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초등학교 5학년 그녀에게 생긴 일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비밀의 언덕>
▲ 영화 <비밀의 언덕> 포스터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이지은 감독의 전작 중 2018년 단편 <정리>를 본 기억이 난다. 독거노인과 자식의 빈자리를 대신한 돌봄 로봇의 황혼 이야기였다. 애잔한 정서가 일품이지만 그런 부류의 작업이 빠지기 쉬운 함정, 즉 감정 과잉으로 신파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이면서도 은은한 최루성이 돋보였던 작업이다. 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거나 그해의 단편으로 추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 후 찰나의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스쳐 지나는 감독이 사실 적지 않았기에 이 감독의 이름이 각인되진 않았다. 그래서 <비밀의 언덕>이 제법 화제에 오르내릴 때도 감독과 영화가 매치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각 관람 후 영화의 맛을 곱씹으면서 자연스럽게 전작과 장편 데뷔작이 품은 슬로 시네마의 정서는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엄마아빠 잘 만났으면 내가 이렇지 않을 텐데' 이런 상상 안 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런 와중에 아이들은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커나간다.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가면서 주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민감한 시기의 기억은 종종 혼란스럽거나 아전인수 격이 되곤 한다. 그걸 넘어서는 객관적 시야와 주체적 입장을 갖추는 과정, 그 창조를 위해 껍데기를 벗는 시간은 절박하고 치열하지만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여기에 그 분투를 시작하는 주인공이 있다.
명은의 성공시대는 유지될 수 있을까
▲ 영화 <비밀의 언덕>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때는 경제성장과 국위향상이 실감 나던 1996년, 여전히 세상은 바람 잘 날 없었지만 5학년 '명은'에게는 아직 그런 복잡한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다. 명은은 학급 반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늘 반장을 독차지하는 집안 좋은 남학생이 아니라 자기 같은 평범한 존재도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명은은 출마를 공들여 준비하지만 엄마 '경희'는 그런 건 형편 되는 집 아이들이나 하는 거라며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우리 같은 집은 감당할 수 없다며 포기를 종용한다. 반장이 아니라 반장 학부형이 더 바쁘고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은 거라는 잔인한 진실과 함께. 하지만 명은은 포기할 수 없다. 고심해 작성한 공약이 먹혀들었는지 명은은 반장선거에서 당선된다.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역시나 부모님은 시큰둥하다.
하지만 명은은 의욕적으로 반장 직무에 매진한다. 공약이던 비밀우체통을 이용해 소소하지만 실제로 유용한 변화를 만들어간다. 안 보는 책을 모아 작은 도서관을 교실에 설치하거나, 생일인 친구들에게 빠짐없이 롤링페이퍼와 축하 이벤트를 열어준다. 해외 펜팔과 영어 조기교육을 연결하는 기획을 제안하니 교무회의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한다. 명은은 잔뜩 일을 벌여놓는 바람에 남들보다 일찍 등교하고, 수업이 끝나도 담임선생님과 함께 이것저것 논의를 하느라 늦게 하교해야 하지만 자신이 주역이 되어 많은 발전이 이뤄지는 상황에 피곤함도 모른 채 매진한다. 무엇보다 담임인 '애란'이 자신을 신뢰하고 칭찬하는 게 기쁘다. 애란 또한 명은의 다양한 제안 덕분에 초임교사로 실수연발인 자신의 입지가 인정받는 게 흐뭇한 눈치다.
명은은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거듭 입상한다.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에 뛰어가 자랑을 하자 엄마는 흐뭇해하고, 아빠 '성호'는 우수상이 아니라 일등상을 타야지 하고 타박하면서도 오늘저녁엔 고기를 먹자고 한다. 명은의 성공시대는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꿀리지 않으려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현모양처'의 표본인) 전업주부라고 학급에서 밝힌 바, 동급생의 엄마를 식당에서 만나는 바람에 명은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런 위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학교 6학년인 오빠 '민규'는 명은이 부모의 직업을 거짓으로 소개한 증거를 확인하고 엄마와 아빠가 부끄럽냐며 동생을 힐책한다. 거기에다 전학을 온 이란성 쌍둥이 '혜진'은 명은의 자부심이던 글쓰기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 명은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든다. 담임선생님의 관심이 혜진에게 옮겨가는 것 같아 좌불안석의 시간이 닥친다. 명은 역시 더 노력하지만 혜진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계속 뒤처지자 전학생에 대한 라이벌 의식에 명은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지르고, 가족 내 불화도 심화된다. 명은은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문승아 배우의 발견
<비밀의 언덕>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바로 와닿지 않았다. 인연이 없는 작품에 속하는지 통 영화를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입소문이 괜찮다고는 하는데 갈수록 무거워지는 엉덩이를 불현듯 일으키기엔 2% 부족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계속 이 영화를 스쳐 지나치기만 하다 뒤늦게 영화를 보게 되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좋은 느낌으로 봤던 <흩어진 밤> 영화에서 어른들의 이혼 진행으로 혼란에 빠진 남매 역할을 맛깔나게 소화했던 배우 문승아다. 해당 작품으로 2019년 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배우상을 거머쥐며 화제가 되었던 아역배우다. 2009년생이니 당시 10살로 최연소 수상자였던 셈이다(영화는 2021년 개봉했다). 이후 2020년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도 유재명, 유아인이라는 관록의 성인 연기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배우가 또다시 단독 주연으로 나온 영화라니 갑자기 관심도가 급상승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몇 해 전에 주목했던 바로 그 배우가 오랜만에 반갑게 원탑으로 화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개 아역배우들은 영화제작과정과 공개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몰라볼 정도로 쑥쑥 성장하게 마련이라 몰라볼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데 문승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몇 해가 지나면서 쑥쑥 성장했지만 이 배우는 처음 보던 때의 그 얼굴과 눈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질감 없이 곧바르게 확대만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 정도의 긍정적 성장세라면 감독이 주연배우에게 잠재된 능력만 잘 뽑아만 내줘도 영화가 본전치기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아역연기자에게 이 정도로 신뢰감이 드는 건 쉽지 않은 경우긴 하다.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이 주목받아 마땅한 블루칩의 연기는 대단했다. 영화 속 '명은'은 안쓰러움과 밉상이 변화무쌍한 캐릭터다. 성인연기자라도 쉽게 소화하기 힘들 만큼 다채로운 단면을 지닌 존재다. 명은은 향상심이 대단한 존재이고 인정욕구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이 피곤한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지독히 근면-성실한 태도로 살아간다. 그 덕분에 명은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성취를 이룬다.
하지만 그런 성과와 비례하듯 명은은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만약 이 캐릭터가 성인이라면 주위의 비판을 감수해야 겠지만, 명은의 경우는 이제 막 자신의 처지를 어렴풋하게 직시하기 시작한 5학년에 불과하다. 모든 게 자신의 잣대로만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실수도 하고 욕심도 부린다. 이기적인 존재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우리가 유소년, 청소년 시절에 관대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리고 좌충우돌 질풍노도의 시간을 명은은 궤도이탈 없이 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 과정을 소화해 내는 배우의 비범함이 영화의 최우선 관람 포인트가 될 테다.
든든한 호위무사들의 존재감
▲ 영화 <비밀의 언덕>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여기에 독립영화를 넘어 영역을 확장해 가며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임선우, 장선, 강길우 배우가 아역배우 원탑을 든든히 전후좌우에서 지켜주고 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 역할은 이 관록의 배우들에게도 비교적 생경한 도전이었을 테다. 워낙 검증된 배우들이지만 자신들에게도 낯선 캐릭터를 소화해야 하는 건 물론, 아역 연기자를 마치 실제 주변 어른들처럼 세심하게 연기 합을 맞춰가는 것까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나름대로 영화가 시대물인 만큼 그 시절 실재했을법한 언행을 몸에 입히는 난이도를 다들 큰 탈 없이 소화해 낸다. 임선우 배우가 맡은 담임선생님은 초반엔 명은에게 오히려 덕을 보고 의지하듯 보이기도 하지만, '어른'의 역할을 본인 스스로도 익혀가면서 명은이 방황할 때 제대로 몫을 톡톡히 해낸다. 그 시절 교사들에 대해 우리 각자의 기억은 각기 다르게 마련이지만 어떤 이는 평생 누려보지 못했을 법한 이상적인 '인생의 교사' 역할을 자신의 성장과 함께 이뤄내는 캐릭터다.
여기에 추가로 인상에 남는 두 명의 교사가 존재한다. 교장선생님으로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약방 감초 캐릭터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각인된 배우 김승우의 캐릭터다. 교장선생님은 사회초년생 담임선생님이 지각할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대리수업을 맡는다. 비현실적 캐릭터라 해도 좋을 만큼 우리가 상상하는 교장과는 거리가 먼, 이상화된 캐릭터일 수도 있을 정도다. 그렇게 조금 드문 캐리커처 수준 조연인 줄 알았는데 영화 후반 명은의 결정적인 결단을 수용해주는 성숙한 어른2로 잔잔한 감동을 조성한다. 우리가 겪었던 현실의 교장선생님들은 대개 그렇게 배려해주지 않았었다는 씁쓸한 회고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정말 카메오 수준 등장이지만 명은이 풍파를 겪고 난 뒤 6학년이 되어 만나게 된 (역시 독립영화계에서 맹활약 중인 배우 이한주가 담당한)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선보이는 퍼포먼스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1년 동안 방황을 겪은 명은에게 선사된다.
여기에 서로 스타일이 확 대비되는 명은의 엄마와 아빠를 빼놓을 수 없다. 배우 장선이 맡은 엄마 경희는 그 시절 생활력 강한 실질 가장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량에 가까운 남편을 대신해 억척같이 가정을 지키면서 살림을 책임지는 존재, 그 때문에 자신의 꿈같은 건 애초 포기한 지 오래고 가족에게도 위악적으로 절약을 강요하는 어머니상을 난생처음 맡았지만 우직하게 풀어낸다. 그런 엄마에게서 문득 발견되는 희로애락을 은은하게 발산하는 관록에 시선이 끌린다.
여기에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 강길우는 근래 활동무대가 비약적으로 넓어진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어디에 갖다 놔도 찰떡 같이 역할을 소화하는 능력자인 만큼 본 작품에서도 건들거리며 아내의 속을 태우지만 정 많고 자식을 위하는 (권위적 가부장제의 폐단을 소거한) 전형적인 아버지상을 선보인다. 여기에 명은의 엄마와 관계가 서먹한 외할아버지 역으로 (치과의사로 퇴직 후 제2의 인생으로 전업배우가 된) 이동찬, 그리고 독립영화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곽진무가 '막내'의 동병상련으로 명은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외삼촌 역할로 호위무사 노릇을 제대로 수행한다.
<비밀의 언덕>은 눈여겨볼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배우들을 보는 매력이 만만찮다. 대개 단편경력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장편데뷔작에 다수의 카메오 우정출연을 등장시키곤 한다. 이 경우 의리출연이 적지 않은 바, 무리하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역할로 화면에 낭비적 요소가 되는 경우가 곧잘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들은 억지로 끼워 넣기 위해 투입했다기보다는 꼭 들어가야 할 안성맞춤 배역에 딱 맞춤형 모양새가 돋보인다. 또래 아역배우들 또한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감독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20-30세대 노스탤지어의 용감한 변주
<비밀의 언덕> 영화 자체는 근래 여기저기서 흔하게 관측 가능한 자기 세대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성장물이다. 본인 혹은 본인을 추상화한 주인공의 유소년, 청소년기를 배경으로 이런 부류의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을 택한다. 첫 번째는 잔인한 껍질 깨기의 서사다. 흔히 청소년기에 겪거나 목격한 한국적 현실의 극대화를 취하는 경로다. 왕따나 일진 같은 학원폭력, 청소년 시절에 더 민감하게 다가오게 마련인 상대적 빈곤과 뿌리 깊은 입시 문제 등이 극단화된 형태로 전시된다. 두 번째는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지만 그런 환경이 양념으로 쓰일 뿐, 과거 노스탤지어의 시간을 세밀하게 소묘하듯 그려내는 일군의 흐름이다. 특히 후자는 정치사회적 주제에 대한 강박에서 이탈한 청년세대가 어느새 자신들의 과거를 공유하는 세대적 흐름에 올라섰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자전적/사적인 경향 반영은 격동의 산업화/민주화시기를 지나면서 일면적으로는 안정되고 이면으로는 정체된 시간대를 공유하는 (독립영화 창작의 주요 세력인) 20-30세대적 특성을 필연적으로 반영하게 된다. 부모세대와 일상적으로 티격태격 갈등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 세대는 특이하게도 상대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자 그늘 겸 울타리가 되어주던 조부모 세대를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남매의 여름밤> 같은 영화가 대표적 예시다. 남들과 비교하며 윽박지르거나, 가정형편을 내세우며 꿈을 추락시키거나, 입시경쟁에 숨 가쁘게 내모는 부모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친근한 대상으로 조부모 세대가 등장하는 건 해당 세대가 아닌 이들에겐 제법 화제성이 큰 이슈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 큰 전제로는 이들 창작자들이 유독 10대 초반에 착목한다는 특징을 들 수 있겠다. 숨이 턱 막히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직전 혹은 초입에서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마련이다. 그 당시에는 의미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던, 하지만 돌아보면 각자의 현재 삶으로 이어지는 통과의례 격의 사건들이 주로 조명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미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린 희미한 옛사랑 같은 기억들, 그리고 지금의 자아에 영향을 준 생채기 같은 사건들에 대한 애잔한 향수는 여기에 필수로 탑재되는 요소다.
여기에서 이런 경향 관련 중요한 관건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는가에서 결착되곤 한다. 자기의 일기장을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할 때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내가 보여주고픈 점만 공개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저 인스타그램 감성에 그칠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자랑을 전시하는 데 굳이 타인이 그걸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대중에게 각인되고 기억될 이야기를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치부까지 아전인수가 아니라 공정한 척도에 기준해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고백을 위한 용기가 없다면 장식효과로 채워진 성공담 혹은 자기 연민으로 가득 포장된 비망록은 절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수많은 젊은 창작자들이 이 고지를 끝내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비밀의 언덕>에는 조금 더 특별한 것이 있다.
주인공을 통한 감독 본인의 반성적 성찰이 보편적 공감을 획득한 영화
▲ 영화 <비밀의 언덕>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감독은 극 중 주인공 명은을 통해 자신의 비밀이 가득히 채워진 일기장을 고백하려 한다. 명은이란 캐릭터에는 감독의 체험이 가득 녹여져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감정과 체험하게 되는 사건들은 개인만의 특수한 경험을 뛰어넘는다. 보편적으로 그 시절 그 또래들이라면 품어봤음직한 것, 칭찬받고 싶고 돋보이고 싶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물리적 환경을 뛰어넘고 싶은 익숙한 것들이 가득히 펼쳐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나도 주목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다. 타인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다. 그래서 무대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은 아이돌을 다들 그 또래엔 그렇게나 꿈꾸는 것 아닐까. 명은 역시 딱 그런 감정에서 출발했을 테다.
그렇게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명은은 노력한 만큼 성취도 얻어내지만 그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무간지옥에 빠지고 만다. 그런 도취와 중독에서 헤치고 나오기란 10대 초반의 아이에겐 지극히 어려운 노릇이다. 그렇게 그 나잇대 현실적인 고민에 휩싸여 때로는 이기적인 면모나 충동으로 자신은 물론 주변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용기 있는 사과는 쉽지 않기에 존중받는 것이다.
주인공 또한 어물쩍 넘어가는 과오가 적지 않게 드러난다. 하지만 누구라도 용기만 있다면 극복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처럼 명은 역시 반성과 노력으로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아무리 되바라진 것 같아도 초등학교 5학년의 시간은 실수연발의 시기이자 좌절을 통해 학습하는 정거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영화 속 명은의 모든 언행이 긍정적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색안경을 끼고 단죄해야 할 이유 또한 될 수 없다. 이 부분을 우회하지 않고 진솔하게 그려내는 게 본 작품의 미덕이자 감독의 각오인 셈이다.
그렇게 명은의 반전과 결단은 자연스럽게 감독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자 엇비슷한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회고의 기회로 전환된다. 전반까지만 해도 독립영화 챙겨보는 이들에겐 흔하디 흔한 양산모델처럼 비칠 수 있지만 후반으로 돌입하면 작가의 용기는 영화 속 주인공은 물론 그에 공감할 관객들, 그리고 감독 자신에게도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돌파력으로 승화된다. 우리들의 현재는 그런 과거들의 퇴적으로 형성된 것이니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런 노스탤지어 소환형식의 작품들이 처한 보편적 한계점을 <비밀의 언덕> 역시 유지하는 측면이다. 영화는 1996년이란 흥미진진한 시점을 설정했지만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시리즈보다도 해당 시기를 재현하는 측면은 약하다.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지 돌이켜본다면 주인공 명은의 성장담으로는 빼어난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해당 시기를 단순한 회고적 배경으로만 차용한 점이 조금 아쉽다. 아마 감독이 자신의 연령대에 맞춰 시점을 잡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 아닌가. 좀 더 여유롭게 지켜볼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으니 기다리는 수고가 아깝지 않아 보인다.
<비밀의 언덕>은 든든한 배우들의 2인3각 조화와 함께, 낭만적 무용담 혹은 과잉된 동정심으로 치우치기 좋은 근래 독립영화 경향성을 영리하게 가로지르는 감독의 각본 및 연출이 한데 모여 화학적 결혼을 이뤄낸다. 어느새 식상해진 비슷한 동류의 작업들이 가득 담긴 주머니 안에서 삐죽 돌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이 소중한 결실은 삶을 재정비해야 할 때 문득 발견하게 되는 추억의 일기장이자 청춘의 비망록으로 손색이 없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의 해답을 확인하는 순간, 명은의 소중한 비밀이 담긴 무엇인가처럼 우리 각자가 감춰둔 기억의 응어리를 끄집어내고야 말 테다.
<작품정보>
비밀의 언덕 The Hill of Secrets
2022|한국|드라마
2023.07.12. 개봉|122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 이지은
주연 문승아(명은 역), 임선우(애란 역), 장선(경희 역), 강길우(성호 역),
장재희(혜진 역)
출연 이동찬(기남 역), 곽진무(진우 역), 최현진(민규 역), 문서현(하얀 역),
김승욱(교장선생님 역), 하혜승(회장 엄마 역), 이한주(6학년 담임 역),
박성민(남사원 역)
제작 오스프링 필름
배급 (주)엣나인필름
해외배급 ㈜화인컷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후보
2022 19회 홍콩아시안영화제 '뉴탤런트상(New Talent Award)' 후보
2023 10회 캐나다한국영화제 구름상(관객상)
2022 23회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나봄상(감독상), 무주관객상
2022 4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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