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도 없이 5.18 민주묘지를 찾은 영월의 중학생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천릿길 강원도 영월에서 '열사 윤상원'을 만나러 온 아이들
▲ 전일빌딩 내 계엄군이 쏜 헬기 탄흔을 아이들이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 서부원
거센 장맛비 속에 참으로 귀한 '손님'이 이곳 광주를 찾아왔다. 강원도 영월에서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중학교 역사 동아리 아이들이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국립 5.18 민주 묘지와 옛 전남도청이 자리한 금남로 주변의 사적지 등을 걸어 돌아보는 1박 2일의 일정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면 곧장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떠나기 전 5.18 전후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공부하고, 당시 주요 역사 인물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무대에 올릴 연극의 주제와 제목까지 일찌감치 정했다고 한다. 그들이 부러 광주를 찾아온 이유는,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열사 윤상원'의 삶을 만나기 위해서다.
강원도에서, 그것도 미래세대 아이들이 온다기에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그깟 장맛비쯤이야 문제될 것이 없었다. 타향인 광주에 내려와 20년 가까이 5.18 관련 강의와 사적지 해설을 해왔지만, 대구와 경북, 충북과 함께 강원도에서 5.18 사적지를 찾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개인적으로, 강원도의 아이들을 만난 건 처음이다.
무엇보다 동아리 지도 교사의 몫이 절대적이었으리라 본다. 낯선 프로젝트에 천방지축 아이들의 동기를 유발하고 함께 공부하고 업무를 분담시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는 지도 교사의 열정과 의지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해당 학교장의 열린 마음과 지지가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민망한 고백이지만, 만약 대구와 경북, 충북, 강원도에서 오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굳이 비 내리는 와중에 인솔하겠다고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전국의 청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5.18 관련 강의에서 대놓고 말한 적도 있다. 전남과 전북, 서울과 경기 지역 교사들은 광주에 오시려거든 혼자 오지 마시고 다른 지역 교사들의 손을 잡고 오시라고.
▲ 전일빌딩 내 5.18 관련 주요 가짜 뉴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설치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 서부원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이들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아리 막내인 중1 아이의 장난꾸러기 짓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여느 중학생답지 않게 진지했다. 아이들은 앞장서 걸었고, 열심히 보고 들었다. 짓궂은 날씨도 그들의 적극적인 모습에 감동했던지, 사적지에 닿으면 잠시 갰고, 이동할 땐 약속이라도 한 듯 비가 쏟아졌다.
그런데, 아이들 누구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낯선 곳에 가면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요즘 아이들인데 어째 좀 이상했다. 알고 보니, 답사할 때만이라도 풍경은 스마트폰이 아닌 눈에 담고, 설명에 집중하라는 뜻에서 아이들과 합의했다고 한다. 지도 교사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에 다른 귀한 '손님' 몇 분이 도중에 합류했다. 십수 년 만에 다시 광주를 찾아왔다는 부산 시민들이었다. 하루짜리 일정으로, 계엄군이 쏜 헬기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과 5.18 묘역만 잠깐 둘러보고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했다. 강원도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부산도 왕복 6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 하루에 사적지를 두루 돌아보기란 만만치 않다.
그들도 강원도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대견해하며 일정을 끝까지 함께했다. 5.18정신을 기억하겠다는 다짐으로 강원도의 아이들이 광주를 찾았듯, 부마 민주항쟁이 인연이 되어 광주와 부산이, 또 강원도와 부산이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염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그들은 스마트폰에 사적지보다 아이들의 모습을 더 많이 담고자 애썼다.
함께 길을 걷다 흘끗 보니 금남로 주변을 오가는 대형 버스 중에 경기와 경남 등 다른 지역 번호판을 단 차량이 눈에 여럿 띄었다. 주말을 이용해 5.18 사적지를 찾아온 외지인들을 태운 버스들일 테다. 모르긴 해도, 번호판만으론 지역을 구분할 수 없는 승용차도 적지 않을 것이다. 최근 5.18을 찾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여행객들도 부쩍 늘었다.
손쉬운 가짜뉴스 뚫고 5.18 공부하러 온 학생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직접 광주를 찾아 사적지를 둘러본 이들은 5.18과 관련된 숱한 가짜 뉴스에 쉽사리 현혹되지 않는다. 지금껏 가짜 뉴스를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어온 이들도 5.18 묘역과 금남로 주변을 걷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황한 이야기인지 대번 깨닫게 된다. 유튜브에 떠도는 온갖 자극적인 정보들의 유해성을 인식하게 되는 건 외려 덤이다.
몇 해 전 사적지 인솔 중에 만나 헤어지면서 뜨거운 포옹을 나눈 한 어르신이 떠올랐다. 서울 토박이로 광주는 평생 처음 와봤다면서, 가짜 뉴스를 진실인 양 여기고 다른 지인들에게 알려온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그에게 진실의 눈을 뜨게 한 건, 다름 아닌 5.18 묘역에 안장된 이들의 묘비 뒷면에 적힌 글귀였다고 했다.
묘비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생몰년과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뒤에 유족 등이 남긴 글이 새겨져 있다. 그것들을 읽노라면 누구든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생때같은 자식의 참혹한 죽음을 믿지 못하는 모성과 총에 맞아 숨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고, 아내와 남편, 동급생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 울음조차 메말라버린 이들의 애통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때까지 그는 5.18 유공자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보수 단체의 요구에 공감했고, 이따금 집회에도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굳이 이름을 감추는 건, 가짜 유공자나 북한의 남파 간첩 등이 포함돼서일 거라고 여겼단다.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민주화운동의 유공자라면 감출 게 아니라 자랑할 일인데, 공개하지 못하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단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는 그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광주에 와보면 누구든 알게 될 거라며 매조지었다. 5.18 유공자의 이름이 궁금하면, 직접 국립 5.18 민주 묘지에 와서 확인하라고 했다. 그곳에 세워진 수많은 묘비에 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걸어 다니며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면, 추모탑 아래에 명단과 봉분의 위치까지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북한군 개입설 등은 이미 대법원의 심판까지 받은 사안인데도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자극적인 선동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을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보고 이해하는 '탈진실의 시대', 가짜 뉴스를 바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상을 스마트폰이 아닌,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 옛 전남도청에서 5.18 사적지 답사를 마무리했다. 동아리 아이들과 지도 교사, 부산에서 온 답사객들이 함께했다. ⓒ 서부원
스마트폰을 제 몸의 일부인 양 여기는 아이들 역시 숱한 가짜 뉴스에 포획되어 있다. 수업 시간 토론할 때 유튜브에서 접한 내용을 논거로 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요즘 아이들에게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유튜브는 차라리 교과서다. 유튜브에서 일러주는 대로 먹고, 놀고, 쓰고, 공부한다. 물론, 내용이 자극적인 가짜 뉴스일수록 아이들의 주목도가 높다.
그중에도 5.18은 가짜 뉴스의 온상이다.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극우 유튜버가 미끼를 던지면, 극우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에서 맞장구를 치고, 그것을 근거 삼아 더욱 자극적인 내용의 유튜브가 생산되는 악순환 속에 애꿎은 5.18이 능욕당하는 형국이다. 최근 들어선 일부 청년들조차 가짜 뉴스를 양산하며 5.18 왜곡에 가세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거센 장맛비를 뚫고 5.18을 공부하러 온 이 아이들이 너무나 반갑고 고맙고 소중한 이유다. 설령 지금껏 가짜 뉴스에 고개를 끄덕여왔다 해도, 적어도 오늘 이후론 그런 저급한 주장 따위는 단숨에 무질러버릴 강단이 생겼으리라 확신한다. 더욱이 학교로 돌아가 '열사 윤상원'을 연기하며 그의 삶을 따라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아이들 아닌가.
이들 중 누가 '열사 윤상원'을 연기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의 입을 통해 5.18 당시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며 윤상원 열사가 남긴 사자후를 듣게 된다면 울컥할 것 같다. 지도 교사도 열사의 유언 같은 이 한 마디에 이끌려 아이들과 함께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강원도 영월의 아이들에게서 '열사 윤상원'이 호명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될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