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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아내와 불륜, 거장이 그 뒤에 숨겨놓은 것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붉은 사막>

등록|2023.07.25 17:23 수정|2023.07.25 17:23

▲ 영화 <붉은 사막> 포스터 이미지 ⓒ 일미디어


명불허전 거장의 역작과 재회하다

영화가 끝났다. 보는 내내 머리가 아팠지만 요즘 영화들처럼 기본 5분은 쭉 흘러내리는 엔딩 크레디트 없이 담백하게 "FINE" 자막만 화면에 새겨지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들어왔다. 계속 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몽환적인 두통을 유지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대해 사실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후회와 반성이다.

이 영화 <붉은 사막>은 미켈란젤로 <정사>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첫 컬러영화이자 속칭 '소외' 연작(1960년 <정사>, 1961년 <밤>, 1962년 <태양은 외로워>, 1964년 <붉은 사막>)의 마지막 편이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모니카 비티와의 고별 같은 작업이기에 더 눈길이 간다. 재개봉 포스터에서 공허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을 던지는 배우의 얼굴을 보면 왜 안토니오니가 이 배우를 페르소나 삼아 소외 연작을 작업했는지 절로 수긍될 만하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미모를 초월해 스크린을 통해 보면 한 번에 각인되고 마는 그런 형태의 얼굴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세계 영화역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이지만 유독 국내에선 잊혀져가는 이름이다. 상대적으로 동 시기에 출현했던 프랑스의 '누벨바그' 거장들은 여전히 국내에서 끊이지 않고 호명되고 소개가 이어지는 데 반해 그들과 활발히 교류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탈리아 영화와 감독들은 소외에 가까운 외면을 겪는 셈이다. 그들은 미국이나 프랑스 영화계와 직접적인 접속 경로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냥 묻혀 버렸다. 당대에 전 세계 영화계를 석권하다시피 한 비토리오 데시카도, 페데리코 펠리니도 국내에선 유달리 낯선 이름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는 비교적 익숙하게 들어봤음직한 세르지오 레오네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경우에도 할리우드 경력이 아니었다면 이름을 들어보기 힘들었을 테다. (하다못해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경우도 할리우드에서 유독 푸대접이 심한 걸로 유명했다) 난니 모레티나 타비아니 형제 역시 극히 소수에게만 인지도가 존재할 따름이다. 21세기에도 세계 영화제를 석권하는 선 굵은 작업을 선보이는 숱한 이탈리아 감독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사회문제를 선 굵게 재해석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마테오 가로네나 파울로 소렌티노, 스테파노 솔라미 같은 감독들의 이름이 익숙한 이는 국내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푸대접은 이탈리아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어문화권이 사실상 해외영화 창구를 독점하던 시절의 부정적 유산이 워낙 지대하기에 비영어권 영화들의 경우에는 소수의 예외, 예를 들자면 문화적으로는 세계를 선도한다고 인정받는 프랑스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영화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소개되는 영화는 미국영화 혹은 미국을 포함한 영어문화권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는 익숙해지기 힘들다. 숨어 있는 어마어마한 광맥을 지표면만 훑어보고 스윽 지나치는 꼴이다. 그렇게 체념하려다가도 어쩌다 접하게 되는 (우리만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거장들을 접하고 나면 자괴감이 들곤 한다. 하물며 1960년대 전 세계 영화계의 상징과도 같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도 이런데 우리는 대체 얼마나 많은 영화를 놓치고 마는 걸까. (<붉은 사막>은 1996년에 개봉한 바 있다) 오랜만에 재회한 영화는 그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현대 산업사회라는 '사막'에서 표류하는 주인공의 여정
 

▲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영화의 시작은 마치 '안개 속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지나치게 친절해서 오히려 몰입을 차단해버리는 요즘 영화들과 대비되는) 특별한 내레이션이나 자막해설은 일절 없다. 온통 자욱한 안개 속에서 마치 칠판을 분필로 죽 그어내듯 불편하게 남는 소음과 어렴풋한 윤곽만이 몇 분간 흐른다. 화면을 보는 관객들은 한동안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제목처럼 자연스럽게 황량하고 불안한 정서가 관객 각자의 뇌리에 스며온다. (요즘처럼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풍조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추세에선 경험하기 힘든 풍경이다)

마침내 조금씩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선명해진 화면 가운데에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을 걷고 있다. 여전히 주변은 뿌옇고 생명의 기운보다는 세기말 매드맥스 시리즈 배경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사방은 황량하다. 온통 멸망한 세계의 느낌이다. 이윽고 먼발치에서 일단의 군중이 등장한다. 전면파업에 나선 공장노동자들이다. 인간을 압도적인 규모의 거대한 첨단설비가 가득 들어찬 공장과 그에 맞서는 시위군중의 대비는 특별한 설명 없이도 함축적인 의미를 숱하게 전달한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근무하는 동료를 거론하며 그를 비난하는 선동이 시작된다. 마치 산업혁명 초창기에 발생한 대량실업의 희생자인 숙련노동자들이 비밀결사를 구성해 기계를 때려 부수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하지만 여인은 군중에 갇혀 갈팡질팡 헤매면서도 그 무리에 섞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여인, '쥴리아나'는 공장에서 기사로 일하는 남편 '유고'를 방문한다. 하지만 파업 와중에도 공장 일에 바쁜 남편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방문했는데도 무덤덤하게 업무논의를 이어간다. 바깥은 파업으로 요란하지만 공장은 별 탈 없이 잘 가동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감은 밀려들고 공장은 풀가동해도 모자라 보인다. 남편은 넘쳐나는 일감 때문에 새로이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는 문제로 씨름한다. 그의 곁에는 동료이자 친구인 광산기사 '코라도'가 있다. 쥴리아나는 남편과 코라도를 만난 뒤 사무실에서 대기하는데, 남편 유고는 친구에게 아내의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쥴리아나는 운전실수로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부상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이후로 신경쇠약 상태가 지속되는 중이라는 것이다.

코라도는 덤덤하게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공장 엔지니어이지만 이탈리아인이라기엔 이국적 외양을 물씬 풍기는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친구와 헤어진 후 쥴리아나가 준비 중이라는 시내의 가게 자리로 향한다. 뜻밖의 남편 친구 방문인데도 쥴리아나는 그다지 놀란 기색도 없이 맞아들인 후 가게 안에서 파편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가게를 열 준비 중이라는데 정작 건물 안은 텅 비어 있다. 아직 무슨 업종을 준비할지도 정하지 않았으면서 쥴리아나는 가게 벽을 무슨 색으로 칠할 것인지에 골몰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 무미건조하고 단절적인 대화만 반복하면서도 둘은 계속 동행하게 된다.

해변의 방갈로에서 쥴리아나와 유고 부부, 코라도 그리고 몇 명의 지인들은 함께 휴가를 보낸다. 거리낌 없이 이들은 지인의 남편과 아내를 성적으로 유혹하고 터치한다. 정작 자기 반려를 건드려도 서로 딱히 언짢아하지도 않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이후 남편이 출장을 떠나자 부부의 아들 발레리오는 아프다며 학교를 빠지고 요양한다. 코라도와 쥴리아나는 계속 만남을 이어가지만 뚜렷한 이유나 결정적 전환점은 딱히 엿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둘의 기묘한 관계는 계속된다.

'치정물' 껍데기 속 당대의 신경증을 구현하는 영화
 

▲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붉은 사막>을 직접 영화를 보지 않고 줄거리 요약으로만 접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요즘 식으로 '천만 영화'나 '블록버스터'를 보지 않으면 지인들과의 온/오프라인 대화에서 소외될 것 같아 애용하는 별점 평가나 '패스트 무비'(유튜브에서 범람하는 10분 내외 분량의 영화 요약 소개영상)로도 온전하게 소화하긴 어렵다. '클래식'이라 흔히 통칭하는 고전 명작의 참 맛은 속성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단순 개요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치정/불륜물이다. 신경쇠약 상태인 주인공 쥴리아나는 초반에 남편이 코라도에게 설명해준 대로 끊임없이 기행을 벌이며 누군가에 기대려 한다. 사회성이 결여된 것처럼 쥴리아나는 문제를 해결할 의욕은 없이 자잘한 사고를 일으키고 수습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남편의 친구 코라도와 간격을 좁혔다 벌렸다 하길 거듭하며 긴장을 조성한다. 관객 누구도 쥴리아나의 다음 행동 패턴을 추리하기 힘들다. 그런 모호함이 딱히 심각한 사건이나 복잡한 복선이랄 게 없는 영화에 대한 긴장감을 지속시킨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치정/불륜 소재 영화들과 기본 얼개는 흡사하지만 그 중추에서 풍겨오는 감각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붉은 사막>에서 사건과 대사는 영화를 소화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무심한 듯 펼쳐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불친절한 배경 묘사와 점점 관객의 심상에 퇴적되듯 쌓이는 분위기가 감독이 전달하고픈 주제에 온전히 가깝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1960년대를 기준점으로) 현대사회의 풍요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불안, 그리고 풍요의 대가로 파괴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관객에게 전달하려 한다. 마치 초월적 권능을 가진 신들이 빚어낸 것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산업문명이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을 위압한다. 그 경이로운 산물들은 영화 내내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들을 굽어보는 듯하다. 불을 뿜는 용광로, 형형색색 연기를 피워 올리는 높은 굴뚝, 한번 봐서는 용도를 알기 힘들지만 마치 거인처럼 우뚝 솟아 범접하길 두렵게 만드는 구조물, 외계에서 온 존재처럼 홀연히 등장하는 거대한 선박들이 거듭 출현한다. 그런 배경 묘사는 자연스럽게 영화 속 공간을 인간은 이해하지도, 개입할 수도 없는 경계선, 곧 기계 신들의 영역으로 변모시킨다.

이 웅장한 산업화 시대의 표상들은 그 압도적인 권능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거기엔 인간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공장 주변의 황무지에선 땅 속에서 불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폐기된 잔해들은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물가에는 두터운 기름기와 칙칙한 폐수가 둥둥 떠 있다. 심지어 공장 굴뚝에서 겉으로는 화려한 형형색색으로 오르는 연기에는 유독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제작된 동 시기에 2차 대전 전후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던 환경오염 문제가 오직 미장센만으로 극명하게 구현된다. 영화 말미에 쥴리아나의 아들 발레리오가 엄마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영화 속 풍경을 줄곧 각인해온 이들에게 의문을 풀어주는 감독의 전언 같은 셈이다.

감독 본인에게는 최초인 컬러영화 작업에 도전한 안토니오니는 실제 색감 재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컬러영화의 속성에 구애받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실사영화라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력을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맞춰내 자유자재로 빛과 색을 재구성한다. 의도적으로 화면에 색감을 덧입히고 분무기로 필름에 착색을 하는 '만행'을 통해 안개 효과를 조성한다. 그렇게 일정한 이미지 왜곡을 활용해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이미지를 일그러뜨린다. 대사가 절제된 가운데 무성영화의 장점처럼 화면에 전시된 이미지에 관객을 온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흔히 흑백 무성영화에서 구현되는 강점이자 컬러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퇴색했다는 아쉬운 측면-숭고함이나 장엄함으로 흔히 명시되는 기운-이 <붉은 사막> 영화 속 현대 산업문명의 기계 신들 묘사를 통해 재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의 '소외'를 표상하는 주인공의 불안
 

▲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반면에 영화 속 인물들은 자주적이거나 능동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있다. 쥴리아나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재건사업이 집중된 이탈리아 중북부 산업지대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간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피부로 느끼는 입장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남북 간 격차 문제는 이미 19세기 중반 통일과정부터 격심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 정치 역시 지역주의가 극단적으로 강하다) 의식주에 문제가 없고 아내의 요구에 거리낌 없이 시내 목 좋은 구역에 가게터를 구해주는 남편이 있지만 쥴리아나의 삶은 행복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과시적인 행동을 일삼고 뒷수습은 외면한다.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순간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쥴리아나가 무슨 000패스이거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지적인 능력도 충분해 보인다. 그런 주인공의 행보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예기치 않은 파급효과에 혼란을 겪는 현대 서구사회 중산층 시민의 불안한 초상을 재연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영화를 아무리 봐도 외형적으로는 쥴리아나가 영화 속에서 보이는 불안한 행태를 이어갈 이유가 관객에게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원래 감춰져 있던 인물의 연약한 심리상태가 교통사고를 계기로 개방되어 버린 것일까.

하지만 감독의 의도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주인공의 갈증은 누구나 일생에서 갑자기 다가올 법한 권태이자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채워질 수 없는 성격의 문제다. 그래서인지 쥴리아나는 끊임없이 마치 외부의 침입자처럼 도시의 해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화물선을 두려워한다. 그와 동시에 그 배에 올라타고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탈주하고픈 몽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쥴리아나는 (영화 끝까지) 어떤 사안에도 온전히 결단하지 못한다. 현실에 불만족하지만 스스로는 자립적으로 뭔가에 도전하지 못한다. 그저 끊임없이 자기 말을 들어주거나 영향을 미칠 법한 주변에 자신의 혼란을 어필할 뿐이다. 그는 계속 관심과 애정을 주변에서 무한적으로 얻어내고 싶지만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도 실은 명확하게 안다. 하지만 주체적 결단이 두려운 데다 스스로 뭔가 수행해본 적이 없다 보니 권태로운 삶 속에서 그저 공황상태를 반복하는 나날만 이어갈 뿐이다. 쥴리아나는 현대사회의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안에 감춰진 실체를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불안에 떠는 서구사회 시민들의 심리를 포착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전시한다.

그런 주인공의 신경증적 불안상태를 영화로 온전하게 구현하는 게 <붉은 사막>에서 감독이 도전하는 문제의식일 테다. 그 전제에 맞춰 모든 요소가 조율되고 정교하게 구조화된다. 인물의 표정과 연기, 과장된 색감과 하나의 군집처럼 합쳐지는 배경들, 신경쇠약을 재연하는 것 같은 불규칙한 소음의 향연이 각자의 몫을 분담해 소화하며 하나의 건축물처럼 완성된다. 마치 1960년대라는 시대상황이 영화에 통째로 압축된 느낌이다.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나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독일 영년>이 구현해낸 폐허가 된 유럽이 재건과정을 거쳐 다시 번영에 이르렀지만 그 대가로 잃어야 했던 것들, 그리고 전후 구체제가 청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내재한 실상에서 오는 피로가 안토니오니의 소외 테마 연작들을 통해 정치영화 색채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구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몇 년 후 68혁명으로 분출되어 나올 징후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대성'의 어두운 이면 60년 전에 포착한 영화
 

▲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 일미디어


<붉은 사막>은 무려 60년 전에 탄생한 영화이지만 바로 지금 등장했다고 해도 (일부 소품과 배경 등만 제외한다면)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작업이다. 영화 한 편으로 얼마나 많은 분석과 사유가 가능할 것인가 가능성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해도 무방한 경지에 이른 작업이다.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위상이 얕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장의 마스터피스를 이제야 어렴풋이 포착하게 될 줄이야. 세계는 넓고 우리가 발견해야 할 영화는 여전히 잔뜩 감춰져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 드물지 않게 확인되는 고전명작영화의 '재개봉' 열풍은 코로나19 이후 신작 개봉이 위축된 상황에서 극장가의 생존전략 중 하나로 굳어지는 중이다. 신작 영화들의 소개가 지연되는 데 일조한다는 부정적 여론도 만만찮지만, 동 시대에 해당 영화를 때맞춰 확인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늦게나마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2차 찬스를 제공해주는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 위주로만 활용되는 데 그치는 게 아쉬운 순간이 종종 생긴다. 그저 고전영화라 낡았다는 선입견 대신에 미지의 영화를 재발견한다는 발상으로 접근하길 권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현대성의 (긍정과 부정을 포괄하는) 예언적 이미지로 가득한 도시의 사막을 목격할 기회다.

이 영화에서 우려했던 현대사회 인간 소외현상은 인터넷과 SNS의 범람, 개인이 어찌할 도리를 찾지 못하는 톱니바퀴 같은 시스템에 질곡 당한 지 오래인 21세기 관객에게 더 진하게 다가설지 모르겠다. <붉은 사막>은 제목처럼 모험심 많은 관객에게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파헤칠 가능성을 잔뜩 품은 채 열쇠를 갖고 다가오길 기다리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현대성'의 외면하고픈, 하지만 엄연한 단면을 일찌감치 포착해 타임캡슐처럼 저장해놓은 작업을 확인할 때다.
 
<작품정보>
붉은 사막 Red Desert, Il Deserto Rosso
1964|이탈리아/프랑스|드라마
2023.07.26. 개봉|117분|15세 관람가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각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토니노 구에라
주연 모니카 비티(쥴리아나 역), 리처드 해리스(코라도 젤러 역),
      카를로 치오네티(유고 역)
수입/배급 일미디어

1964 2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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