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타계, 영화로 만들어진 단 한 편의 작품
[김성호의 씨네만세 515] <프라하의 봄>
▲ 밀란 쿤데라 사진 ⓒ 민음사 제공
모든 반짝이는 별은 마침내 스러진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별이 스러진 뒤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아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전해지게 마련이다. 마침내 마지막 숨을 내쉰 위대한 작가들 또한 별과 같은 운명을 산다. 그들의 육신이 사멸해도 그들이 남긴 작품은 살아남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영감을 던지고는 하는 것이다.
시대의 작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던 대문호 밀란 쿤데라가 지난 11일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4세, 언제고 있을 일이었던 죽음에 예술을 아끼는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한다. 서점에선 그의 책이 재조명되고 있고,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또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쿤데라의 대표작이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꼽힐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바로 <프라하의 봄>이 되겠다.
▲ <프라하의 봄> 스틸컷 ⓒ 오리언 픽처스
바람둥이 의사 앞에 나타난 순박한 소녀
바로 그 도시 프라하에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가 산다. 젊은 의사인 그는 즐거움을 좇아 자유롭게 사는데, 성생활도 그중 하나다. 젊고 잘 생긴 데다 직업까지 좋은 그가 "벗어"라고 한 마디를 하면 웬만한 여자는 그 앞에서 알몸이 되고는 한다. 함께 일하는 다른 의사들조차 그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그런 그에게 유독 가까운 여자가 있다. 예술가인 사비나(레나 올린 분)는 토마스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깊숙한 관계를 이어간다.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서도 서로를 옭아매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랑이 서로를 더욱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스에게 특별한 여자가 생긴다. 수술을 위해 외곽의 작은 마을로 출장을 간 토마스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카페 여급인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분)가 바로 그녀로, 둘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젊고 예쁜 테레사가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매력적인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문학소녀인 테레사에게도 남는 시간에 책을 읽는 교양 있는 사내란 이 작은 마을에서만 만날 수 없는 특별함으로 다가온 탓이다.
▲ <프라하의 봄> 스틸컷 ⓒ 오리언 픽처스
인간다움을 짓밟는 시대에 대하여
테레사는 행동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간 토마스를 찾아 홀로 프라하로 떠난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테레사를 위해 토마스는 사비나에게 그녀를 도와달라 말하고, 사비나의 도움을 얻어 테레사는 전업 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토마스와 두 여성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간다.
영화는 더없이 자유롭고 솔직한 청춘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는 한편, 당대 체코에 밀어닥친 역사의 물결이 이들의 일상을, 나아가 영혼을 어떻게 침탈하는지를 그린다. 체코는, 또 프라하는 더는 전과 같은 도시일 수 없고, 그곳에서 사는 이들 또한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테레사와 사비나, 토마스의 삶 또한 그러해서 이들은 뿌리 채로 뽑혀나가 정처 없이 떠돌거나 짓밟히고 뭉개져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일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필립 카우프만은 <프라하의 봄>을 영화에 맞게 변형하여 새로운 멋과 맛을 냈다. 원작의 서사를 따르면서도 영상만이 가질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무거움이며 가벼움, 키치 등에 대한 상징, 또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시각과 태도 등은 덜어내고 인물이 맞이하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이를테면 토마스의 차를 뒤지고 여권을 뺏어드는 소련 병사의 이미지는 그들이 도시를 떠나기 전으로부터 시대가 얼마만큼 냉엄하게 변하였는지를 글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내보이는 것이다. 뿐인가. 결말부 집으로 돌아오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모습은 그들이 맞는 비극적 운명이 과연 비극이었는가 하는 물음을 관객에게 되묻도록 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은 소설과 같이 영화는 소설과 다른 밀도와 질량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이해한다.
▲ <프라하의 봄> 스틸컷 ⓒ 오리언 픽처스
소설과 또 다른 영화의 맛, 쿤데라를 추모하며
원작자 쿤데라는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이것이 제 작품과는 다르다고 불쾌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이 영화는 좋은 소설이 어떻게 두 번 세 번 다시 가공될 수 있는지, 그로써 독자적이며 새로운 예술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는 이 작품 이후 왕성한 활동으로 별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명성을 얻었다. 그 결과 <프라하의 봄>은 대문호의 역작을 영상화한 작품이며 시대를 대표하는 대배우들의 풋풋한 시절을 담은 귀한 영화로 남았다.
작품은 제23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작품과 감독상을 싹쓸이하고, 제42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각색상을 거머쥐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떠난 밀란 쿤데라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그는 떠났어도 그가 내뿜는 빛이 여전히 환하게 남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테니.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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