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재미없는 소설이 멕시코에서 초대박친 이유
[여자가 바라본 여성 이야기] 영화 <북 오브 러브>
▲ 영화 <북 오브 러브>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소재의 독특함만으로 보게 된 로맨틱 코미디 <북 오브 러브>는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번역과 오역, 각색과 오마주, 혹은 패러디의 경계, 원작자와 번역가, 편집자의 상관관계 등을 따져 묻게 만드는 영화였다.
번역의 오해로 생긴 사랑 이야기로 생각했지만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다. 진부한 외피를 살짝 벗기면 라틴 문화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나아가 번역이 부른 문화 차이, 가치관 차이를 살펴보는 영화였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 속 라틴계 주인공이 늘고 있어 그 연장선이지 싶다. 미국 내 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라티노를 공략하려는 할리우드의 세대교체 움직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 영화 <북 오브 러브>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남자 기숙학교를 나와 영문학을 전공한 헨리(샘 클라플린)는 여성이라고는 엄마밖에 상대해 본 적 없는 모태 솔로다. 소설가를 꿈꾸며 5년째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고심해 고른 사랑의 정수가 담긴 소설을 최근 발표했다. 하지만 업계와 대중은 심각할 정도로 무반응. 플라토닉러브를 주제로 아름다운 자전거 설명만 1페이지 이상을 할애하는 러브스토리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편집자에게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는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드디어 쾌재를 외치던 것도 잠시. 당장 멕시코로 북 투어를 가야 한다는 편집자의 말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영국이 아니라 멕시코 국민 베스트셀러?
당황스럽지만 헨리는 멕시코에 도착해 번역가 마리아(베로니카 에체귀)와 조우한다. 하지만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스민다. 책 광고가 화끈하게 제작된 건 그렇다 치고, 팬들이 보내는 DM은 섹시한 사진과 문구들뿐이다. 한편, 헨리는 가이드 겸 번역가인 마리아와 전역을 순례하며 홍보하던 중 이상한 점을 연속해서 겪는다. 내 말을 제대로 통역한 건지 의아했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마리아뿐이다. 하지만 관객 반응을 살피던 중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내 금쪽같은 소설이 격정 로맨스로 번역되었다고? "
답답한 영국 남자와 화끈한 멕시코 여자
▲ 영화 <북 오브 러브>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는 라틴 문화를 긍정적으로 알린 작품에 수여하는 '이매진 파운데이션 어워즈'에서 '최우수 프라임타임 프로그램 상'을 받았다. 영국 런던 시가지를 비추며 시작하는 오프닝 때문에 영국 영화로 착각할 법하지만 중반부부터 본격적인 멕시코 문화 중심이다. 정열의 나라 멕시코에서 '현명한 마음'이 '예민한 가슴'으로 둔갑한 사연을 코믹하게 다룬다. 편집자가 번역 맡긴 책이 너무 지루해 약간 수정하고, MSG를 뿌린 것 뿐인데 말도 못할 인기를 끌게 된다.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영국 남자와 멕시코 여자가 로맨스 소설 장르를 완성하는 재미가 있다. 사랑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수한 그 결정체라고 본 이성적인 영국 남자는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평탄한 삶을 산 덕에(?) 경험이 부족하다. 말 그대로 연애도 책으로 배웠을 사람인 거다. 앞뒤 꽉 막히고 고지식한 헨리가 생활력 강한 마리아를 만나 심경에 변화를 겪는다.
마리아는 할아버지와 아들을 돌보는 싱글맘이다. 작가로 데뷔하고 싶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서빙과 육아를 병행해야 한다. 쳇바퀴처럼 도는 스케줄에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소설을 끄적이는 대신 밀린 잠을 보충해야 하는 고된 일상이다. 투어 내내 징징거리는 헨리를 두고 마리아는 "멕시코에서 여성은 남성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라는 말로 응수한다. 티격태격했지만 둘은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을 이룬다. 영국에선 무명작가지만 멕시코에선 야설계의 셰익스피어가 된 헨리. 이게 다 마리아 노고 덕분이지만. 세상은 여성이자 싱글맘인 마리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멕시코 문화와 여성의 성장기 주목
▲ 영화 <북 오브 러브>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북 오브 러브>는 '초월 번역'을 소재 삼았다. 초월 번역이란 원문의 느낌과 어감을 직역하기보다 번역가와 언어권 문화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도록 의역하는 창작 영역이 반영된 작업이다. 봉준호 감독은 타문화를 이해하는 데 1인치의 장벽을 예로 들었지만 헨리의 어휘력은 누가 와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마리아는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다. 캐릭터 수정은 물론이고 새 캐릭터와 서사도 만들었다.
전반적인 콘셉트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헨리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본다면 사랑에 빠질 게 아니라 소송을 준비해야 될 것 같지만.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 특성상 번역은 매개체일 뿐 그 이상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속편 제작을 위한 협업에만 이용된다. 즉 작가는 경험을 재료 삼아 좋은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의 공동작품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마리아의 작가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이룬다. 멕시코 여성의 사회 진출 어려움까지 녹여 상업적인 재미도 안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 비교할 수 있는 텔레노벨라(Telenovela)도 등장한다는 거다. 텔레노벨라란 중남미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장르다. TV에서 볼 수 있는 일일연속극으로 남녀 간 사랑을 주제로 빈부격차, 출생의 비밀 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 배신을 다루는 통속극이다. '또야?' 싶은 보편적인 이야기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이유를 살피며, 결국 고전은 돌고 돌아 우리 마음속에 안착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장혜령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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