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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20억 손배의 유일한 정규직... "차라리 형사처벌이 낫다"

[노란봉투법⑨] '파기환송' 당사자 엄길정 "기쁘냐고? 파업 불법 판단은 그대로"

등록|2023.07.10 04:45 수정|2023.07.10 04:45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쟁의행위를 하면 수십, 수백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 '노란봉투법' 제정 요구가 커지고 있다. 다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이미 해를 넘겼다. 정부·여당·재계는 반대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의미를 살펴보는 연쇄 인터뷰를 진행한다.[편집자말]

▲ 지난 2010년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라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함께 했던 엄길정(51)씨가 5일 울산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났다. 그는 현대차가 제기한 20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 당사자 중 유일한 정규직이다. 지난 6월 15일 대법원은 엄씨 등 조합원 4명이 현대차에 2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던 원심을 파기환송해 파장이 일었다. ⓒ 김성욱


지난 2010년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사용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지만 원청인 현대차는 거부했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울산공장 라인을 세웠고, 현대차는 불법파업이라며 29명에게 20억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지난 6월 15일 무려 13년이 흐른 뒤에야 대법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에 2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던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개별 조합원마다 손배 책임의 정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국회 통과를 앞둔 '노란봉투법' 취지와 상통해 파장이 일었다.

13년이 지나는 사이 손배 소송 피고는 29명에서 4명으로 줄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대차 불법파견 관련 소송을 취하하고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사측은 이들에 한해서만 손배 소송을 없애줬다.

마지막 남은 4인 중 유일한 정규직. 엄길정(51)씨 앞에 붙는 수식어다. 1996년 입사해 차량의 하부 샤시 작업을 하던 그는 2010년 비정규직들의 파업에 동참했다. 엄씨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따로 있지 않고, 노조를 부수려는 사측에 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엄씨는 "손배는 기업들에겐 '만능'이고 '악마의 무기'"라면서 "노란봉투법은 얇은 보호막 정도"라고 했다. 그는 파업 등 노조활동을 계속하다 지난 2014년 해고된 상태다. 엄씨를 5일 울산 현대차 공장 앞 모처에서 만났다.

"13년 지나도 '불법'이라는 사법부... 말이 됩니까"
 

▲ 엄길정씨가 차고 있던 배지. '원하청 노동자 함께 싸우자'고 적혀 있다. ⓒ 김성욱


- 노동자들에게 20억원을 배상하라며 사측 손을 들었던 1·2심과 달리, 최근 대법원이 이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한 결과였지만 덤덤했다. 13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사법부는 철저히 자본 편이었다. 20년 넘게 불법파견을 한 현대차에게 지난 5월 처음으로 3000만원 벌금형이 떨어졌다. 현대차는 뻔히 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비정규직을 썼다. 계산하면 그게 훨씬 이익이니까. 그런데 그 큰 기업에 고작 3000만원? 만약 노동자가 불법이라는 걸 알고 라인을 점거했다면 어떻게 되나? 최소 집행유예, 징역형이다. 나도 두 번(2006, 2016년) 구속됐다. 사법부에는 기대도 없었다."

- 대법원이 개별 노동자마다 파업에 대한 손배 책임을 구별해야 한다는 새로운 판단을 내놨다.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파업이 '불법'이라는 판단에는 변함 없는 것 아닌가. 대법원이 불법파견이라고 해서 노동자들이 회사에 불법을 시정하라고 요구했건만 사측이 말을 안 듣고 버텼다. 어쩔 수 없이 파업했더니 하청은 원청에 파업할 수 없다고 '불법' 딱지를 붙였다. 13년이 지나도 똑같이 '불법'이란다. 이게 말이 되나? 이번 판결로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 2010년 파업 당시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파업에 왜 함께 했나.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조가 생기기 전 공장을 돌며 점심이나 저녁시간, 휴식시간 때 왜 노조가 필요한지 설명하고 다녔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데 차별 받으면 안 된다' '여러분이 바로 서야 현장이 바뀐다'고 말했다. 내가 해놓은 말을 지켜야 했다. 나는 비정규직 투쟁을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더 배웠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 현대자동차 노조를 비롯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한다.

"잃을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노사 담합 구조가 이미 오래 굳어진 상태다. 그나마 싸움을 이어가고 공장을 바꿔가고 있는 건 비정규직들이다. 그들은 이제 3중으로 싸워야 한다. 원청 자본, 하청 자본, 그리고 정규직 노조까지.

지난 10년여 동안 현대차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특별채용된 인원이 9000명이 넘는다. 이들도 조용하다. 처음엔 '10년 싸웠으니 피로가 누적됐겠지' 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연대의 흐름이 생길 거라고 봤다. 아니었다. 모두 회사에 흡수됐다."

"노란봉투법 후퇴 안돼... 민주노총, 소규모·비정규직에 더 힘 쏟아야"

- 20억 손배를 안고 10년 넘게 살았다.

"차라리 형사처벌 받는 게 낫다. 그래 봤자 경찰서 가서 조사받고, 빨간 줄 그어지고, 심하면 구속밖에 더 되나. 근데 손배는 아니다. 한번은 통장이 가압류됐더라. 은행에 갔더니 통장이 묶여있다는 거다. 고작 몇백만 원 들어있던 통장에 회사가 3억을 묶어놨다. 손배는 내 선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들 인생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노조활동 하는 사람들은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자기 이름으로 잘 못한다. 언제 가압류 잡힐지 모르니까.

집으로 무서운 등기들이 쉼 없이 날아온다. 가족들에게 '나를 찾는 등기가 오면 대신 받지 말라'고 했더니 한번은 현관문에 우체부가 남긴 '부재중' 딱지 5~6개가 한꺼번에 붙었더라.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문에 스티커 자국들이 남아있다. 20억이든 200억이든 내가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닐 뿐더러, 갚아 마땅한 돈도 아니다. 그 굴레에 마음 한켠이 늘 무거웠지만, 애써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 지난 2014년 해고됐다. 그간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


"라인을 세우고 파업을 했던 것 등이 '업무방해'라고 해고됐다.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차노조에서 생계비를 지급해왔다. 벌써 해고 10년 차다. 최장 기간 해고 기록이다. 처음 해고됐을 땐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직도 회사에서 피켓 들고 복직 요구를 하고 있다. 현재 현대차지부에서 나처럼 생계를 지원하는 해고자는 총 4명이다."
 

▲ 엄길정씨는 지난 2014년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됐다. ⓒ 김성욱


- 이번 대법원 판결이 노란봉투법 취지와 유사하다는 해석이 나왔다. 또 국회에서는 노란봉투법 통과를 앞두고 있다.

"후퇴하거나 타협해서 이도 저도 아닌 법이 되지 않길 바란다. 손배는 기업에겐 정말 악마의 무기다. 노조를 무너뜨리는 데 만능이다. 지난 20년간 기업들이 재미를 봤다. 수십억씩 손배 맞고 아파트, 급여 통장까지 가압류되는데 어떤 노동자가 버티겠나. 노동조합 '노'자도 못 꺼낸다. 노란봉투법은 그에 비하면 한참 약하다. 그저 얇은 보호막 한 겹 생기는 건데도 이 난리다.

다만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이 어느 순간 너무 법과 국회, 민주당에만 기대고 있는 것 아닌가 해서 불편하다. 10년 넘게 불법파견 반대 운동을 한 결과가 뭔가. 많은 이가 정규직이 됐지만, 현대차에는 여전히 1500명의 비정규직들이 있다. 나아가 현대차는 모비스, 글로비스 등 계열사를 만들어서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불법파견을 피해가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현대차 노조는 여기에 무슨 대응을 했나. 스스로 싸우지 않고 바뀌는 건 없다."

- 노란봉투법이 통과된다 해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걸로 예상된다.

"저들이 바뀌겠나? 내 입만 아프다.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오히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아닐까. 대통령이 거부권을 사용하는 순간 민주노총은 어떻게 하겠다는 선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정말 노란봉투법이 필요한 곳은 이미 노조를 만들었거나 노조가 강한 사업장들이 아니라, 노조를 만들기 어려운 소규모 사업장들이다. 과연 민주노총이 이런 곳들을 위해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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