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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 사라진 세상? 더 편리해졌지만 덜 특별합니다

숙취 해소제와 내비게이션 시대에 아쉬운 점들

등록|2023.07.06 16:29 수정|2023.07.06 16:48
작은 애가 지난밤 과음을 했나 보다. 밤새 깊은 잠에 못 들고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대학에 간 뒤로 술자리야 자주 가는 듯했지만 아이가 숙취로 고생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술자리 때마다 '숙취해소제'를 미리 챙겨 마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인들이 먼저 건네기도 한단다. '숙취해소제'의 효과는 과연 믿을만해서 제법 많이 마신 날에도 지하철을 타고 말짱한 정신으로 귀가하곤 했다.

자녀의 늦은 귀갓길을 염려하는 부모로서 '숙취해소제'는 작은 애의 안전귀가에 기여하는 고마운 제품이다. 들어보니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마시는 액상형도 있지만 더 간편한 젤리형 스틱제품을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맛도 자몽이나 베리류 등 과즙이 첨가된 것도 있고, 음주 후 푸석해지는 피부 보호 성분까지 함유된 여성전용 제품도 있다 하니 그야말로 선택의 폭 또한 다양한가 보다.
 

▲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자리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나의 20대 ⓒ Unsplash


숙취해소제 덕분에 체력적 부담을 덜면서도 사람들과 마음껏 어울릴 수 있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좀 부럽기도 하다. 별 준비 없이 막무가내로 마셔댄 나의 20대 시절에 비춰보면 말이다. 술자리를 좋아했던 나는 두통, 오심, 속 쓰림 등에 자주 시달리는 일이 흔했다.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자리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기에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감수하며 말이다.

과음으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 또한 다반사였다. 분명 집에 간다고 일어섰는데 눈 떠보니 동기의 낯선 자취집이었고, 첫 차로 귀가하다가 깜빡 잠들어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적도 많았다. 몸을 못 가눠 동기 등에 업혀가기도 했고, 숙취로 끙끙 앓다 다음날 수업을 줄펑크 내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면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니 숙취해소제가 없었던 걸 꼭 아쉬워할 일만은 아닌지도.

어쩌면 오히려 좋은 점이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밤새 웃고 떠들다 정드는 일이 많았고, 다음 날 부스스한 몰골로 서로의 정신줄 놓은 일화들을 무용담처럼 나누다 보면 친밀감이 저절로 높아졌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경험들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자연스레 키웠던 것 같다. 내 정신이 혼미해도 안전할 수 있구나, 친구들에게 의지할 수 있구나, 세상이 살만하구나, 뭐 그런 믿음 말이다.

숙취로 골골거리다가도 그런 기분이 좋아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던 것 같다. 자고 나면 험한 사건이 뉴스를 도배하는 요즘, 속 편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걸 작은 애는 못 느끼는 시대인 것 같아 아쉽다. 숙취해소제 덕분에 언제든 온전한 정신을 챙길 수 있기에 사람과 어울려 사는 재미를 조금씩 잃고 있는 건 아닌지...

사는 재미라면 여행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헌데 여행의 성격도 나의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다르다. 목적지가 어디든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고, 모든 정보가 손 안에서 접속가능한 편리한 세상이다. 당연히 요즘의 여행이란 늘 예측가능, 통제가능이다. 그러니 여행의 중요한 기능이자 목적 중의 하나인 '완전한 낯섬'을 체험할 여지는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내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식당 
 

▲ 가족 여행을 멀리 가려면 전국 지도가 필수였다. ⓒ Unsplash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가족 여행을 멀리 가려면 전국 지도가 필수였다. 지도를 펴놓고 목적지까지 고속도로와 지방도를 따라 선을 그리고 경유하는 지명들을 모아 따로 메모하여 숙지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1m가 넘는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도로를 따라 뒹굴거리다 보면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들이 묘한 신비감으로 다가왔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괜한 정복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지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서도 막상 이정표를 놓치거나 길을 잘못 들어서 낯선 지역을 배회하게 되는 위기상황이 닥쳤다. 그럴 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매의 눈으로 방위를 살피고 공감각적 능력을 총동원해 길을 찾았다. 한 번은 그렇게 강원도 빽빽한 숲길을 헤매다 어느 골짜기의 막국수 집에 우연히 당도하게 된 적이 있다.

ㄱ자 모양의 옛날 시골집 식당이었는데, 맛집 정보도 여행책자에서나 찾을 수 있었던 당시에 신기하게도 방마다 자리마다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국수 기계가 부엌 옆에 떡 하니 놓여있어 연신 김 나는 연갈색 국수를 뽑아내는 광경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맛본 탱글거리는 비빔 막국수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한참을 고생한 뒤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걸까?

고소하다 못해 향긋하고 적당히 쫄깃, 감칠맛 나던 그 맛은 수십 년이 지나도 나의 오감에 깊이 새겨져 잊히지가 않는다. 이후 강원도 근처만 가도 그 막국수 집을 찾아봤지만 늘 실패였다. 길을 잃고 헤매다 들른 곳이라 도대체 어디쯤이었는지 감이 없고, 몇 년만 지나도 개발이 되어 온통 딴 세상이 되어버리는 통에 결국 그 식당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 여행은 일종의 가족 모험 여행이었다.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에 온 과정이 강렬했고 특별했던 것 같다. 그런 추억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추억을 언제든 되새길 수 있어 흐뭇하지만, 그런 경험이 더 이상은 흔치 않게 돼 버린 것 같아 허전하고 서운하다.

편리하고 안전한 삶이 무엇보다 중요한 세상에 시간을 줄여주는 각종 기기들과 정신을 챙겨주는 많은 약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환영하고 편리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너무 틈을 주지 않은 탓에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느끼는 인간미와 일상 속 작은 낭만들이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 점이 아쉽고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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