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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 서거, '국토회복되기 전에는 이곳에 묻어라'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46]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 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다."

등록|2023.06.27 16:37 수정|2023.06.27 16:37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 운명한 소과전자촌, 70년만에 후손이 족적을 더듬었으나 쉬 찾을 수 없었다.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 운명한 소과전자촌, 70년만에 후손이 족적을 더듬었으나 쉬 찾을 수 없었다. ⓒ 박도


만주의 한인 독립운동지도자들은 이 시기 이중삼중의 곤경에 놓여 있었다. 일제 외에도 '미쓰야 협정'으로 중국 관리들이 독립운동가를 검거하고, 중국 민간인들은 현상금이 탐을 냈다. 이상룡은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손자 병화(秉華)가 수발을 하였다.

무진년(1928)에 파려하(玻瓈河) 쪽으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재중청년동맹이 발기되었다. 손자 병화가 간부직을 맡게 되었으나, 곁에서 모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난처해 하니, 공은 "너는 가거라! 사회에 몸을 던졌다면 집안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후로 동맹 회원들이 교대로 찾아와 품의하고, 이들로 해서 집에 사람이 가득 차서 혹 잠자리가 편치 않는 데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중국의 관헌들이 한인의 결사를 의심하여 검거가 잇따르고 공에게도 미칠 염려가 있어서 드디어 길림 북쪽의 세린하(細鱗河) 언덕으로 이주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소과전자(燒鍋甸子)로 이주하였다. 8월에 일본군이 대거 침략하여 봉천과 장춘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길림마저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공은 이 소식을 듣고 우울해 하다가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병상에서 근심만 할 뿐이었다. (주석 1)

중국 각지에서 동지·전우·후배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이진산이 와서 울면서 "나랏일이 아직 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엇으로 저희들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하니, 공은 "외람되게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제군들의 극진한 추대를 받았으나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고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두렵다. 원컨대 제군들은 외세 때문에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노부(老夫)의 마지막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주기를 바란다."(주석 2)

그는 병환 중에도 떨치고 일어나 못다 이룬 독립전쟁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의지를 보였다.

내가 10년만 더 살면 사기를 다시 진작시키고, 군사를 정의롭게 훈련시켜 다시 한 번 거사할 계획을 할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만주의 호걸들과 연합하여 한덩어리로 합치는 것이 또한 다음 계획인데 지금은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주석 3)
 
운명의 날이 닥쳤다.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잠시 나를 여기다 묻어두고, 너는 네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 향년 75세의 장엄한 생애였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 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다."(사마천)

공이 북경 군사통일회에 참석한 것. 액목에 군대를 주둔시킨 계책. 상해의 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았던 것은, 모두 분규를 조정하여 흩어진 인심을 수습하여 일을 결맹하고자 함이었다.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더욱더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기만 할 뿐이었다. 통합의 가능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공은 곧 국무령의 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근심과 울분이 그만 병이 되어 나라의 장사들로 하여금 오장의 슬픔을 일게 하였으니, 아! 천운이로다. (주석 4)

국립묘지 임정 묘역에 마련된 석주 이상룡의 묘국립묘지 임정 묘역에 마련된 석주 이상룡의 묘 ⓒ 박도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먼 이역에서 서거하였다. 유언으로 유해를 해방이 될 때까지 고국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할만큼 '조국해방'을 절체절명의 소명으로 삼았던 애국자였다.

부고가 나가자 조곡(弔哭)하는 것이 천리에 이어졌다. 봉천과 경성, 일본의 각 신문은 모두 공의 이력을 기재하여 천하에 두루 통고하였다. 유거하던 곳의 중국인 박씨 집 산에 임시로 매장하고 영좌(靈座)를 모시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7년 뒤 무인년(1938)에 조카인 문형이 하얼빈의 동취원장으로 이장하여 계공(이봉희) 및 종숙 승하와 함께 같은 곳에다 묻고 표석을 세웠다. (주석 5)

유족으로 부인 의성김씨는 함께 망명하여 험한 고초를 겪으며 남편을 내조하다가 3년 뒤(1935)에 별세하고, 아들 준형도 부모 따라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약하고 모친상이 끝난 뒤 귀향하여 본가인 임청각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외진 산골(와룡면 도곡동)에 거처하여 부친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그 작업이 마무리되었을 때 1942년 생일날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딸은 독립운동가 강남호(姜南鎬)와 결혼하였다.


주석
1> <행장>, <석주유고(하)>, 161쪽.
2> 앞의 책, 162쪽.
3> 이준형, <선부군(先府君) 유사>, <석주유사(하)>, 617~618쪽.
4> <행장>, <석주유고(하)>, 165쪽.
5> 앞의 책, 16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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