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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감독과 동네 어르신들이 힘을 합쳐 만든 영화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작은 정원>

등록|2023.07.12 15:36 수정|2023.07.12 15:36
'한국독립영화'라는 참을 수 없는 모호함

'한국독립영화'라는 말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는 용어도 드물다. 대개 개념을 파악하기 헷갈리더라도 단어 자체에 주목하면 실마리가 보이는 편인데, 이 용어의 경우는 오히려 더 혼란해지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영화'의 조합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어려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3개의 단어가 조합되는 순간 일종의 패러독스가 형성되어버린다. '한국'과 '영화'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데, 중간에 '독립'이 끼어드니 방정식이 복잡해져 버린다. 중간의 '독립'이 대체 어떤 개념을 뜻하는지 혼란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이 모호하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사자성어처럼 이전의 선례를 찾아보게 마련이다.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20세기 중후반, 세상이 동서 냉전의 대립으로 구획되던 시절에는 뭐든 차이를 구분해 정리하던 그 시절 척도대로 해석이 간결했던 편이다. 1세계와 2세계로 나뉘어져 대립하던 냉전 시절, 1세계에서 독립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이 기준이었고, 2세계에서 독립은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독립에 가까웠다. 자본주의 시장구조 하에서 철저하게 수익을 내는 문화상품으로 규정당하는 것을 넘어 작가의 예술적 접근을 강조하는 게 1세계에서 독립을 위한 싸움의 명분이었다. 반면에 국가 검열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창작의 권리를 수호하는 게 2세계에서는 절실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독립'은 이 둘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현재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세대구분은 압축성장을 구현한 한국현대사처럼 전혀 다른 성격의 3가지 유형이 공존한다고 하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조부모 세대는 전형적인 3세계 빈곤국가로 출발했고, 부모세대는 마치 동구 사회주의권 계획경제처럼 경제개발에 동원되던 2세계 권위적 통치를 겪었다. 청년세대는 분명히 '선진국'이라 구분되는 국가들의 동 세대와 점점 닮은꼴 사고와 고민에 처하게 된 상태다.

그래서 과거 1세계 진영에 속했지만 실체는 3세계에 가깝던 시절엔 상업자본과 국가검열을 동시에 공히 상대해야 했다. 1공화국 시절엔 '임화수'로 대표되는 정치깡패가 영화제작을 독점하며 관제동원에 시달려야 했고, '반공영화', '국책영화'란 어두운 그림자는 정통성 없이 부당하게 권력을 독점한 정권과 함께 오랜 세월 계승되어 왔으니 말이다.

특히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사회참여와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한국독립영화는 창작자의 표현 자유 영역을 뛰어넘어 사회운동(혹은 반정부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영화운동'의 시간이 그렇게 도래한 것이다. 그런 배경 때문에 '독립영화'를 한다고 하면 '독립군' 나오는 영화냐고 반문하는 이들의 표현은 반드시 틀린 게 아닌 셈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식민지배와 투쟁하듯 독재정권에 맞서는 '진영'과 전면적으로 결합한 게 초창기 한국독립영화의 전통임은 부인할 수 없다.

형질변환의 과도기 속 한국독립영화의 다변화
 

"작은정원"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시네마 달


제도적 민주화가 확립되어가던 20세기 말을 경유하면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는 상당부분 해소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화된 검열이 정치권력이 채우던 빈자리를 순식간에 메운다. 여전히 바람 잘 날 없긴 하지만 한국사회가 체제 시스템적으로는 안정궤도에 일정부분 안착하면서 독립영화 또한 사회운동과의 연계나 적극적 참여보다는 창작자 개인의 자율적 판단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때가 되면 취업하고 결혼해 안정을 추구하는 주류적 삶이 아니라 문화예술에 종사하고픈 자유로운 영혼들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시청각 이미지의 총합인 첨단의 매력으로 그런 이들에게 비쳤졌기에 해당 분야로 진입하는 이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그러다 보니 고인 물처럼만 보이던 독립영화 '판'에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형이 들어서고 물갈이가 진행되는 중이다. 과거의 체제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란 구호는 자연스럽게 화석화되기에 이른다. 체제 시스템 바깥을 엿보거나 대안적 사회를 꿈꾸던 기운이 퇴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복적 상상력 대신에 독립영화 창작자들의 시야는 현 한국사회 체제 안에 머무르게 된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맴돌게 된 셈이다. 그게 딱히 문제라는 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이행이기 때문이다. 늘 거리에서 생업 팽개친 채 머리띠 두르고 어깨 걸 순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파생되기 시작한다. 19세기 말 탄생한 영화라는 대중예술은 기본적으로 상업적 상품으로 유통 및 거래되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비용 대 효과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도 제법 많이. 그래서 고비용 투자가 이뤄지면 영화는 순식간에 창작자가 아닌 투자자의 것으로 변모하고 만다. 거대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자신을 작가로 규정하더라도 상징일 뿐 실제 무게중심은 기울어진 운동장 격이다. 그런 지배적 경향에 독야청청하려는 이들이 '독립예술영화' 흐름에 참여하게 된다. 무 자르듯 단칼에 구분되진 않지만 그런 경향성으로 우리는 상업영화와 독립예술영화를 구분하곤 한다.

하지만 낭만적으로 예시되는 몇몇 사례처럼, 독립영화를 한다고 해도 방 보증금 빼서 영화를 1편 뚝딱 완성하기란 극히 희소한 사례가 된지 오래다. 아무리 아끼고 소박한 삶에 만족하더라도 상업영화 시스템 바깥에서 영화로 밥벌어먹고 살기란 기본적으로 베짱이의 겨울나기 같은 상황이다.

구구절절한 언급을 종합하자면, 2020년대 한국의 독립영화란 대개 이런 패턴을 밟는 식이다.

1) 아직 생계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거나 견딜만한 20-30세대 창작자
2) 영화영상 전공을 비롯해 일정한 관련교육 이수로 전문성 장착
3) 주로 공적자금에 기반을 둔 다양한 형태의 제작 지원제도 활용
4) 자기 세대의 체험이나 공통된 시각 혹은 관심사에 주목

그렇게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근본성격이 다소 탈각된 다양성 영화 형태를 갖추게 된다. 물론 여기엔 무수히 많은 다채로운 단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비율이나 추세를 놓고 보면 대강 이렇다 해도 심한 비약은 아닐 터이다.

이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작은정원"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시네마 달


그런 규정에서 상당부분 벗어난 영화가 있다. <작은정원>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포스터나 이미지 자료를 보면 근래 심심찮게 출현하는 실버세대 관찰 기록영화로 분류될 법하다. 이미 우리는 480여 만 관객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나 290여 만 관객 스코어를 쌓아올린 <워낭소리> 같은 한국독립영화 역대 1-2위 개봉작을 알고 있다(둘 다 다큐멘터리다). 본 작품은 그런 일군의 성공사례를 추종하는 형상으로 보이는 터이다 보니, 꽤나 유행 막차에 올라탄 변주로 규정하기 딱 좋아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조곤조곤 뜯어보기 시작하면 <작은정원>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간파하게 될 테다. 일단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재 한국독립영화판에서 창작자로도, 출연자로도 흔히 상정되지 않는 60-80대 고령 여성들로 작품 전체가 가득 채워져 있다. 영화의 연출을 포함한 기술 스태프가 필수불가결한 도움을 줬다는 건 명백하다. 그렇지만 영화의 뚜렷한 초점과 방향성은 명백히 기존 독립영화들에서 영화의 방향과 색깔을 규정해온 인적 네트워크와 별개로 존재한다.

② 서울 중심-대학 영화전공과 차별화된 창작활동에 기반을 둔 작업으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하다. 강릉에 터를 잡은 감독과 그 주변에서 프로 영화인 혹은 예술가의 원대한 꿈 대신 소박하게 영화/영상을 수련한 이들, 그들의 도움으로 인생 황혼기에 또래 다수는 인생에서 평생 누려보지 못해온 문화적 호사(?)를 누리게 된 이들이 서로 어우러진다.

③ 이들이 담아내는 작품의 내용은 최신 사회적 유행을 반영하거나, 요즘 독립영화 주요 향유집단인 청년세대의 기호와는 안드로메다 급으로 동떨어져 있다. 영화는 홍보자료의 표현처럼 지독하게 느릿느릿한 속도로 흘러간다. 주인공들이라 할 일단의 할머니 그룹이 실제 삶의 리듬감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에 충실하다. 그래서 숨 가쁜 속도감과 리드미컬한 편집감이라는 동 세대 독립영화들의 스타일을 행여나 기대한 이들이라면 그들의 예상치를 온전하게 뒤집어 놓는다. 그렇다고 알고 보니 대단한 비밀을 숨겨두고 조심스레 풀어놓는 두뇌퍼즐 게임도 아니다.

그저 이 영화는 우직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슬로 라이프를 찬찬히 늘어놓을 뿐이다. 그 직진에 설마 했던 관객은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분명히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현재 한국독립영화의 핵심 '소비자 집단'을 상정하고 작업을 한 게 아니다. 그 지점은 확고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주식거래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작은정원>을 표상하는 세 부류의 얼굴이 각자 지분을 공유하며 화면에 출연한다.

<제1주주>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동네 노년여성들의 소모임 '작은정원'이다. 이들은 길게는 70년, 짧게는 35년 이상 한 동네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왔다. 그런 8명의 노년 여성들이 동네 미화에서 출발해 사진촬영과 영화제작을 배워가면서 품위 있고 흥겨운 노후를 보내게 된 경과, 그리고 이들이 배움의 길을 놓지 않으면서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가능한 변화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이들은 사진을 배운 뒤 정지화면 말고 활동사진에 욕심이 났다. 그래서 단편 극영화를 제작해 영화제에서 상영되기에 이른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욕망은 충족될수록 증폭되게 마련이다. 이들은 다음 정거장으로 뚜벅뚜벅 전진한다.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피사체로 전시되는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 참여자로 활약한다. 그렇게 장편 다큐멘터리의 주역으로 할머니들은 진화를 거듭 이어간다.

<제2주주>
그런 '작은정원' 그룹의 손뼉에도 맞장구가 필요하다. '디지털 소외'라는 신조어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지 오래인 세상이다. 촬영도 편집도 이들이 아무리 재교육을 받는다 해도 온전히 다 소화하기엔 한계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손뼉을 마주치지 않으면 파문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런 핵심첨가제 역할이 바로 이 영화를 제작한 지역영상집단의 소임이다. 독립다큐멘터리 계에서 오래 활동한 이마리오 감독은 10여 년 전 영화제작의 중심지인 서울을 떠나 강원도 바닷가로 이주한다. 그 이후로 10년 넘게 지역에서 영화 제작은 물론 다양한 영화 관련 활동으로 한국 자본주의 핵심에서 빗겨난 강릉이란 동네에 이채로운 채색을 더하는 중이다. 그런 괴짜 감독과 그가 양성해온 영화동료들이 할머니들의 손뼉에 화답했다. 스스로 문을 두드린 부담스러운 제자들에게 사진을 가르쳤고, 영화 제작에 대해 전수했다. 한국 대부분의 '지방'에선 불가능한 사례다.

<제3주주>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어쩌면 배후의 큰손일지도 모를 존재는 바로 영화 속 풍경으로 자리 잡은 강릉 명주동 일대 동네라는 공간이다. 검색하면 금방 소개 글이 주룩 떠오르는 지역명소 봉봉방앗간을 비롯해 주인공 그룹이 일평생 살아온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지방도시 중에도 변두리다. 하지만 정감 가는 골목 곳곳에 이들이 가꾸는 화분과 화단이 촘촘히 채워지고, 시선을 기울이면 그곳엔 어김없이 '작은정원' 로고가 한 쪽 구석에 새겨져 있다. 집이란 공간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면 기이할 정도로 금방 쇠락한다고 하는데 그런 보살핌 덕분인지 이 작은 초 고령화 사회에선 그 속도가 지극히 느리게 흘러간다. 물론 사람이 살며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작은정원' 멤버와 조력자들이 위치한다.

관객이 이윽고 발견하게 되는 사려 깊은 '슬로 무비'의 매력
 

"작은정원"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시네마 달


영화는 할머니들이 사진과 영상을 배워가는 과정과 함께 이들이 관광 핫 플레이스가 된 명주동 일대를 관리하고 여생을 보내는 풍경으로 가득하다. 손자손녀 세대 관광객들에게 DSLR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기술을 뽐내는 풍경은 우리가 조부모 세대에 기대하기 어려웠던 역전현상으로 놀라움을 주면서도 괜히 정겹게 다가온다. 늘 피사체로 머물게 마련이던 이들이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으로 손수 작업한 단편영화를 세상에 선보이는 광경은 더없이 흐뭇하고 뭉클하다. 이들은 2019년에 연출한 데뷔작 단편극영화 <우리동네 우체부>로 서울에서 열린 영화제 수상에 이른다. 그 낯설지만 짜릿한 쾌감이 주인공들의 다음 행보를 결정해버린다.

자신들을 '언니'라 부르는 지역 영화인들의 조력에 힘입어 이들은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기준점이 높아질수록 이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난관도 도래한다. 유독 (조)부모세대의 휴대전화나 SNS 계정에는 꽃 사진이 많다는 것을 문득 발견하는 경험처럼, 이들 역시 (동 세대 한국 지방도시 여성들 대부분이 거쳐 온 삶처럼)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풀어볼 기회가 없던 이들이다. 꽃을 포함한 식물에 대한 애착은 곧 자신들의 정체성과의 연결로 이어지는 셈이다.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교감하기를 포기한 채 묵묵히 조력자로 희생하는 삶을 살아온 '언니'들의 시간은 영화 제작과정에 예상하지 못한 난관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동료들을 인터뷰해 오라고 했는데 막상 촬영하려니 엄두가 안 나는 현상이 차례로 발생한다. '대면'의 어려움이 '언니'들에겐 심각한 질곡이다. 난생 처음 해보기 때문이다. 고가의 전자기기 다루는 건 더듬더듬 배우면서 익히면 되더라도,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의 장벽을 뛰어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다. 끙끙 앓는 '언니'들의 풍경은 의외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결국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이들 세대에게 오히려 익숙한 해법을 창안한다. '숙제'를 낸 것이다. 가부장제와 권위주의 시스템에 익숙하다 보니 적당히 통제수단이 되어주는 숙제 풀이에 골몰하며 한계를 극복하기에 이른다. 씁쓸하지만 신선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관객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내적 긴장을 어찌어찌 해소해가며 '언니'들은 영상으로 자신과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이들을 기록해나간다. 그 과정 자체가 영화가 된다. 자신과 가족, 자녀들에게 차례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평생 함께 살았지만 '직면'하지 못했던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 찬찬히 그려진다. 그게 영화의 전부다. 형식 구성 측면에선 몇 가지 과제를 각자 소화한 내용 발표에 가깝다. 그런 패턴이 반복된다. 그래서 기상천외하고 밀도 높은 스릴과 미스터리, 스펙터클을 영화에 기대한 이들이라면 번지수가 제대로 틀렸다. 영화를 보게 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은 제쳐두고 일단 이 영화에 참여한 이들이 긍정적 변화를 겪으며 변화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목격된다. 상업영화 패턴에 길들여진 관객의 뇌리를 강타하는 독립다큐멘터리 영화의 대안적 매력을 뒤늦게 깨닫는 찰나다.

SIMPLE, SMALL, but GREAT!
 

"작은정원"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시네마 달


하지만 그런 순간의 반복이 점점 관객의 마음속에 스며들 듯 자리를 잡는 순간, 영화는 낯선 시공간 체험으로 길잡이 노릇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식상한 유행과 과잉된 속도에 중독된 대도시 거주자들이 도시적 문화체험과 별개로 작동하는 '지역영화'의 속도감에 생경하지만 특별한 체험을 해볼 기회는 흔치 않다. 그래서 처음엔 어어 하면서 예상할 수 없는 영화의 전개속도에 당혹할 테지만 우리가 '치유', '힐링' 장르라 구분하는 문화적 경향에 곧 접속하게 될 만하다. 한없이 느리고 반복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치 '언니'들을 옆에서 관찰하게 되듯이 관객은 강릉 명주동 동네 주민이 된 것처럼 간접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절차를 거쳐 한국사회 곳곳에 수도권 외에도 숨겨진 좋은 공간이 많이 있으며 그 공간을 지키는 평소엔 막상 관계를 맺지 않던 세대의 존재를 발견하고 만다. 인식하게 되었으니 '언니'들이 사진 배운 김에 영화까지 느릿느릿하지만 확고하게 전진한 것 마냥 관객 또한 소통을 위해 고민할 차례다.

(좀 많이 나가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 몇 개의 테마로 주역들이 차례로 카메라를 응시하거나 조작하면서 선보이는 애틋한 정경은 하나의 지향으로 제시되었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제3영화의 가능성을 실낱같이 소환하게 만든다. 자본의 내적 규제도, 권력의 검열 통제도 벗어나 제한되지 않는 형식과 내용으로 생산자-소비자 구도를 극복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영화-미디어 운동의 소소한 실천의지가 괜히 연상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거나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회적 약자 혹은 소외집단에 속하는 당사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개방되는 셈이다. 게다가 지역밀착으로 본인을 포함해 그 영화를 보여주고픈 이들에게 선보이는 DIY 스피릿에 충실한 작업이기도 하다. 해당 작업은 서울을 벗어난 변방에서 문화소외계층이 자신들의 발화로 완성해낸 결실로서 기존 독립영화의 주류적 문법 및 범위를 확장하거나 초월하려는 태도를 명확히 견지한다.

실은 이런 종류의 도전은 현재 한국독립영화의 (지원사업에 선정 ⇒ 영화제 출품 ⇒ 배급 및 상영이라는) 정석적인 경로를 벗어나 활발하게 실험되는 중이다. 전국 곳곳에 점처럼 자리 잡은 지역영상집단이나 미디어센터, 독립영화단체들이 해당 기능의 지원세력으로 티 나지 않지만 필요충분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다. 영화의 예술성이라는 고준담론에서 살짝 우회하는 형태로 문화-복지 혹은 지방자치, 풀뿌리 민주주의 차원에서 이런 실험은 전국 곳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일어나는 중이다. 이런 유형의 영화 작업이 점점 늘어가는 가운데 성과가 어떻게 수렴되고 보다 넓게 소개될 것인지 화두를 던지는 측면에서도 <작은정원>의 성과와 활용에 주목할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아마 다음 순번은 '실버세대'가 독창적인 매력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영화로 완성하는 순간일 테다. 곧 도래할 미래다.

<작품정보>

작은정원 Little Garden
2022|한국|할머니 성장 영화
2023.07.12. 개봉|86분|전체관람가
연출 이마리오
출연 문춘희, 김희자, 박정례, 김숙련, 김혜숙, 故 최정숙, 정옥자, 최순남
제작 아나레스
배급 ㈜시네마 달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 페스티벌 초이스 (집행위원회 특별상)
2023 15회 서울국제노인영화제 – 한국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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