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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슈트가 추운 히어로, 온라인에 고민글 올렸더니...

[넘버링 무비 268]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등록|2023.07.18 17:03 수정|2023.07.18 17:07

▲ 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많아도 너무 많다. 슈퍼히어로, 영웅들 말이다. 1980~1990년대를 지나며 시작된 슈퍼맨이나 배트맨은 물론, 최근 마블이나 DC 유니버스의 형성 이후 쏟아진 숱한 캐릭터들까지. 우리는 그야말로 히어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특정 캐릭터의 경우에는 몇 차례나 리부트 되며 지나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이제는 하나의 작품에서 여러 명의 히어로가 힘을 합치는 모습을 만나는 일 역시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같은 모습의 영웅들, 평화로운 세상에 나타난 빌런을 물리치고 (물론 그 과정에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기는 한다.) 든든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사라지는 장면이다.

영화 <로건>(2017)이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엑스맨 유니버스의 실질적인 주인공과도 같았던 인물인 울버린의 마지막을 담았던 작품이었으니까.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로라와 다른 뮤턴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히어로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짙은 여운과 헛헛함을 경험했다. 여기에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당위적인 감정도 일부 있었겠지만, 히어로 장르가 주지 못했던, 아니 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류 보편의 감정을 영웅의 마지막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는 부분 또한 있었을 것이다. 영웅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강력한 힘과 능력 이면의 고민과 어려움 같은 것들을 잠시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여기 또 하나의 영웅이 있다. 불의의 추락 사고 이후 비상식적인 신체 능력을 갖게 된 인물 차유진(고경천 분)이다. 물론 그의 능력과 활약에 비하면 앞서 언급했던 히어로들의 면면이 조금 과하긴 하다. '레드'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지키고자 나서긴 했으나 생각보다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그리 많이 생기는 것 같지도 않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압도적인 빌런이 나타나는 일 같은 건 터무니가 없을 정도니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직접 제작한 슈트가 겨울이 다가올수록 너무 춥다는 것. 처음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어려움이다.
 

▲ 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2.
최우진 감독의 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에는 자신이 만든 슈트가 추워서 걱정하는 다소 이질적인 히어로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인간적이고, 다시 한번 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앞서 거창하게 이야기했던 여러 영화 속 히어로들의 모습이 무색하고 민망할 정도다. 얇은 슈트의 떨어지는 보온성이 유일한 걱정거리인 히어로라니.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날아오는 흉기를 피하는 등 탈인간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어딘가 부족한 캐릭터. 영화는 이 치명적인 약점을 중심으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살을 붙여 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구조적 설정을 위해 기존 영웅의 이미지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두 가지다.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영웅에게도 어느 한 부분 약점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과 그 약점과 이면의 고민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인간적이라는 것. 전자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장르적 호흡에 맞닿아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감독 개인의 상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새로운 것으로 비틀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히어로의 이미지 위에 최소한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간적인 영웅', 혹은 '인간적이면서도 영웅의 면모를 가진'의 어구는 서로 상응할 수 없는 배반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각각의 요소를 하나의 캐릭터에 절반씩 이식함으로써 극 중 '레드'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역시 이후의 러닝타임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게 되는 것은 후자인 비틀어진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이 이해가능한 영웅적 면모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는 셈. (후반부에서 최소한의 설명을 위한 모션 픽쳐 신을 통해 그려진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영웅이 되었지만 아직 인간적인 고민을 가진 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영웅의 면모를 가진 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타인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다른 히어로 영화와는 다르게 말이다.

03.
그 과정에서 선택되는 것은 온라인 커뮤니티다. 히어로 '레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고민을 나눠보라는 전문가의 제안에 따라 유진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슈트가 추워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공유한다. 그의 고민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채 12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국 각지의 전문가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동시에 시작된 카페 모금을 통해 슈트 제작에 필요한 충분한 금액도 모인다. 영웅이 세상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순수한 도움과 선의 아래에 놓이는 뒤틀림은 조금도 없다. 영화는 그저 영웅도 인간도 서로 함께하고 돕는 과정에서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커뮤니티, 특히 온라인상에서 조직된 커뮤니티의 선기능에 대한 믿음이다. 감독은 자신의 연출 의도를 통해 어떤 분야든 '덕후'들이 연대했을 때 그것이 곧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밝히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그것에 비해 온라인의 생리는 조금 더 거칠고 어려운 면이 있다. 짐작만으로 인지해야 하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쉽게 모이고 흩어지는 온라인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영화는 영웅이 그런 불안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위해 어려움 속으로 뛰어들듯이 사회 역시 영웅을 위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이 설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실제로 영화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위해 대가도 없이 모금을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들의 모습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레드의 모습을 그린다. 자신의 경우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의 존재적 사명감이라도 갖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말이다. 이 장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대가를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대한 감독의 물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연대의 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개인의 외로운 고군분투보다는 함께인 세상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인 단어를 두고 치환하자면 '혼자서 만든 슈트보다는 여럿이 함께 만든 슈트가 훨씬 더 뛰어나다'가 될 수 있겠다. 기술적, 기능적 측면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요청과 그에 응답하는 전체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커뮤니티가, 조금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이 지점에 녹아 있다.
 

▲ 영화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레드라는 캐릭터를 다루는 측면에 있어 완전한 영웅도 아니고 오롯한 인간도 아닌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어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굳이 여러 차례 보여주는 것은 그를 여전히 영웅의 자리에 남겨두기 위함이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생의 모습, 아직 유명하지 않은 영화배우로의 삶이 이어지는 것은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서 하나는 고전적인 영웅의 정체성 위에 또 하나는 감독의 상상력으로부터 이 캐릭터가 형성되었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가 갖고 있는 이 사소한 고민조차 다른 서사 위의 영웅이 갖고 있는 대의적 명분과 관련한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유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영웅과 인간, 그 넓고도 가까운 틈 사이에서.

최우진 감독에 따르면, 이 작품은 영화과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첫 영화인만큼 어설픈 점도 많고 학생 영화라는 측면에서 여러 제약도 많았다고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상업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감독 본인의 다양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풋풋하면서도 재기 발랄한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게 되는 히어로 레드의 액션신은 어딘가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영화가 달려온 러닝타임 전체를 갈무리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연대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멋진 장면이다. (이 장면은 스톱 모션과 CG 등 꽤 다양한 기술이 실험되고 있어 더 흥미롭기도 하다.)

이제 영화의 타이틀 뒤에 놓일 문장을 완성해야겠다. 마침표를 붙이지 않고 쉼표를 굳이 둔 이유가 어쩌면 관객에게 그 문장을 완성해 달라는 감독의 주문처럼 여겨진다. 이 문장이 감독이 정해둔 마지막 문장과 같을지는 잘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이유는 말이죠, 누군가를 대가 없이 사랑하고 지지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두 번째 큐레이션 ‘내 일기장 속 영웅들’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7월 30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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