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으로 몰려 암살된 장보고, 운명 바꾼 선택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해양상업 제국의 제독이자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드윈 오 라이샤워 교수가 논문에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780년대 이후~841년 추정)에게 내린 평가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후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 당나라로 넘어가 벼슬살이를 했고, 고향인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해상왕'으로 등극했다. 한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새 국왕을 옹립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지만, 암살로 허무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기까지, 영화보다 영화같았던 그의 일대기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7월 12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해상왕 장보고는 왜 역적으로 몰려 암살됐나'편을 통하여 장보고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장보고는 780년대 후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 일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의 본명은 '궁복(弓福)', 우리말로 풀이하면 '활보(활을 잘 쏘는 아이)'였다고 한다. 장보고는 이름처럼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무예에 능했고, 10살 어린 정년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성장한 장보고는 출세를 위하여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기로 결심했다. <삼국사기>가 장보고의 출신을 알 수 없다고 서술한 것과 굳이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서 벼슬살이까지 한 기록을 감안할 때, 그는 신라의 지배계층인 골품제에서 벗어난 평민 이하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당나라는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기용하기도 하고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등 비교적 이민족에 개방적인 국가였다. 신라에서 미래가 없었던 젊은 장보고에게는 당나라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한다. 무령군은 서주 일대를 다스리던 절도사가 지휘하던 군대였고, 외국인 용병을 적극 기용하여 고위직까지도 가능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장보고로 이름을 개명했던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왕실이나 귀족들만 성씨를 가지고 있던 신라와 달리, 당나라는 평민들도 성을 사용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자리잡기 위하여 당시 가장 흔했던 장씨를 선택했다.
장보고가 당으로 건너간 지 5년 만에 그에게 출세의 기회가 찾아온다. 산둥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의 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치청군이 당나라에 반기를 든 것. 장보고와 정년은 무령군의 일원으로 이사도 토벌의 선봉에 서게 된다.
4년에 걸친 전쟁은 무령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보고는 이 전쟁에서 맹활약을 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말을 타고 창을 쓰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조정은 장보고와 정년의 공을 인정하여 두 사람을 무령군 군중 소장으로 임명한다. 현대라면 천여 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연대장 혹은 여단장급 간부가 된 것, 장보고가 신라를 떠나올 때 세웠던 출세의 꿈을 이뤄낸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821년 돌연 안정된 당나라 군대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걷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사도의 난을 진압한 이후 당나라 조정에서 군사력을 축소하면서 장보고도 군대에서는 그 이상의 출세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의 경험과 신라방에서의 재당 무역상 등을 통하여 당과 신라, 일본 등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의 발전가능성을 확인하고 상인의 길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장보고는 산둥반도 신라방에서 무역상으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고, 재당 신라인들을 위한 사찰인 적산법화원을 건립한다. 아직도 중국에 건물이 건재한 법화원에는 장보고를 기념하는 동상도 세워져있다. 당시 이곳은 재당 신라인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었을뿐 아니라 외교관리나 무역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기능도 했다고 한다. 장보고는 법화원을 통하여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역에 필요한 인맥과 정보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삼국에서 두루 지지를 받은 장보고
828년, 승승장구하던 장보고는 이번에는 고국 신라로의 귀국을 결정했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무역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바다를 위협하는 해적들의 존재였다. 해적들은 상선을 탈취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판매하며 인근 국가들의 공통된 골칫거리로 자리잡았다. 정작 당나라는 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타국에서 일개 상인이자 외국인에 불과했던 장보고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해적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신라 조정을 찾은 장보고는 당시 42대 국왕이던 흥덕왕을 만난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중국으로 잡아갈 수 없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신라 조정 역시 해적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소탕할 여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를 알고 있었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청해진 설치와 군 지휘권을 주면 자신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제안하며 본심을 드러낸다. 왕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통하여 합법적인 군사활동의 명분을 얻고 신라에서의 무역기반을 다지기 위한 장보고의 전략가적인 안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고 1만의 군사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린다. 장보고는 이미 당나라에서 무령군과 재당 무역상으로서의 활약상을 통하여 신라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해상 장악력이 약했던 신라 조정으로서는 신라인에 바다 출신, 군 경험까지 갖춘 장보고는 충분히 활용가치가 높은 존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흥덕왕은 장보고가 평민 출신이라 특별한 관직을 내리기 어려웠기에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청해진 대사라는 특별직을 신설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청해진은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에 위치했다. 청해진은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로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동아시아 삼각무역의 중심지로 완벽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트여있어서 해적선 감시에도 용이했다. 장보고가 평생의 꿈을 이루기에 가장 최고의 장소가 바로 청해진이었던 것.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해적들을 소탕하고 인근 바닷길을 평정했다. 이후 당나라에서 측근이던 정년도 돌아와 장보고 진영에 합세한다. 장보고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활발한 해상국제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장보고의 거점인 청해진은 9세기 당시 세상의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 무역항으로 자리잡았다. 장보고는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장신구에 활용되는 비취모(물총새) 깃털, 대모 머리빗 등 온갖 진귀한 물품들을 수도 서라벌을 비롯한 전국에 진상하며 자신의 명성과 입지를 드높였다.
이 무렵 장보고의 명성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해외 기록에도 그의 이름과 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발간된 <번천문집>에 따르면 "장보고는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이 있으니, 그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장보고가 단순히 이익만 쫓은 것이 아니라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두루 지지를 받으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망을 형성할 수 있었던 증거다.
장보고의 인생을 바꾼 선택
837년 5월, 장보고의 인생을 바꾸게 될 또 한번의 운명이 찾아온다.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우징이 장보고를 찾아온 것.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던 신라는 귀족세력이 득세하면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흥덕왕 사후, 유력한 왕위 후계자로 꼽히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정적들에게 피살되고 살아남은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것. 김우징은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올 당시 시중(국무총리)이였고, 흥덕왕과의 만남이나, 청해진 건설 등에서 장보고의 후원자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는 고심 끝에 김우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는 곧 신라 왕실과는 적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신라 중앙정계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흥덕왕이 사망하고 집권했던 희강왕이 1년여 만에 사망하고 민애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민애왕은 김우징에게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앞장선 철천지원수였다.
기회를 엿보던 김우징은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실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칫하면 반역자로 몰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장보고는 "의를 따르지 않으면 용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라고 기꺼이 김우징의 편에 설 것을 선언한다. 김우징을 왕위에 올린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올라갈 것이라는 야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김우징은 그 보답으로 훗날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장보고의 딸과 혼인시키겠다고 약조한다.
838년, 장보고는 측근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서라벌로 진격시킨다. 장보고군은 이듬해 '달벌전투'에서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민애왕을 제거한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니 바로 신라 45대 신무왕이다.
즉위한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기려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천호를 하사했다. 이는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꼽히는 김유신이 받았던 식읍의 4배로 당시 장보고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장보고는 신라에서 최고의 지위와 재산을 겸비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신라 중앙 귀족들은 평민 출신인 장보고의 득세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장보고 역시 귀족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839년 7월, 신무왕이 즉위 6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장보고의 운명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문성왕은 선대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과 지위를 가진 장보고가 왕실과의 혼인으로 거대한 외척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견제했고, 장보고의 약점인 비천한 신분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대했다. 문성왕은 결국 장보고 측과의 혼약을 포기한다.
841년(혹은 846년),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장보고가 돌연 근거지인 청해진에서 염장이라는 인물에 암살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왕이 딸을 차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신라 중앙조정에서는 청해진에서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장보고의 존재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가 혼인 문제로 왕실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염장은 바로 신라 조정에서 내려보낸 자객이었다.
염장은 장보고의 쿠데타 당시 함께 종군하며 신무왕을 옹립하는 공을 세운 경력이 있었다. 염장은 왕실을 찾아와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한 명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제안한다. 장보고의 군사력을 두려워했던 신라 조정은 염장의 제안을 수락한다. 염장은 장보고를 찾아와 청해진에서 일하겠다고 제안했고, 장보고는 함께 뜻을 같이했던 염장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방심한 장보고는 술에 취한 채 염장에게 살해 당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해상왕의 일대기는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로 막을 내린다.
장보고 사후에 염장이 그 세력을 흡수하여 청해진을 물려받았지만, 청해진의 주민들은 염장을 인정하지 않고 당나라와 일본 각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851년에 이르러 장보고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청해진은 끝내 폐쇄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삼국사기>의 많은 기록들이 의문점으로 남은 것처럼, 현대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정말 반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국익에 막대한 기여를 하던 장보고와 청해진의 몰락은, 이후 신라 역시 차츰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징조였다. 청해진의 엄청난 경제적-전략적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옹졸하고 편협했던 신라 지배층의 한계가 초래한 비극이었던 셈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해상왕의 자리까지 등극한 장보고의 신화는 후대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훗날 왕건-견훤 등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대를 앞서간 장보고의 도전정신과 과감한 결단력이 오늘날까지 재조명되는 이유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후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 당나라로 넘어가 벼슬살이를 했고, 고향인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해상왕'으로 등극했다. 한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새 국왕을 옹립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지만, 암살로 허무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기까지, 영화보다 영화같았던 그의 일대기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장보고는 780년대 후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 일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의 본명은 '궁복(弓福)', 우리말로 풀이하면 '활보(활을 잘 쏘는 아이)'였다고 한다. 장보고는 이름처럼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무예에 능했고, 10살 어린 정년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성장한 장보고는 출세를 위하여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기로 결심했다. <삼국사기>가 장보고의 출신을 알 수 없다고 서술한 것과 굳이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서 벼슬살이까지 한 기록을 감안할 때, 그는 신라의 지배계층인 골품제에서 벗어난 평민 이하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당나라는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기용하기도 하고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등 비교적 이민족에 개방적인 국가였다. 신라에서 미래가 없었던 젊은 장보고에게는 당나라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한다. 무령군은 서주 일대를 다스리던 절도사가 지휘하던 군대였고, 외국인 용병을 적극 기용하여 고위직까지도 가능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장보고로 이름을 개명했던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왕실이나 귀족들만 성씨를 가지고 있던 신라와 달리, 당나라는 평민들도 성을 사용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자리잡기 위하여 당시 가장 흔했던 장씨를 선택했다.
장보고가 당으로 건너간 지 5년 만에 그에게 출세의 기회가 찾아온다. 산둥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의 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치청군이 당나라에 반기를 든 것. 장보고와 정년은 무령군의 일원으로 이사도 토벌의 선봉에 서게 된다.
4년에 걸친 전쟁은 무령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보고는 이 전쟁에서 맹활약을 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말을 타고 창을 쓰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조정은 장보고와 정년의 공을 인정하여 두 사람을 무령군 군중 소장으로 임명한다. 현대라면 천여 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연대장 혹은 여단장급 간부가 된 것, 장보고가 신라를 떠나올 때 세웠던 출세의 꿈을 이뤄낸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821년 돌연 안정된 당나라 군대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걷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사도의 난을 진압한 이후 당나라 조정에서 군사력을 축소하면서 장보고도 군대에서는 그 이상의 출세가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의 경험과 신라방에서의 재당 무역상 등을 통하여 당과 신라, 일본 등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의 발전가능성을 확인하고 상인의 길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장보고는 산둥반도 신라방에서 무역상으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고, 재당 신라인들을 위한 사찰인 적산법화원을 건립한다. 아직도 중국에 건물이 건재한 법화원에는 장보고를 기념하는 동상도 세워져있다. 당시 이곳은 재당 신라인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었을뿐 아니라 외교관리나 무역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기능도 했다고 한다. 장보고는 법화원을 통하여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역에 필요한 인맥과 정보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삼국에서 두루 지지를 받은 장보고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828년, 승승장구하던 장보고는 이번에는 고국 신라로의 귀국을 결정했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무역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바다를 위협하는 해적들의 존재였다. 해적들은 상선을 탈취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판매하며 인근 국가들의 공통된 골칫거리로 자리잡았다. 정작 당나라는 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타국에서 일개 상인이자 외국인에 불과했던 장보고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해적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신라 조정을 찾은 장보고는 당시 42대 국왕이던 흥덕왕을 만난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중국으로 잡아갈 수 없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신라 조정 역시 해적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소탕할 여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를 알고 있었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청해진 설치와 군 지휘권을 주면 자신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제안하며 본심을 드러낸다. 왕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통하여 합법적인 군사활동의 명분을 얻고 신라에서의 무역기반을 다지기 위한 장보고의 전략가적인 안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고 1만의 군사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린다. 장보고는 이미 당나라에서 무령군과 재당 무역상으로서의 활약상을 통하여 신라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해상 장악력이 약했던 신라 조정으로서는 신라인에 바다 출신, 군 경험까지 갖춘 장보고는 충분히 활용가치가 높은 존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흥덕왕은 장보고가 평민 출신이라 특별한 관직을 내리기 어려웠기에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청해진 대사라는 특별직을 신설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청해진은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에 위치했다. 청해진은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로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동아시아 삼각무역의 중심지로 완벽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트여있어서 해적선 감시에도 용이했다. 장보고가 평생의 꿈을 이루기에 가장 최고의 장소가 바로 청해진이었던 것.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해적들을 소탕하고 인근 바닷길을 평정했다. 이후 당나라에서 측근이던 정년도 돌아와 장보고 진영에 합세한다. 장보고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활발한 해상국제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장보고의 거점인 청해진은 9세기 당시 세상의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 무역항으로 자리잡았다. 장보고는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장신구에 활용되는 비취모(물총새) 깃털, 대모 머리빗 등 온갖 진귀한 물품들을 수도 서라벌을 비롯한 전국에 진상하며 자신의 명성과 입지를 드높였다.
이 무렵 장보고의 명성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해외 기록에도 그의 이름과 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발간된 <번천문집>에 따르면 "장보고는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이 있으니, 그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장보고가 단순히 이익만 쫓은 것이 아니라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두루 지지를 받으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망을 형성할 수 있었던 증거다.
장보고의 인생을 바꾼 선택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837년 5월, 장보고의 인생을 바꾸게 될 또 한번의 운명이 찾아온다.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우징이 장보고를 찾아온 것.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던 신라는 귀족세력이 득세하면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흥덕왕 사후, 유력한 왕위 후계자로 꼽히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정적들에게 피살되고 살아남은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것. 김우징은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올 당시 시중(국무총리)이였고, 흥덕왕과의 만남이나, 청해진 건설 등에서 장보고의 후원자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는 고심 끝에 김우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는 곧 신라 왕실과는 적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신라 중앙정계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흥덕왕이 사망하고 집권했던 희강왕이 1년여 만에 사망하고 민애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민애왕은 김우징에게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앞장선 철천지원수였다.
기회를 엿보던 김우징은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실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칫하면 반역자로 몰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장보고는 "의를 따르지 않으면 용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라고 기꺼이 김우징의 편에 설 것을 선언한다. 김우징을 왕위에 올린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올라갈 것이라는 야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김우징은 그 보답으로 훗날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장보고의 딸과 혼인시키겠다고 약조한다.
838년, 장보고는 측근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서라벌로 진격시킨다. 장보고군은 이듬해 '달벌전투'에서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민애왕을 제거한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니 바로 신라 45대 신무왕이다.
즉위한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기려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천호를 하사했다. 이는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꼽히는 김유신이 받았던 식읍의 4배로 당시 장보고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장보고는 신라에서 최고의 지위와 재산을 겸비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신라 중앙 귀족들은 평민 출신인 장보고의 득세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장보고 역시 귀족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839년 7월, 신무왕이 즉위 6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장보고의 운명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문성왕은 선대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과 지위를 가진 장보고가 왕실과의 혼인으로 거대한 외척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견제했고, 장보고의 약점인 비천한 신분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대했다. 문성왕은 결국 장보고 측과의 혼약을 포기한다.
841년(혹은 846년),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장보고가 돌연 근거지인 청해진에서 염장이라는 인물에 암살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왕이 딸을 차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신라 중앙조정에서는 청해진에서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장보고의 존재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가 혼인 문제로 왕실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염장은 바로 신라 조정에서 내려보낸 자객이었다.
염장은 장보고의 쿠데타 당시 함께 종군하며 신무왕을 옹립하는 공을 세운 경력이 있었다. 염장은 왕실을 찾아와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한 명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제안한다. 장보고의 군사력을 두려워했던 신라 조정은 염장의 제안을 수락한다. 염장은 장보고를 찾아와 청해진에서 일하겠다고 제안했고, 장보고는 함께 뜻을 같이했던 염장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방심한 장보고는 술에 취한 채 염장에게 살해 당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해상왕의 일대기는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로 막을 내린다.
장보고 사후에 염장이 그 세력을 흡수하여 청해진을 물려받았지만, 청해진의 주민들은 염장을 인정하지 않고 당나라와 일본 각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851년에 이르러 장보고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청해진은 끝내 폐쇄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삼국사기>의 많은 기록들이 의문점으로 남은 것처럼, 현대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정말 반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국익에 막대한 기여를 하던 장보고와 청해진의 몰락은, 이후 신라 역시 차츰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징조였다. 청해진의 엄청난 경제적-전략적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옹졸하고 편협했던 신라 지배층의 한계가 초래한 비극이었던 셈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해상왕의 자리까지 등극한 장보고의 신화는 후대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훗날 왕건-견훤 등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대를 앞서간 장보고의 도전정신과 과감한 결단력이 오늘날까지 재조명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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