의 창이었던 그의 글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으로 남았다.
"인생은 놀랍게도 짧구나." - <옆 마을>
나는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마치고 어느덧 60을 넘겼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은 내게도 일종의 탈출구 같다. 답답한 현실을 견디며 꾸는 꿈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힘과 에너지를 얻는다. 그 일을 할 때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에 거창한 구원의 손길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제보다 1cm만 앞으로 나아가도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의 시간을 채워나가면 되지 않을까. 구원을 향한 카프카의 고단한 삶과 용기 있는 인생 여정에 경의를 표한다.
▲ 프라하 여름 이미지 ⓒ 픽사베이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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