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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에 왜 왔을까' 후회, 하루 만에 바뀐 이유

뜻하지 않은 부상에도 유럽 여행 중 손꼽히는 기억으로 남은 일정

등록|2023.08.06 10:20 수정|2023.08.06 10:20
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기자말]

세비야 대성당을 처음 마주친 순간생활 공간과 상업 거리를 바로 맞대고 있는 중세의 대성당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날 때, 기분 좋게 놀라게 된다. 골목을 돌아 성당이 눈에 들어온 첫 순간 ⓒ 유종선


햇살과 오렌지 나무가 싱그러운 도시, 스페인 세비야에서는 세 가지를 보고자 했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크고 콜럼버스의 묘가 있다는 세비야 대성당, 이슬람과 기독교 양식이 혼합된 알카사르 궁, 그리고 김태희 배우가 광고를 찍었다는 스페인 광장이었다. 하루 낮 동안 이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 기차로 마드리드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부상으로 남은 여행이 가능할까.

여행 동안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 동안 내가 감기몸살이나 복통 정도는 겪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다치는 경우는 아예 예상에 없었다. 나는 보호자인데, 보호자가 다치면 어쩌란 말인가.

아빠의 부상에 당황한 아이

씻고 나오다 숙소 내 대리석 계단에서 나동그라지는 순간에, 허리와 오른쪽 팔꿈치의 통증이 워낙 격렬하여 몇 초라도 지체하면 그대로 계단 위에서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친 직후에는 엉겁결에라도 움직여질 것이니 일단 계단은 벗어나자는 생각이 순식간에 이어졌다. 몸을 굴려 왼팔로 지탱해 바로 앞에 있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앓더라도 침대 위에서 앓자.

우주도 놀랐다. 그런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나를 잠시 지켜보다가는, 이내 다시 바닥에 엎드려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나는 죽을 듯이 신음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그게 못내 서운했다.

"우주야 아빠 너무 아픈데 너 계속 책만 읽기야? 아빠 좀 위로해주면 안 돼?"

그제서야 우주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손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랬어요. 아빠 괜찮아요?"
"모르겠어. 내일 아침이 되어봐야 알 거 같은데?"


그래도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니 마음은 조금 안정되었다. 그런데 부상의 정도가 가늠이 안 됐다. 끙끙대며 30여분 정도 누워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없는 공간에 몇 걸음 옮겨도 보고, 허리를 좌우로 살살 비틀어도 보았다. 허리 오른쪽 특정 구간에서 심한 통증이 왔다.

그동안 부실한 몸으로 숱하게 다쳐온 과정으로 미루어 자가진단을 해보면, 허리는 뼈나 신경의 문제까지는 가지 않은 심한 타박상같았다. 상체를 곧추 세우고 있는 동안은 버틸만 했다. 오른 팔꿈치는 뼈에 멍이 든 골멍 내지는 실금이 간 느낌이었으나, 움직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봐야 확실하겠으나, 그래도 여행을 계속할 희망이 보였다.

내일 세비야 일정을 마치면 우주와 나는 마드리드로 올라가 그곳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네 밤을 의탁할 계획이었다. 몸에 정말 무리가 있으면 현지인인 친구와 상의해 병원에 가면 되겠지. 세비야를 그냥 지나칠 걸, 하루라도 보려고 굳이 무리하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모든 게 다 후회되기 시작했다. 후회의 와중에도 우주를 재우고 각종 예매와 일정 정리를 마쳐야 했다.

부상 다음날의 반전
 

알카사르 궁의 아침 입장 줄첫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 ⓒ 유종선


다음 날, 창 밖으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창은 얇았고 밖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1층이었기에 1m 옆에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셈이었다. 몸의 상태는 어제 밤보다 더 나빠지진 않았고 추가적인 통증은 없었다. 일단 오늘은 버텨보자. 우리는 짐을 호스텔 사무실에 넣어 놓고 거리로 나왔다. 우주는 내게 앞으론 별 하나짜리 호스텔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세비야는 봄 날씨였다. 막상 아침 햇살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젯밤의 어둡고 무서웠던 골목길과 막막했던 광장은 아침이 되니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좋은 의미의 본색을 드러냈다. 골목을 돌자 마법처럼 세비야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지난 밤에 어두운 숲 속을 해메다 오두막을 발견하여 잠을 청하곤, 아침 햇살에 일어나 우거진 나무 위로 솟은 아름다운 성루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궁 내부의 장식들기독교 양식과 이슬람 양식의 혼재 ⓒ 유종선


알카사르 궁의 아침 첫 입장 줄을 서고 있자니, 바로 옆 대성당에서 아홉시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중세인이 된 기분이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의 시대'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벌써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다. 역시 세비야에 오길 잘했어!

알카사르라는 단어 자체가 이슬람어로 궁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알카사르 궁이라고 표현하면 '역전 앞'처럼 동의어 반복인 셈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건축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중첩된 양식이 특징이다. 우상을 모시지 않기 위해 발달한 이슬람 식의 기하학적 무늬장식으로 가득한 벽과 천장을 보며 우주와 난 궁전을 구경했다.

세비야의 오전 햇살이 다양한 모양의 창문을 뚫고 들어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 궁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이 축복같은 빛을 누리면서 하루를 시작했겠구나. 이 창들의 취지는 이 빛을 뜻대로 담기 위함이었겠구나.
  

알카사르 정원에서세비야의 햇살이 모두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 유종선


"봐 우주야, 알함브라에서 나스리 궁 못 본 것도 괜찮다. 여기랑 비슷했을 거야. 알카사르 궁전이 이렇게 좋을 줄 누가 알았니? 나스리 궁 보고 여기 왔으면 여기가 재미 없었을지도 몰라."

아빠의 말을 새옹지마의 교훈으로 받아들일지, 능글맞은 궤변으로 받아들일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만의 따스한 햇살은 우주의 마음도 풀어주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우주는 궁전 내의 장식보다는 미로처럼 다듬어진 정원에 마음을 빼앗겼다. 정말 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기호였다. 길을 찾는 게 재미있다니.
  
궁 안에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공작새와 비둘기들이 손님들의 식탁 아래까지 다가와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곳이었다. 우린 그 곳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같이 빵을 고르고, 각자의 음료를 고르고, 새와 숲과 햇살을 바라보며 테라스에서 아점을 먹고 있으니 이런 근사한 데이트가 또 없었다. 자연과 중세 문명의 경계선에 있는 현대의 카페테리아. 난 아픈 것도 잊었다.

아이 자라는 소리가 들렸던 뱃놀이

스페인 광장은 말 그대로 광장일 것이니, 산책 코스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우주에겐 이 여행 중 손꼽히는 멋진 순간을 제공할 곳이었다. 낮이 되자 세비야의 기온이 20도에 육박하게 오르며 2월 여행객의 마음도 무장해제 시켰다. 색색의 노점이 놀이공원에 온 것 같았다. 또 광장을 둘러 반원 형으로 물길이 나있어, 노를 저으며 작은 배를 탈 수가 있었다. 우주는 이 배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주야, 배를 꼭 타고 싶어? 아빠가 다쳐서 자신이 없는데?"
  

스페인 광장고풍스러운 놀이공원 같다. ⓒ 유종선


꼭 떼를 쓰진 않아도, 너무너무 하고 싶다는 아이의 눈빛을 부모가 되면 종종 보게 된다. 난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노까지 저을 수 있다면, 내 허리와 팔꿈치는 병원을 안 가도 된다는 합격 판정인 것으로 생각하자.
  

첫 노젓기힘도 체중도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의욕만은 고학년이다. ⓒ 유종선


생각해보니 아들의 첫 노젓기였다. 아직 몸이 영글지 않아 힘도 균형도 부족했지만, 우주에겐 일생의 첫 모험 중에 하나를 경험하는 날이었다. 한 친구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뱃놀이였다.

따로 또 같이 노를 저으며 다리 아래로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물길 위 건물 앞에서 플라멩코 음악과 바닥에 구두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입구에서 벌어지는 야외 공연 소리였다.
    
우린 배에서 내려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그라나다에서 본 동굴 공연과는 또 다른, 햇살 아래 공연의 개방적 정취가 있었다. 우리는 자리가 나는대로 야금야금 위치를 옮겨가며 제일 앞 중간 자리까지 진출했다. 우주는 플라멩코 음악이 너무 신난 나머지 앉은 자리에서 발구름을 흉내내고 360도 몸을 돌려가며 춤을 따라 추었다.

이 아이가 동굴 플라멩코 때는 숙면을 취하고자 했던 그 아이가 맞나? 주변 관광객들도 아이의 흥에 흥으로 화답해 주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야외 공연은 스페인 광장을 들르는 이유가 될 만큼 유명한 관광 코스였다. 잘 모르고 찾아온 나머지 즉흥적 기쁨이 배가된 경우였다.
  

플라멩코 공연스페인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플라멩코 공연 ⓒ 유종선


광장의 중앙에선 아이들을 위한 비누방울이 날아다녔다. 비누방울을 쫓아가는 아들의 뒤를 바라보는데, 분수대의 가장자리에 무지개가 아름답게 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어린이를 위한 동화 속 코스 같았다. 어젯밤 어둠 속의 방황과 예상치 못한 숙소 환경, 그리고 아빠의 부상으로 시작된 세비야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으로 아이의 마음에 남았다. 나의 마음도 그 마음을 따라갔다.

세비야 대성당에선 <꽃보다 할배>에 나왔던 것처럼 콜럼버스의 거대한 묘를 보는 것이 우주의 버킷리스트였다. 대성당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나, 우주는 이제 유럽 여행에선 어딜 가든 대성당이 있고 대성당은 비슷비슷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이의 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세비야 대성당의 오렌지 나무 광장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이 혼합된 성당의 종탑 아래 성당 안의 오렌지 나무 광장이 있다. ⓒ 유종선


"우주야, 저기 조각들이나 그림들 있잖아, 저런 것들이 옛날 사람들에겐 넷플릭스 같은 거야."
"넷플릭스요?"
"예전엔 책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성당에 와서 이런 조각들과 그림들을 보며 이야기를 듣고 상상했거든. 그러니까 저게 다 넷플릭스의 아이콘들 같은 거지. 마치 우주가 넷플릭스에서 보고 싶은 걸 클릭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도 저 그림과 조각들을 보며 이야기를 상상했을 거야.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비슷해. 그 시대 사람들이 좋아했던 걸 모아둔 넷플릭스 같은 거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 다니면서 성당이나 미술관 같은 곳을 보는 거란다."


나는 이 설명을 하며 스스로 상당히 만족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설명이야. 이제 아이에게 성당이나 미술관에서 뭔가 설명을 시작할 만한 다리를 놓은 셈이지. 나의 기지에 내가 다 흡족하군. 그러나 우주의 반응은 간결했다.

"에이, 설마."
  

웅장한 콜럼버스의 묘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는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땅 위에 두었다는 콜럼버스의 관 ⓒ 유종선


한편, 기차를 너무나 좋아하는 우주는 마드리드 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드디어 타게 된 고속열차 렌페(RENFE)로 인해 극강의 기쁨을 표현했다. 우주에겐 최고의 하루에 가까웠다. 세비야에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어젯밤과는 정반대의 안도감과 나른함이 번졌다. 그리고 같이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의 주제곡을 들었다.
  

사제의 죽음을 기념하는 어떤 석상배게가 너무 높아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없어 보여 우주와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석상. 올바른 배게 높이와 배게 베는 법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 유종선


마드리드 기차 역에선 고등학교 때 3년간 계속 같은 반이었던 친구 상미(가명)가 마중나와 있었다. 상미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스페인에 정착했다. 맞벌이를 하며 3형제를 키우는 중이다. 상미는 따뜻한 첫 인사로 나를 반겼다.

"야, 너 왜 이렇게 아저씨처럼 걸어 나와?"

마음이 확 편안해졌다. 이제 나 혼자 어른인 시간이 당분간 끝났어. 며칠 간 기댈 데가 생긴 것이다. 마드리드에서의 나흘을 마치면 우린 프랑스로 올라갈 것이다. 스페인 마지막 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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