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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퇴직금 소송 이긴 전직 조연출 "방송계 변했으면"

법원, 노동자성 인정하며 KBC광주방송에 1700만 원 지급 판결... 방송국측은 항소

등록|2023.07.04 11:38 수정|2023.07.04 11:40

▲ 이슬씨가 사용했던 편집실 풍경. ⓒ 오마이뉴스


6월 중순, 방송 비정규직 현장에 유의미한 판결이 나왔다. KBC광주방송에서 일했던 한 프리랜서 AD(조연출)가 회사를 상대로 한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아 승소한 사건이다.

3년 전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가 '무늬만 프리랜서'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망한 이후, 법원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프리랜서 직군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선례가 있던 PD, VJ에 더해 방송작가, 아나운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법원에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AD 사례는 없었다. AD는 주로 방송계에 처음 진입하는 청년들이 일을 배우기 위해 잠시 거쳐 가는 자리처럼 여겨지는 데다 자주 교체되기도 하고 '프리랜서가 뭔지, 파견직이 뭔지' 노동법이나 고용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일을 시작하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KBC광주방송 전직 AD 이슬(36)씨도 같은 말을 했다. 방송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도 힘들지 않을 만큼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부조리를 느꼈다. 상사 전화가 오면 회사로 달려가야 했고 내 일이 아니어도 지시받으면 해야 했고, 다른 부서인 기술국 직원들마저 아무렇지 않게 잡일을 시키자 스스로 물었다. '이게 뭐가 프리랜선데?'

32세, 5년 10개월을 끝으로 방송계를 떠나면서 이씨가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던 이유다. '원고(이씨)가 이겼다'는 1심 판결문을 받는 데만 3년 2개월이 걸렸다. 회사는 지난 6월 27일 항소했다. 2심 선고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회사의 항소 소식을 접한 이씨는 지난 1일 기자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방송사들은 참 모순적입니다. 언론은 사회정의를 말한다는데, 이것은 부정의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법원 "'노동자' AD에게 퇴직금 1700만원 지급하라"
 

▲ 법원에 증거 자료로 제출된 업무 지시 카카오톡 대화 기록 중 일부. ⓒ 오마이뉴스


광주지법 민사21단독(최윤중 판사)은 6월 13일 광주방송이 이씨에게 퇴직금 1700여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2014년 3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5년 10개월 간 광주방송 노동자로 일했으니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는 이씨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졌다.

핵심은 업무의 종속성이다. 얼마나 사용자의 종속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일을 했는지 여부다. 조연출이란 말이 드러내듯, AD는 영상 제작, 촬영, 편집, 스튜디오 진행 등 전 제작 과정의 업무를 보조하는 인력이다. 대부분 방송사에 상주하면서 PD나 기자의 지시에 따라 일한다. 이들에겐 촬영·편집 방향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AD를 프리랜서로 채용한다. 이번 판결은 이 관행이 부당하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이씨는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회사의 태도였다고 했다. 그에게 광주방송의 반박 서면은 거짓투성이로 보였다. 광주방송은 이씨가 "평균(4주) 주 15시간 미만으로 일한 근로자"라고 했다. 주 15시간 미만 근로자는 퇴직금 대상에서 제외된다. 회사는 또 사내에 AD라는 공식 직책은 없고 출·퇴근 관리도 하지 않았으며, 이씨와 종속적인 지휘·감독 관계도 맺지 않았다고 밝혔다.

새벽 6시께 사전녹화가 시작되는 아침 프로그램을 내리 맡았던 이씨는 매일 혹은 격일로 새벽 4시께 출근해 오후 1~2시까지 일했다. 그 다음 날에도 보통 점심시간 후 출근해 밀린 영상 편집 업무를 봤다. 기자들의 감독 아래 예고영상, 자료영상, 코너영상을 만들었고, 종합편집이 이뤄질 땐 편집실에 상주하며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수정 지시를 이행했다. 다행히 이씨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5년 가량의 카카오톡 업무 기록을 대부분 갖고 있었고 법원에도 제출했다. 이씨는 "'주 15시간 미만'은 정말 불가능한 말"이라고 했다.

"한쪽이 그렇게 말했다고, 없는 사실이 '사실'이 되나?"라고 말하던 이씨는 "그러나 그게 되더라"면서 노동청 얘길 꺼냈다. 이씨가 법원보다 먼저 찾은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은 2020년 7월, "이씨가 주 15시간 이상 일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며 퇴직금 미지급을 무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노동청은 이씨가 법원에 낸 증거와 같은 자료를 제출받은 터였다. 검찰도 사건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무혐의로 처분했다.

이씨는 5년 10개월 동안 어떤 계약서도 써 본 적이 없었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문제를 수사한 노동청은 "회사에 불법의 고의가 없다"고 무혐의로 종결했다. "결과적으로 이씨를 근로자로 볼 수 있다 해도, 광주방송이 이씨를 근로자로 보고 채용한 적이 없고 이씨도 프리랜서임을 인식하고 일을 시작했고 근로계약서 미작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 40시간은 일했는데 15시간 일했다 하고, 근무시간에 자리에 없으면 문제가 됐는데 출·퇴근 관리를 하지 않았다 하고, AD라고 제작진 명단에도 적혔는데 AD가 아니라 FD였다고 하고, 기자들 지시를 받으면서 방송을 편집하고 촬영을 보조했는데 지휘·감독이 없었다고 말한다. 내 근무 모습을 지켜보고 지시도 했던 직원들이 방송사에 남아 있다. 아무리 소송이지만 이런 기본조차 부정해도 되나?"

이씨는 기초 사실부터 증거를 찾아가며 싸워서 입증해야 하는 현실에 "지난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며 "큰 방송사와 법적으로 다투는 프리랜서들이 모두 겪는 문제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언론사 문 앞에서 멈추는 정론직필

 

▲ 스튜디오 촬영 현장 자료사진 ⓒ 셔터스톡

   이씨가 법원에 낸 준비서면에는 '정론직필'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씨의 변호인도 다른 업계의 부조리엔 민감하고 자기 내부 문제엔 둔감한 언론계의 성찰 없는 태도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변호인은 그동안 쌓인 각종 방송계 노동자성 인정 판례와 방송계 프리랜서 남용 문제를 확인한 고용노동부 2021년 특별근로감독까지 증거로 제시하며 "정론직필을 말하는 회사가 아무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씨의 변호인은 선고 후 일부 지역 신문과 방송사들에 승소 사실을 알리렸으나, 판결은 지역 언론에선 보도되지 않았다.

AD 프리랜서 채용은 아직 팽배하다. 언론계 입사 지망생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언론인을 꿈꾸는 카페-아랑' 채용게시판을 보면 지난 5~7월 게시된 조연출 모집공고 30개 중 4개 공고만 1년 미만의 계약직 고용이었다. 나머지는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유튜브콘텐츠 제작사, 언론사 뉴미디어팀 등을 막론하고 모두 프리랜서 채용이었다.

이씨는 "모든 프리랜서들이 정규직 시켜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답게, 근로자는 근로자답게 일할 환경을 조성해달라는 것"이라며 "지금의 프리랜서는 이런 준비나 고민없이 회사의 편의대로 인력을 쓰고 버릴 수 있는 도구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여러 선례가 쌓이고 있다지만 근본적인 개선보다는 각종 편법 등으로 더 안 좋은 환경으로 바뀌는 것 같다"며 "방송계가 제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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