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으로 만난 아내...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기억, 그리고 궁금증
누구나 대개 그러하듯 달리의 작품 중 처음 접한 것은 녹아내리는 시계의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1931년 작업 '기억의 지속'이었다. 교과서에 기재된 대로 '초현실주의'의 표상이 된 역사에 남을 그림이다. 작품의 배경과 함축된 의미 같은 걸 제대로 이해하기엔 턱없이 일천한 시절이었지만 (사실 딱히 지금이라고 얼마나 더 잘 이해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갓 청소년기에 진입하던 당시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작업이었음은 분명하다. '초현실주의'가 맞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각인된 건 허영만의 역사만화 <오! 한강> 중 전반부에서 주인공 이강토가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토론모임 선배인 김희중이 빌려준 서양화 화집 속에 수록된 '내전의 전조'였다. 주인공이 그 그림의 역사적 배경 같은 건 알 턱이 없는데도 강렬하게 빨려들 듯 도판을 응시하는 장면은 곧 본인의 체험과도 잇닿는 수준이었다. 만화에서는 곧 터질 동족상잔의 내전을 징후로 묘사하는 장치로도 활용되는 순간이었다. 이강토는 자신이 왜 그 그림에 그렇게나 충격을 받았는지 당시엔 몰랐을 테지만 그 이후 일평생 그 그림의 중력장 하에서 속박당한 삶을 살게 된다. 예술이란 그런 위력을 가진 것이다.
작품을 창조한 조물주 격인 그 이름,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미술계를 뛰어넘어 대중문화와 현대예술 전반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미술에 대해 별로 친숙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그의 대표작으로 어느 미술 교과서에나 빠지지 않고 수록되는 <기억의 습작> 같은 작품을 보지 않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그 정도로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과 문화적 위상은 대체 불가능할 만큼 거대한 경지에 올라서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대표작 한두 편 외에는 오히려 본인의 작품보다 (그 특유의 콧수염과 부릅뜬 연극적 표정의) 화가 본인이 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대중적으로는 초현실주의 미술 경향의 대표 격인 작가로 손꼽히지만 사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동시대의 초현실주의 경향에서 살짝 빗겨나 있기도 하다(또 다른 영향력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에게도 해당되는 지점이다). 반면에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달리의 동료 작가들이 생명력을 잃고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바도르 달리의 영향력과 창작욕은 그칠 줄 몰랐다. 과연 그만이 이룩한 생명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다룬 책과 영상물이 이미 적지 않게 세상에 나와 있음에도 새로운 다큐멘터리 기록영화 소개는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는 이 영화의 의외성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달리의 기록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을 통상적인 예비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대개 살바도르 달리의 전기물이라 하면 대강 이러이러한 방향과 내용을 담았겠지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그 부분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할 이도 있겠지만, 자신의 지적 기반과 무관하게 치닫는 영화의 전개방식에 당황스러울 이가 제법 나올 법하다. 이런 이질감은 이 영화에 대한 평판과 직결될 터이다.
첫 번째로 전기물이자 기록영화인 성격상, 장르가 다큐멘터리라는 건 쉽게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막상 보게 될 영상의 기본형태는 영화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미술관 도슨트 소개 프로그램의 무빙 이미지, 활동사진화에 가까워 보인다. 기승전결 서사를 구현한 영화적 연출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당혹감을, 코로나19 이후 문화예술계에 급속도로 도입된 온라인 공연 및 전시 작업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반갑고 익숙할 스타일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개별 완성도로 접근하게 되면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를 유형의 작업이다. 대신에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해설자 역할을 수행하는 달리 미술관 관장과 큐레이터(로 추정되는 인물)가 직접 안내하고 설명해주는 느낌으로 제법 호사스러운 에스코트와 가이드 속에 미술관 산책을 하는 격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효능이 극대화될 부류의 작업에 속한다.
두 번째로는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가 흔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달리의 면모가 아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측면에 착목해 집중 조명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들이 숱하게 소개되기는 하지만 영상의 속도감은 개별 작품의 이미지를 차분히 음미하거나 특별히 설명하려는 기색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1920-30년대, 청년기의 달리가 창작욕이 불타오르고 그의 작업이라면 대중이 쉽게 짐작할 작품들을 쏟아내던 시기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첫 번째로 언급했던 의외성과 관련을 놓고 보자면, 개별 회화 작업에 대해선 이미 (관객 각자의 상상 속)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했거나 머릿속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영화가 전개된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그 대신에 이 영화는 작가의 짧지 않은 생애 중에 콕 짚어 1929-1989년, 60년의 시간에 중점을 두고 달리의 복잡다단한 가정환경 등 사적인 관계 기록들을 술술 풀어낸다. 화가에 대해 다룬 서적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라도 그렇게 주목하지 않던 부분들이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우리가 흔히 관심이 가고 상식적으로 잘 알려지기도 한 달리의 초현실주의 동료들, 그리고 달리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관계를 맺었던 스페인의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역학구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즉 이 작품에서 우리는 로르카와 달리의 특별한 관계나 루이스 부뉴엘과의 작업 에피소드 같은 것을 거의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초반에는 가족들과의 여러 일화들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친형의 이름을 따 화가의 이름이 정해졌기에 그는 평생 얼굴도 모르는 형에게 종속된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을 테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지역사회에서도 명망 있는 교양인이던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기대를 배반하고 거듭된 반목, 어려서 여읜 어머니 대신에 청소년기에 자신을 돌봐준 여동생과의 인연, 어릴 적 떡잎부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기행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그리고 중반부터는 거의 전적으로 그의 일생의 반려이던 '갈라'와의 로맨스이다. 특히 갈라와의 내밀한 관계와 달리에 대해 그가 미친 영향력 및 역할 론에 대해선 이 영화만큼 세세하게 풀어내는 경우는 보기 힘들 정도다.
거장의 내밀한 매력을 엿보게 돕는 내용과 구성
거기에서 파급되는 또 다른 포커스는, 이 영화가 달리의 (청년기 초현실주의) 회화 대신에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획득한 생애 중반 이후 작업들에 대해 착실하게 정리해준다는 점이다. 현대 개념미술의 전성기에 20세기 전반기 거장들이 영향력을 잃어갈 때에 달리는 오히려 더 거대한 명성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그 방식은 묵묵히 창작에 전념해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고독한 대가'의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도 달리는 지독히 '현대적'인 작가였다. 그는 미술에 대해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일반 대중에게도 강렬하게 각인되도록 본인 스스로를 예술 표현의 상징으로 삼는 과정을 반복해 쌓아올린다.
그런 달리의 접근법은 작품의 정교한 세공보다는 작가의 창작의도와 뭇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전위적/급진적 표현방식에 기대는 현대 개념예술의 '아이콘'이 되기에 차고 넘쳤다. 물론 달리의 창작 태도가 대중을 미혹시키는 선전술에 기댄다는 평판도 적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작가 자신이 거대한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의 총아로 주목도에서 거의 전 생애 내내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 자체가 살바도르 달리의 위상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 부고기사 외에는 무관심 속에 잊히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파블로 피카소 등 몇 명의 거대한 이름 외에 달리와 비견될 현대예술가는 흔치 않다.
특히 영화 내내 거듭 강조되는 달리의 고향 마을과 동네에 대한 애착은 후반부에서 마치 하나의 도시가 성장하듯 그가 구축한 소우주의 의미를 풀어내는데 핵심적 요소로 연동한다.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활동을 거듭해왔던 대가가 자신의 거주/작업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의 성채 혹은 궁전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의 묘사가 서서히 눈앞에 구현될 때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1920-30년대 초현실주의 그룹 동료들의 영향력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 이후 축소되는 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생존자라 할 (비록 초현실주의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정작 당대 논의에선 주류적이진 않았던) 살바도르 달리만이 거장으로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며 건재했다는 점을 본 작품을 통해 확연히 느낄 수 있다(반면에 초현실주의 그룹의 구심이던 앙드레 브루통의 경우 68혁명 시기 재기를 꿈꿨으나 시대에 뒤쳐졌음을 입증하고 만다).
사실 달리의 창작 방식은 원래 문학비평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본류와는 상이한 지점이 많았다. 어쩌면 유행에 민감하고 통상적인 미술작법에는 흥미가 없던 청년기의 주인공이 시대의 '첨단'으로 주목을 받던, 게다가 유럽 문화예술의 수도와도 같던 당대 파리를 휩쓸던 초현실주의 붐에 편승하려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워낙 재능이 출중했기에 그는 초현실주의 이론에선 꽤나 빗겨난 위치에 섰음에도 대가이자 상징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말하지 않기' 입장 덕분에 오히려 의문을 촉발하는 영화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는 1904년에 태어나 1989년이라는 최근까지 짧지 않은 생애를 살면서 인생의 황혼까지 예술 혼을 불태웠던 거장에 대한 경의와 조명도가 약했던 후반부 작업기록에 충실하게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보다 통합적으로 살바도르 달리를 이해하려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의 작업으로 기억될 만하다. 하지만 영화가 굳이 언급하려들지 않는 달리의 중후반기 성공과 명성의 이면에 대한 고심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인지될 테다. 그 미묘한 '결'은 곧바로 살바도르 달리라는 거장에 대한 미술사(그리고 역사인물로서의) 평가로 연결될 테다. 그런 검단은 곧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논쟁과 통하는 논점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영화는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
중립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본 작품의 입장은 균형감 있게 찬반을 고루 다루기보다는 그냥 언급 자체를 피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전개된다. 즉 곤란한 지점은 '말하지 않기'의 방식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달리의 유산을 계승하고 관리하는 이들은 이 20세기의 거장을 상찬하고 알려지지 않은 거장의 후반기 생에 대한 상세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데 철저히 목적을 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 역시 달리의 생애와 작업에 대해 상당부분 인지하고 있다. 하기에 이 영화가 제공하는 거장에 대한 대폭 확장된 데이터는 자연스럽게 관객 각자의 평가를 촉진한다. 영화의 텍스트적 효능은 그렇게 제작진의 의도를 초월하게 마련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촉망받는 젊은 초현실주의 작가의 삶에서 조국 스페인을 뒤덮은 내전의 한복판에 던져진다. 그리고 곧이어 2차 세계대전의 격랑에 처한다. 동료 일부(그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시인 로르카가 대표적인)는 쿠데타 세력에 무참히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로르카는 주인공이 일생의 연인 갈라를 만나기 전 가장 농밀한 관계를 맺었던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적 동지 다수가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거듭할 때 이미 명성이 지대하던 달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오히려 세계적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물론 그렇게 망명생활을 기회로 활용한 문화예술인이 달리 뿐만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일 테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3년 후, 달리는 대서양을 건너 훗날 그의 명성 원천이 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이 부분을 영화에선 주인공이 일평생 고향의 풍경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라 언급한다. 하지만 문제는 귀국 시기가 자신의 동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정치적으로 박해한 프랑코의 독재정권 치하 시절이라는 점이다. 그는 프랑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변절'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귀국 후 조국의 거장으로 환대받으며 고향에서 명사가 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달리는 부에 집착했고 여유로운 삶을 넘어 상당한 재산을 쌓아올렸다(그의 사후 유산은 3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달리의 면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차례 강조했듯이 관객이 이미 그 측면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달리에 대한 재평가가 수반되는 감상이 될 테다.
현대예술계의 총아, 자신을 신화로 재창조하다
대신에 영화는 달리의 창작활동을 ① 그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착 + ② 아내 갈라에 대한 (마치 중세 기사도문학을 방불케 하는) 일평생 순애보의 고양 과정으로 설정하고 구현해낸다. 거기에다 독보적 천재로 형상화된 주인공이 만년에도 관심을 놓지 않았던 천문학과 수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전 방위적인 지적 탐구정신을 덧붙인다. 이런 조명의 태도는 상당히 정치적인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제작진은 아마 살바도르 달리의 주요 관심사는 동시대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와 입장으로 '참여예술'을 행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 했던 것이라 설명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거장의 관심사와 초점은 좀 더 장구한 스케일과 시야로 인류 문명과 철학적 쟁점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라 옹호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골몰했던 실제 주인공의 관점을 화면상에 충직하게 재현하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문제적 인간으로서 주인공에 대한 논쟁적 조명보다는 있는 그대로 거장의 삶에서 덜 알려진 이면을 재구성해 폭넓은 이해를 취하려는 방법론에 영화는 집요하리만큼 충실하게 다가선다.
여기에 누구나 궁금해 할 쟁점, 위대한 예술가의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영화는 풍성한 유산을 잔뜩 이야기보따리 풀 듯 설명해준다. 특히 동료 작가의 아내로 처음 만나 불륜으로 연결되고, 달리의 가족 - 특히 아버지 - 들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의절하다시피 하며 일평생 함께 한 운명의 상대, '갈라' 달리의 역할과 둘의 내밀한 에피소드가 잔뜩 풀어진다. 갈라는 단순한 순애보의 주인공이 아니라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에서도 존재감이 강력했던 예술의 이해자로 등장한다. 유독 모성애에 가까운 이해를 갈구하던 달리에게 10살 연상의 지적이고 행동력 강한 갈라는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조합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갈라는 남편이 오직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달리의 작업을 상품화하고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하는 등 내조와 외조를 전 방위적으로 행한다. 달리는 갈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은 미국 망명시절과 (예나 지금이나 유럽, 그리고 세계 문화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파리 체류를 수시로 진행하면서도 작가의 고향 바닷가를 그들만의 안식처로 삼아 떠나지 않았다. 그 둘만의 공간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겪은 기록과 말년에 갈라가 마치 중세 기사도 문학의 재현을 이룩하듯 옛 성을 수리하고 틀어박힌 에피소드는 통념상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달리의 속사정을 이해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소화한다. 그들의 평생 해로스토리는 워낙에 비범해서 어느 순간부터 빠져들게 만들어버린다.
현대예술의 거장, 제대로 '톺아보기' 찬스를 제공하는 작업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관심이 깊어 그의 전시회를 방문했거나 관련 전기나 소개책자를 숙독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에서 아주 특별하게 새로운 발견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텍스트를 통한 이해와 시각 이미지로 접하는 광경에서 오는 감흥은 차이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게다가 심지어 '무빙-이미지', 즉 활동사진의 운동성은 정지된 이미지 감상과 명확히 다른 체험인 법이다.
달리가 자신이 평생 치열하게 추구하고 기획하려 했던 조건과 환경 하에서 구축해나간 고향 인근 보금자리의 공간 변천사는 그 부분만 떼어놓고 봐도 꽤 재미있다. 고독한 대가의 이미지와 다르게 현대 대중문화에서 달리와 갈라가 체력 닿는 한 소화했던 방문객과의 접촉이나 일상적으로 선보였던 프로그램 장면들은 거의 개인미술관이나 도서관 활동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초빙되어 무대미술을 담당할 정도로 광대무변하게 이뤄진 (그의 폭넓은 관심사와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들을 목격하는 것도 회화작업 외의 다채로운 창작을 확인하는 보람을 선사한다.
그런 풍요로운 거장의 유산을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살바도르 달리라는 작가의 진면목이 이런 거로구나 깨닫게 되고야 만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평생 하나의 창작물처럼 직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위악적이고 과시적인 기행 또한 순수예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대중문화가 잠식하던 당대 사회상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연인 갈라와의 지독한 사랑의 연대기처럼 그는 중세 기사나 음유시인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는 그저 귀부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얻고 싶어 평생 부와 명성, 성공을 쫓았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에 단순한 속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군주가 된 인물일 수도 있겠다.
그가 생전 인터뷰에서 밝히듯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가 예술의 자리를 침범하고 장악하던 시절에 그는 생존과 활동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시대를 선도해 나갔다. '광대'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말이다. 그가 후반기에 선보인 작풍인, 점점 동 시대성을 초월해 고전주의로 자기 스스로를 신화적 존재로 수립해 나간 활동상을 눈으로 목격한다는 건 단순히 정보 차원 습득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 될 테다. 그래서 그의 일종의 팝 아트적인 활동들, 예를 들어 '추파춥스' 로고를 즉석에서 디자인한 일화 같은 게 빠진 건 확실히 아쉽기는 하다. 뭐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에피소드라 뺐을 테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반갑고 유익했던 지점을 마지막으로 언급하려 한다. 스스로를 '돼지'나 '똥'이라 지칭하며 언론플레이를 즐기던 살바도르 달리이지만 예리한 통찰과 심미안은 늘 비수처럼 번득이고 있었다는 증명이다. 밀레의 '만종'에 대한 달리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해석,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두고 작업한 거장의 터치가 영화의 종막 가까운 부분에서 깜짝 서비스처럼 말미에 툭 튀어나온다. 자신들의 비전을 풀어내던 제작진의 깜짝 선물로 여겨져 더 반갑다. 우리가 잘 몰랐던 달리의 이면을 듬뿍 선사하는 거장의 소개영상이자 (<반지의 제왕> 에필로그에서 불사의 땅으로 떠난 주인 '프로도'의 노트를 완성하던 충직한 '샘'의 태도 그 자체인) 꼼꼼한 영상 도슨트 작업과 만났던 시간이다.
<작품정보>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Salvador Dali – In Search of Immortality
2018|스페인|끝나지 않는 초현실 콘체르토 / 다큐멘터리
2023.08.02.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데이비드 푸졸
출연 살바도르 달리, 갈라 달리, 몽세 아구어, 알프레도 히치콕,
루이스 부뉴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외 다수
제작 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
수입/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누구나 대개 그러하듯 달리의 작품 중 처음 접한 것은 녹아내리는 시계의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1931년 작업 '기억의 지속'이었다. 교과서에 기재된 대로 '초현실주의'의 표상이 된 역사에 남을 그림이다. 작품의 배경과 함축된 의미 같은 걸 제대로 이해하기엔 턱없이 일천한 시절이었지만 (사실 딱히 지금이라고 얼마나 더 잘 이해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갓 청소년기에 진입하던 당시에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작업이었음은 분명하다. '초현실주의'가 맞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작품을 창조한 조물주 격인 그 이름,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미술계를 뛰어넘어 대중문화와 현대예술 전반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미술에 대해 별로 친숙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그의 대표작으로 어느 미술 교과서에나 빠지지 않고 수록되는 <기억의 습작> 같은 작품을 보지 않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그 정도로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과 문화적 위상은 대체 불가능할 만큼 거대한 경지에 올라서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대표작 한두 편 외에는 오히려 본인의 작품보다 (그 특유의 콧수염과 부릅뜬 연극적 표정의) 화가 본인이 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대중적으로는 초현실주의 미술 경향의 대표 격인 작가로 손꼽히지만 사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동시대의 초현실주의 경향에서 살짝 빗겨나 있기도 하다(또 다른 영향력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에게도 해당되는 지점이다). 반면에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달리의 동료 작가들이 생명력을 잃고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바도르 달리의 영향력과 창작욕은 그칠 줄 몰랐다. 과연 그만이 이룩한 생명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다룬 책과 영상물이 이미 적지 않게 세상에 나와 있음에도 새로운 다큐멘터리 기록영화 소개는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는 이 영화의 의외성
▲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스틸.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달리의 기록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을 통상적인 예비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대개 살바도르 달리의 전기물이라 하면 대강 이러이러한 방향과 내용을 담았겠지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그 부분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할 이도 있겠지만, 자신의 지적 기반과 무관하게 치닫는 영화의 전개방식에 당황스러울 이가 제법 나올 법하다. 이런 이질감은 이 영화에 대한 평판과 직결될 터이다.
첫 번째로 전기물이자 기록영화인 성격상, 장르가 다큐멘터리라는 건 쉽게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막상 보게 될 영상의 기본형태는 영화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미술관 도슨트 소개 프로그램의 무빙 이미지, 활동사진화에 가까워 보인다. 기승전결 서사를 구현한 영화적 연출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당혹감을, 코로나19 이후 문화예술계에 급속도로 도입된 온라인 공연 및 전시 작업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반갑고 익숙할 스타일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개별 완성도로 접근하게 되면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를 유형의 작업이다. 대신에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해설자 역할을 수행하는 달리 미술관 관장과 큐레이터(로 추정되는 인물)가 직접 안내하고 설명해주는 느낌으로 제법 호사스러운 에스코트와 가이드 속에 미술관 산책을 하는 격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효능이 극대화될 부류의 작업에 속한다.
두 번째로는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가 흔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달리의 면모가 아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측면에 착목해 집중 조명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들이 숱하게 소개되기는 하지만 영상의 속도감은 개별 작품의 이미지를 차분히 음미하거나 특별히 설명하려는 기색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1920-30년대, 청년기의 달리가 창작욕이 불타오르고 그의 작업이라면 대중이 쉽게 짐작할 작품들을 쏟아내던 시기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첫 번째로 언급했던 의외성과 관련을 놓고 보자면, 개별 회화 작업에 대해선 이미 (관객 각자의 상상 속)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했거나 머릿속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영화가 전개된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그 대신에 이 영화는 작가의 짧지 않은 생애 중에 콕 짚어 1929-1989년, 60년의 시간에 중점을 두고 달리의 복잡다단한 가정환경 등 사적인 관계 기록들을 술술 풀어낸다. 화가에 대해 다룬 서적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라도 그렇게 주목하지 않던 부분들이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우리가 흔히 관심이 가고 상식적으로 잘 알려지기도 한 달리의 초현실주의 동료들, 그리고 달리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관계를 맺었던 스페인의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역학구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즉 이 작품에서 우리는 로르카와 달리의 특별한 관계나 루이스 부뉴엘과의 작업 에피소드 같은 것을 거의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초반에는 가족들과의 여러 일화들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친형의 이름을 따 화가의 이름이 정해졌기에 그는 평생 얼굴도 모르는 형에게 종속된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을 테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지역사회에서도 명망 있는 교양인이던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기대를 배반하고 거듭된 반목, 어려서 여읜 어머니 대신에 청소년기에 자신을 돌봐준 여동생과의 인연, 어릴 적 떡잎부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기행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그리고 중반부터는 거의 전적으로 그의 일생의 반려이던 '갈라'와의 로맨스이다. 특히 갈라와의 내밀한 관계와 달리에 대해 그가 미친 영향력 및 역할 론에 대해선 이 영화만큼 세세하게 풀어내는 경우는 보기 힘들 정도다.
거장의 내밀한 매력을 엿보게 돕는 내용과 구성
▲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스틸.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거기에서 파급되는 또 다른 포커스는, 이 영화가 달리의 (청년기 초현실주의) 회화 대신에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획득한 생애 중반 이후 작업들에 대해 착실하게 정리해준다는 점이다. 현대 개념미술의 전성기에 20세기 전반기 거장들이 영향력을 잃어갈 때에 달리는 오히려 더 거대한 명성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그 방식은 묵묵히 창작에 전념해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고독한 대가'의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도 달리는 지독히 '현대적'인 작가였다. 그는 미술에 대해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일반 대중에게도 강렬하게 각인되도록 본인 스스로를 예술 표현의 상징으로 삼는 과정을 반복해 쌓아올린다.
그런 달리의 접근법은 작품의 정교한 세공보다는 작가의 창작의도와 뭇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전위적/급진적 표현방식에 기대는 현대 개념예술의 '아이콘'이 되기에 차고 넘쳤다. 물론 달리의 창작 태도가 대중을 미혹시키는 선전술에 기댄다는 평판도 적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작가 자신이 거대한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의 총아로 주목도에서 거의 전 생애 내내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 자체가 살바도르 달리의 위상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 부고기사 외에는 무관심 속에 잊히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파블로 피카소 등 몇 명의 거대한 이름 외에 달리와 비견될 현대예술가는 흔치 않다.
특히 영화 내내 거듭 강조되는 달리의 고향 마을과 동네에 대한 애착은 후반부에서 마치 하나의 도시가 성장하듯 그가 구축한 소우주의 의미를 풀어내는데 핵심적 요소로 연동한다.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활동을 거듭해왔던 대가가 자신의 거주/작업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의 성채 혹은 궁전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의 묘사가 서서히 눈앞에 구현될 때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1920-30년대 초현실주의 그룹 동료들의 영향력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 이후 축소되는 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생존자라 할 (비록 초현실주의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정작 당대 논의에선 주류적이진 않았던) 살바도르 달리만이 거장으로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며 건재했다는 점을 본 작품을 통해 확연히 느낄 수 있다(반면에 초현실주의 그룹의 구심이던 앙드레 브루통의 경우 68혁명 시기 재기를 꿈꿨으나 시대에 뒤쳐졌음을 입증하고 만다).
사실 달리의 창작 방식은 원래 문학비평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본류와는 상이한 지점이 많았다. 어쩌면 유행에 민감하고 통상적인 미술작법에는 흥미가 없던 청년기의 주인공이 시대의 '첨단'으로 주목을 받던, 게다가 유럽 문화예술의 수도와도 같던 당대 파리를 휩쓸던 초현실주의 붐에 편승하려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워낙 재능이 출중했기에 그는 초현실주의 이론에선 꽤나 빗겨난 위치에 섰음에도 대가이자 상징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말하지 않기' 입장 덕분에 오히려 의문을 촉발하는 영화
▲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스틸.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는 1904년에 태어나 1989년이라는 최근까지 짧지 않은 생애를 살면서 인생의 황혼까지 예술 혼을 불태웠던 거장에 대한 경의와 조명도가 약했던 후반부 작업기록에 충실하게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보다 통합적으로 살바도르 달리를 이해하려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의 작업으로 기억될 만하다. 하지만 영화가 굳이 언급하려들지 않는 달리의 중후반기 성공과 명성의 이면에 대한 고심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인지될 테다. 그 미묘한 '결'은 곧바로 살바도르 달리라는 거장에 대한 미술사(그리고 역사인물로서의) 평가로 연결될 테다. 그런 검단은 곧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논쟁과 통하는 논점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영화는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
중립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본 작품의 입장은 균형감 있게 찬반을 고루 다루기보다는 그냥 언급 자체를 피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전개된다. 즉 곤란한 지점은 '말하지 않기'의 방식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달리의 유산을 계승하고 관리하는 이들은 이 20세기의 거장을 상찬하고 알려지지 않은 거장의 후반기 생에 대한 상세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데 철저히 목적을 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 역시 달리의 생애와 작업에 대해 상당부분 인지하고 있다. 하기에 이 영화가 제공하는 거장에 대한 대폭 확장된 데이터는 자연스럽게 관객 각자의 평가를 촉진한다. 영화의 텍스트적 효능은 그렇게 제작진의 의도를 초월하게 마련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촉망받는 젊은 초현실주의 작가의 삶에서 조국 스페인을 뒤덮은 내전의 한복판에 던져진다. 그리고 곧이어 2차 세계대전의 격랑에 처한다. 동료 일부(그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시인 로르카가 대표적인)는 쿠데타 세력에 무참히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로르카는 주인공이 일생의 연인 갈라를 만나기 전 가장 농밀한 관계를 맺었던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적 동지 다수가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거듭할 때 이미 명성이 지대하던 달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오히려 세계적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물론 그렇게 망명생활을 기회로 활용한 문화예술인이 달리 뿐만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일 테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3년 후, 달리는 대서양을 건너 훗날 그의 명성 원천이 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이 부분을 영화에선 주인공이 일평생 고향의 풍경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라 언급한다. 하지만 문제는 귀국 시기가 자신의 동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정치적으로 박해한 프랑코의 독재정권 치하 시절이라는 점이다. 그는 프랑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변절'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귀국 후 조국의 거장으로 환대받으며 고향에서 명사가 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달리는 부에 집착했고 여유로운 삶을 넘어 상당한 재산을 쌓아올렸다(그의 사후 유산은 3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달리의 면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차례 강조했듯이 관객이 이미 그 측면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달리에 대한 재평가가 수반되는 감상이 될 테다.
현대예술계의 총아, 자신을 신화로 재창조하다
▲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스틸.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대신에 영화는 달리의 창작활동을 ① 그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착 + ② 아내 갈라에 대한 (마치 중세 기사도문학을 방불케 하는) 일평생 순애보의 고양 과정으로 설정하고 구현해낸다. 거기에다 독보적 천재로 형상화된 주인공이 만년에도 관심을 놓지 않았던 천문학과 수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전 방위적인 지적 탐구정신을 덧붙인다. 이런 조명의 태도는 상당히 정치적인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제작진은 아마 살바도르 달리의 주요 관심사는 동시대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와 입장으로 '참여예술'을 행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 했던 것이라 설명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거장의 관심사와 초점은 좀 더 장구한 스케일과 시야로 인류 문명과 철학적 쟁점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라 옹호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골몰했던 실제 주인공의 관점을 화면상에 충직하게 재현하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문제적 인간으로서 주인공에 대한 논쟁적 조명보다는 있는 그대로 거장의 삶에서 덜 알려진 이면을 재구성해 폭넓은 이해를 취하려는 방법론에 영화는 집요하리만큼 충실하게 다가선다.
여기에 누구나 궁금해 할 쟁점, 위대한 예술가의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영화는 풍성한 유산을 잔뜩 이야기보따리 풀 듯 설명해준다. 특히 동료 작가의 아내로 처음 만나 불륜으로 연결되고, 달리의 가족 - 특히 아버지 - 들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의절하다시피 하며 일평생 함께 한 운명의 상대, '갈라' 달리의 역할과 둘의 내밀한 에피소드가 잔뜩 풀어진다. 갈라는 단순한 순애보의 주인공이 아니라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에서도 존재감이 강력했던 예술의 이해자로 등장한다. 유독 모성애에 가까운 이해를 갈구하던 달리에게 10살 연상의 지적이고 행동력 강한 갈라는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조합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갈라는 남편이 오직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달리의 작업을 상품화하고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하는 등 내조와 외조를 전 방위적으로 행한다. 달리는 갈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은 미국 망명시절과 (예나 지금이나 유럽, 그리고 세계 문화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파리 체류를 수시로 진행하면서도 작가의 고향 바닷가를 그들만의 안식처로 삼아 떠나지 않았다. 그 둘만의 공간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겪은 기록과 말년에 갈라가 마치 중세 기사도 문학의 재현을 이룩하듯 옛 성을 수리하고 틀어박힌 에피소드는 통념상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달리의 속사정을 이해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소화한다. 그들의 평생 해로스토리는 워낙에 비범해서 어느 순간부터 빠져들게 만들어버린다.
현대예술의 거장, 제대로 '톺아보기' 찬스를 제공하는 작업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관심이 깊어 그의 전시회를 방문했거나 관련 전기나 소개책자를 숙독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에서 아주 특별하게 새로운 발견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텍스트를 통한 이해와 시각 이미지로 접하는 광경에서 오는 감흥은 차이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게다가 심지어 '무빙-이미지', 즉 활동사진의 운동성은 정지된 이미지 감상과 명확히 다른 체험인 법이다.
달리가 자신이 평생 치열하게 추구하고 기획하려 했던 조건과 환경 하에서 구축해나간 고향 인근 보금자리의 공간 변천사는 그 부분만 떼어놓고 봐도 꽤 재미있다. 고독한 대가의 이미지와 다르게 현대 대중문화에서 달리와 갈라가 체력 닿는 한 소화했던 방문객과의 접촉이나 일상적으로 선보였던 프로그램 장면들은 거의 개인미술관이나 도서관 활동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초빙되어 무대미술을 담당할 정도로 광대무변하게 이뤄진 (그의 폭넓은 관심사와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들을 목격하는 것도 회화작업 외의 다채로운 창작을 확인하는 보람을 선사한다.
그런 풍요로운 거장의 유산을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살바도르 달리라는 작가의 진면목이 이런 거로구나 깨닫게 되고야 만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평생 하나의 창작물처럼 직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위악적이고 과시적인 기행 또한 순수예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대중문화가 잠식하던 당대 사회상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연인 갈라와의 지독한 사랑의 연대기처럼 그는 중세 기사나 음유시인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는 그저 귀부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얻고 싶어 평생 부와 명성, 성공을 쫓았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에 단순한 속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군주가 된 인물일 수도 있겠다.
그가 생전 인터뷰에서 밝히듯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가 예술의 자리를 침범하고 장악하던 시절에 그는 생존과 활동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시대를 선도해 나갔다. '광대'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말이다. 그가 후반기에 선보인 작풍인, 점점 동 시대성을 초월해 고전주의로 자기 스스로를 신화적 존재로 수립해 나간 활동상을 눈으로 목격한다는 건 단순히 정보 차원 습득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 될 테다. 그래서 그의 일종의 팝 아트적인 활동들, 예를 들어 '추파춥스' 로고를 즉석에서 디자인한 일화 같은 게 빠진 건 확실히 아쉽기는 하다. 뭐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에피소드라 뺐을 테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반갑고 유익했던 지점을 마지막으로 언급하려 한다. 스스로를 '돼지'나 '똥'이라 지칭하며 언론플레이를 즐기던 살바도르 달리이지만 예리한 통찰과 심미안은 늘 비수처럼 번득이고 있었다는 증명이다. 밀레의 '만종'에 대한 달리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해석,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두고 작업한 거장의 터치가 영화의 종막 가까운 부분에서 깜짝 서비스처럼 말미에 툭 튀어나온다. 자신들의 비전을 풀어내던 제작진의 깜짝 선물로 여겨져 더 반갑다. 우리가 잘 몰랐던 달리의 이면을 듬뿍 선사하는 거장의 소개영상이자 (<반지의 제왕> 에필로그에서 불사의 땅으로 떠난 주인 '프로도'의 노트를 완성하던 충직한 '샘'의 태도 그 자체인) 꼼꼼한 영상 도슨트 작업과 만났던 시간이다.
<작품정보>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Salvador Dali – In Search of Immortality
2018|스페인|끝나지 않는 초현실 콘체르토 / 다큐멘터리
2023.08.02.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데이비드 푸졸
출연 살바도르 달리, 갈라 달리, 몽세 아구어, 알프레도 히치콕,
루이스 부뉴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외 다수
제작 갈라-살바도르 달리 재단
수입/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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