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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따라 강릉, 율곡선생 배우며 성장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 3] 사람들은 벌써 그를 비범한 소년으로 지목하였다

등록|2023.07.04 17:00 수정|2023.07.04 17:00

이율곡이율곡 초상화 ⓒ 송조은


김옥균(金玉均)은 1851년 1월 23일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마을에서 아버지 병태(炳台)와 어머니 은진 송(宋)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그의 자는 백온(伯溫), 호는 초기에는 고우(古愚)라고 하다가 후에는 주로 고균(古筠)을 썼다.

얼굴이 백옥같이 맑고 아름다워 아버지가 옥균이라 지었다 한다.
아버지는 당대 제일가는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이었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약간의 토지로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가문은 병자호란 때 명신 김상룡과 김상헌을 배출한 선조들이 있었으나 그후 실세하여 조용히 살아갔다. 어머니 송씨는 선량하고 인정많은 품성의 소유자였다.

김옥균이 3세이던 해 집안이 천안으로 이사하여 아버지가 서당을 열고 훈장 노릇을 하였다. 생계를 위한 이사였던 것 같다. 김옥균은 어릴적부터 영특하여 3~4세 때부터 부모의 말벗이 되고,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여 그의 집 뜨락에는 항상 또래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는 1850년대 조선은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양선이 해안에 출몰하여 민심이 흔들리는 등 국정이 소연했다. 6세가 되는 해 아버지가 달을 가르키면서 글을 지어보라고 하니 그는 거침없이 '월수소조천하(月雖小照天下)' 즉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친다"고 지어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종숙(從叔)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당시 관례는 장남(손)은 양자로 보내지 않는데도 그는 양자로 입양되었다. 생활고였는지, 영특한 아들의 장래를 위한 아버지의 배려인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김옥균에게는 좁은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살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양부의 집에서 글공부를 하며 새로운 서울 친구들과 사귀며 자랐다. 그가 11세가 되는 해 양부가 강릉부사로 임명되자 김옥균도 따라 강릉으로 갔다. 강릉은 산천이 수려한 데다 율곡 이이가 살았던 지역으로 율곡서원과 송담서원이 있어서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라며 공부를 하였다.

김옥균이 수학 시절을 보내던 강릉은 우리나라의 명승지로서뿐만 아니라 이율곡의 고향으로서 영동지방에서 학풍의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양반 출신 유생들은 16세기 후반기 우리나라가 낳은 선진적 사상가인 이율곡의 사당이 있는 사액서원에서 유교 경전과 함께 특히 그의 저술인 <동호문답(東湖問答)>, <학교모범(學校模範)>, <성학집요(聖學輯要)>, <답성호원(答成浩原)> 등과 역대 우리나라 학자들의 학문적 유산을 섭취하고 있었다.

김옥균도 이 서원에서 수학하였다.
수학에 전력한 김옥균은 학문에서는 물론 남달리 문예, 서화, 음률에까지 능숙하여 서원 유생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온 고을에서 이채를 나타나게 되었다. (주석 1)

특히 송담서원의 교육은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송담서원이 율곡 이이의 학풍을 존중하여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율곡학풍을 교육시키던 서원이었으므로 이곳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근대지향적인 개혁사상과 애국애민사상을 형성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2)

양부는 6년 동안 강릉에서 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퇴임 때는 부민들이 애민비를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소년 김옥균은 이같은 환경에서 양부로부터 배우고,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유생들 그리고 특히 율곡의 경전과 삶의 체취를 느끼며 올곧게 성장한다.

김옥균은 그 나이로 보아 진취성이 강한 11~16세를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조국의 명승고적들을 열심히 답사하면서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무한히 사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양부 김병기로부터도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병기가 강릉에서 임기를 끝마치고 돌아올 때 그가 포악한 관리들과는 달리 백성들에게 선하게 대하여 주었음으로 하여 강릉 부민들은 그 귀임을 애석히 여기고 애민비(愛民碑)를 세워 그의 미덕을 찬양하였다고 하는 바 양부의 이러한 긍정적 면은 옥균의 정치적 안목을 계발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소년 시절부터 그의 유창한 시구와 생동한 그림은 동네 어른들의 절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가 그린 용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고 그가 그린 호랑이는 살아 달려나오는 것 같다고 감탄하며 사람들은 벌써 그를 비범한 소년으로 지목하였다. (주석 3)


주석
1> 오길보, <개화파의 형성과 그의 초기활동>, <역사연구소 편 김옥균>, 96~97쪽.
2> 정영희, <고균 김옥균의 생애와 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13)> 3쪽,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6.
3> 오길보, 앞의 책, 1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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